깊은 산 속의 숨죽인 고요처럼 제주의 아침은 고요했다.
둘째날이다.
게하에서 조식을 마친 남편은 발바닥의 물집을 터트릴까 말까 고심중이다.
양말을 두켤레 겹쳐 신고 만반의 준비를하고 '부엔까미노'......가 아니라 '즐건 여행되세요' 노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선다.
바람은 선선하고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다.
18코스 중간 지점인 삼양해수욕장에서 출발,
해변을 지나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지나자 태고종의 원당사와 조계종의 불탑사가 서로 나란히 마주보고있어 이채롭다.
현무암으로 축조된 불탑사5층석탑은 보물 1187호다.
닭머르를 지나 조천리마을로 들어서자 용천수탐방길이 이어진다.
남탕과여탕으로 표시된 안쪽으로 가보니 맑고 깨끗한 물이 발 담그기 딱 좋아 보여 몇번이고 망설였으나 그냥 지나친다.
경치좋은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앉아있기도하고 야생화의 향기에 취해 놀멍쉬멍 가다보니
18코스 종점인 조천만세동산에 도착,스탬프를 찍는다.
정오가 다 되어 맛집을 찾아 대기자명단에 올려두고 슬쩍 만세동산을 둘러본다.
항일운동의 모태가 된 곳으로 3.1운동기념탑과 애국선열추모탑,제주항일기념관이 자리하고있다.
수학여행지에선 빼놓을수 없는 코스일듯싶다.
조천읍에서의 점심은 단연 최고였다.
푸짐한 갈치구이와 흙돼지볶음으로 든든히 먹고 발바닥 전체에 파스를 붙히고 그래도 좋다고 룰루랄라 까분다
"와아~보리밭이다"
"그건 밀이야"
"와아~ 대파다"
"그건 양파야"
"이건 뭐지?"
"우뭇가사리야"
"아니거든? 아까는 노랬거든?"
"처음엔 꺼멓다가 나중엔 노래져"
"......"
도대체 아는게 없다.
쇠물깍과 올린여 주변을 둘러보고 드디어 함덕해수욕장이다~
휴가철도 아니건만 호텔과 카페가 많아선지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웨딩촬영이나 커플사진 찍느라 여념이없다.
보는건은 있어 나도 슬쩍 백사장으로 내려가 '아들아 사랑해 세유니 사랑해 보고시포' 두서없이 내키는대로 써본다.
내친김에 나 잡아봐라~하며 모래밭을 뛰어가니 어이없어하는 남편의 표정.
실컷 놀다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서우제당 옆을 지나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가는듯한 형상의 서우봉을 오른다.
하늘엔 패어글라이더들이 날고 우거진 숲속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깊고 푸른 바다는 잠시 쉬어 가라고 발목을 붙잡는다.
서우낙조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고하나 보지 못하고 널찍한 돌밭이란 뜻의 너븐숭이를 지나니
동북리풍력발전단지가 멀리 보인다.
중간스탬프를 찍을 동북리운동장에 겨우 도착해 정자에서 잠시 쉬어간다.
남편은 발바닥의 물집을 호소하면서도, 배낭을 두개나 짊어지면서도 전혀 힘들지않다고 뽀빠이행세를한다.
대게 시작점과 중간지점은 숙박이나 식당이 갖춰져있으나
이곳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생뚱맞은 곳에 있어 그만 걷고 싶어도 쉴만한 게하나 식당이 없다.
동북리가 중간스탬프를 찍는다고해서 거리상 중간지점은 아니란걸 알았고
이미 25km 이상을 걸어 조금만 더 가면 19길 끝점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냉이가 많이 자라는 돌밭이란 뜻의 난시빌레부터는 인적이 드믈고 숲이 우거져 여성 혼자서는
걷지말것을 당부하는 안내현수막이 걸려있다.
064-762-2190올레 콜센터,112로 꼭연락을 취하라는 겁나는 안내다.
숲길로 들어서니 과연 글씨가 안보일 정도로 컴컴하고 윙윙 굉음을 내는 15기의 풍력발전기 소리까지 겹쳐
남편이 있는데도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야했다.
곳자왈을 금방 벗어나리라는 예측과 달리 상당히 길게 이어지고
울퉁불퉁 돌길을 걷다보니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그만 쉬고싶었다.
이곳만 벗어나면 게하가 있겠거니 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올레리본이 보이지않는다.
설상가상 날은 어두워져가고 비까지 한두방울 뿌린다.
뷰가 좋고 나쁨은 중요치않고 가장 가까운 게하를 찾아보니 아직 1.4km가 남은 김녕읍내에 있다.
마음같아서는 택시라도 지나가면 타고 싶어질만큼 힘들었으나 있지도않을뿐더러
둘다 절대 꼼수를 부리면 안된다는 일념으로 죽을둥살둥 걸었다.
결국 어둠이 짙게 내린 8시경에서야 게하에 도착,저녁으로 먹은 우럭구이 맛도 모를만큼 만사가 귀찮았다.
아침 9시부터 8시까지 총 10시간여 소요, 38.4km 49977만보를 걸었다.
아...이 정도 거리라면 우리집에서 함평군청까지쯤이나 될까?
한코스 반을 걸었으니 이쯤되면 무식의 극치다.
백리길을 걸었으니 단연 쓰러지기 직전이다.
아침은 어김없이 밝았다.
샤워하러 일어나니 한발짝도 뗄수가 없다.
발바닥이 붓고 뜨거워서 엉금엉금 기어가 찬물에 발을 담그며 나름대로 응급처치를 해본다.
불굴의 의지로 온 발에 파스를 붙히고 등산화 바닥에 손수건을 두껍게 깔고 다시 걷기로한다.
20길 시작점에서 스탬프를 찍고 김녕포구를 거쳐 월정리해변, 세화해변까지 이어지는
예쁘고 시원하고 기대되는 20길의 시작이다.
그러나 한 발 떼기도 힘들어 엉거주춤 어기적어기적 아...이래가지고 어찌 오늘의 목표인 20코스를 걷겠는가말이다.
그러나 주먹을 불끈 쥐고 걷기 시작,
잔디를 일컫는 태역, 성태기태역길을 지나니 7km지점에 고대하던 월정리해변을 만난다.
성급하게도 서핑이나 카약을 즐기는 모습을 망연히 보다보니 그동안 변변한 사진 한장 찍은게 없다싶어
물 색깔이 예쁜 바다를 배경으로 폼 좀 잡아보라 주문한다.
제법 그림이 된다싶어 엄지척, 멋져부러하니 좋아부러 화답한다.
그러고보니 아침을 안먹은게 생각나 급히 검색한후 맛집을 찾아가는 길에 커다란 멋진 개를 만난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길레 '우쭈쭈 심심했쪄요? 아무도 안놀아줫쪄요?짠한시키 우쭈쭈' 예뻐해주고
성게국수와 돔배고기로 포식한다.
몸은 만신창이여서 뷰가 끝내주는 2층 카페로 올라가 이곳 구좌읍의 유명한 당근주스로 심신을 달랜다.
에머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며 비치체어처럼 눕혀지는 소파에서 한참을 졸며 휴식후 다시 걷기 시작.
걷다보면 좋아질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기적거리며 걷는다.
세화포구다.
도저히 안되겠다싶어 오늘은 여기까지다.
죽는다죽는다해도 20.76km 27555보를 걸었다.
벌교가 고향이라는 와락게하 주인장의 안내로 침대에 눕고보니
저녁밥도 안먹고 그냥 잤으면싶으나 배고플 남편을 따라 일어난다.
따뜻하게 푹 자고 일어나니 한결 좋아졌다.
오늘로서 4일째, 돌아가야할 날이다.
10분만 걸어가면 21코스 간세라운지에서 스탬프를 찍을수있으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란걸 깨닳았다.
게하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세화5일장을 둘러보고 다시 찾을 세화를 눈여겨 봐둔후 201번 버스로 올라탔다.
동문시장에 옥돔을 사러가기 위함이지만 시장 안에서 놓친 리본을 기어코 찾아낼 심산이기도하다.
우리가 꼬박 3일간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보니 새록새록 반갑기도하지만 단 1시간만의 회귀에 기가 막힌다.
시장에서 오메기떡과 갓 따왔다는 귤을 한봉지 사들고 택시로 공항 이동.
탱탱하지않아 기대하지않은 귤이 어찌나 맛있던지 다시 가서 사오고싶어졌으나 다음을 기약.
혼자서의 여행을 꿈꿨으나 나 혼자 왔더라면 위험하고 몹시 힘들었을거라며 같이 오길 정말 잘했다고 말하니
혼자는 보낼수없고 말려도 기어코 갈것을 알기에 싸우기 싫어 동행했는데
너무나 이쁜 제주를 샅샅이 안것같아 힘들지않고 참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갈대가 예쁜 가을이 되면 확실한 계획을 세워 다시 오자고 약속한다.
에머랄드빛 바다
푸르고 둥그스럼한 뒷동산같은 오름
아기자기 예쁜 길가의 야생화
꼬불꼬불 이어지는 끝없는 올레길
제주를 표현한 알록달록 벽화들
희고 보드라운 고운 모래알
아름다움 이면에 4.3의 아픈 역사
간간히 보이는 물질하는 잠녀들
구멍 숭숭 현무암
그리고
바람.
한 동안 가슴에 담고 이야기하게 될 제주.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첫댓글 제주의 자연도 물론 좋았겠지만,
금슬좋은 부부의 동행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언니의 귀여운 몸짓들도 생생합니다. 저도 제주 가고 싶어지네요.
글을 읽으며 제주를 함께 들여다본 듯 눈 앞에 그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언니의 힘들었을 발바닥도 떠올려보고요. ..저도 제주여행 가고싶네요~
제주도,초록 물결의 봄도 좋지만 가을 억새의 장관도 일품입니다.*새별오름 꼭 가보십시오.
우리는 여행에서 항상 목표를 정하지요. 그런데 올레길은 쉬엉쉬엉 거닐다 사색하며 충만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지요.
목적없이 가다 좋으면 퍼부러 앉아 멍때리는 것이 제주 올레길이지 않는지
참 많이 걸었군요. 전체 올레길의 약 20% 정도 달성했을지요. 가을에 시간내서 다시 한번 가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