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선배를 먼저 보낸 후 한 달 만에 술떡이 되었다. ‘누가 떠나도 놀라지 않으련다’는 운명론을 곱씹으면서 다시 담양행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다가 어럽쇼, 안학수 형의 부음訃音이 이마를 딱 때렸으니 '아닌 밤중에 청천벽력이다. 부랴부랴 대천역 장례식장으로 움직여 그의 영정 앞에서 방명록 이름자를 적는 나는 참담함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어린 날 동네 청년 누군가의 발길질 한 방이 진한 운명이 되었던가. 그 후 곱사등이 되어 몸의 아픔을 평생 지고 살면서,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키가 가장 작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다. 굽은등으로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 테이블 술값을 통채로 지불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아주 가끔은 노래도 부르고 기분이 좋으면 곱사춤도 춘다. 외로움도 잘 탔으나 소년의 감성으로 금세 회복했으니 쾌활한 성품이다.
첫 기억부터 비감의 수렁이었다. 어머니의 등허리 아래로 푸른 물이 보이는 그 자리에서, ¹
“함께 죽자.”
그때 포대기에 업힌 네 살 피붙이 안학수의.
“엄마, 죽기 싫어요.”
몸부림 소리에 화들짝 놀란 모친께서 다시 물 바깥으로 나온 기억을 아주 오래도록 진하게 간직했단다.
나도 미안하다. 10년 전쯤 되었나, 제주도 숙소에서 바닷가까지 100미터 남짓 되는 거리를 걷는데 학수 형이 중간에서 세 번쯤 쉬는 것이다. 그때 아스팔트에 걸터앉아 낄낄대며 함께 노닥거렸어야 하는데, (개념이 없는) 나는 그냥 우두커니 서서 전봇대에 기댄 채 담배 연기나 북북 날렸다. 심약한 그가 조바심에 시달리다가 조금 빨리 일어섰을 게 확실하다. 그렇게 힘들게 바다에 도착한 후 어린이처럼 천진한 표정을 짓던 밤꽃 미소도 잊히지 않는다.
25년 전쯤 되었을까, 그는 대전일보 신춘문예 출신 동시 작가이지만 그때까지는 <천보당 금은방>이 주 수입원이었다. 소설가 김종광이 대천에서 장가를 가던 날이다. 이문구 선생님이 주례이셨고 송기원 선배도 왕림했었다. 학수 형이 내 옆에 오더니 원고지 뭉치 하나를 슬쩍 찔러주며.
“전업 작가로 나가려는데 강 선생 생각은 어때요?”
나는 설레설레 도리질쳤다.
“작가의 길은 정글인디. 보시오. 기라성 같은 후배들이 도열했으니 형이 자리가 너무 비좁을 거요. 그냥 하던 금은방이나 번창시키고 가끔 작가들에게 술이나 사고 그래도 아쉬우면 사업 와중애 새새틈틈이 쓰세요.”
그 말을 일주일 내내 후회한 다음 다시 반성의 전화를 했다.
“그래요. 한 판 붙어봅시다.”
4년 전이었나, (이제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연희동 작가촌 솔밭에서 둘이 마셨다. 다시 학수 형의 숙소에서 일대일로 한 판 더 차렸는데 이 또한 순식간에 바닥이 난 것이다.(그는 주량은 약하지만 술잔을 물리는 법은 없다.)
“더 사올까?”
“기다릴께.”
그렇게 마트 찾아 검정 봉다리 하나 꽉 채우고 돌아왔는데 그가 쓰러져 쿨쿨 삼매경에 빠진 것이다. '으악' 소리 지르며 방을 빠져나와 새도록 불안감에 시달렸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백설공주처럼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소심증이 엄습한 것이다.
이튿날 벌떡 일어나 찾아가니 밥상을 차리는 중이었다. 그의 생존을 확인하고서, 나 혼자 ‘대한독립만세’ 소리치며 두 팔을 번쩍 쳐든 건 일체 비밀에 부쳤다. 입을 싹 닦은 다음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변신한 채.
“술 사오라더니 왜 혼자 잤냐구? 완죠니 허당 술꾼이구만.”
옆구리 찌르며 놀려대었다. 에 – 하면서.
대천에 가면 글벗들을 우르르 만날 수 있다. 박경희. 송계숙, 황선만 그리고 『마당을 나온 암탉』의 삽화 작가 김환영 화백 등 심성이 착한 얼굴들이다. 모두 푸짐하지만 가장 공들여 접대하는 벗을 하나 딱 찍으라면 그게 안학수 서순희 부부였던가.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술값을 한사코 장악하려 했다. 나는 연신.
‘그만 사요, 돈 좀 작작 쓰라고요.’
밀어내는 척하면서도 열심히 먹고 마셨고 그때마다 그는 그 입이 귀에 걸리게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재작년 어느 봄날,
송기원 형님과 윤재걸 형님이 진도에 찾아오셨다. 적당히 마시고 서마을 전체를 투어한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놓자, 이를 본 학수 형이.
'나도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은데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네.'
그 문자를 보고도 흔쾌히 답변하지 못했던 사연도 뒤늦게 아프다.
그러다가 일주일 전, 2024년 7월 말쯤.
‘만나러 갈게. 한 바퀴 돌고 싶어.’
황선만 작가와 함께 갈 테니 조인트 기획표를 짜라는 그 문자가 마지막이 될 줄은 차마 꿈에도 몰랐다. 단지 나 혼자.
‘담양에 오면 일단 ‘창평 사거리에 모텔방 잡아놓고 국밥부터 뚝딱 해결하고 동네 점방 파라솔 아래 길거리 평상 맥주부터 시작해야지.’
막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소식이 없는 것이다. ‘왜 안 와’ 하고 재촉할 수도 없는 애매한 며칠이 지났다. 폐렴으로 입원하면서.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은데.”
슬쩍 한 마디 던졌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었단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허를 찔리며 삶의 의욕을 잃곤 했다. 아, 어떻게 하나?
이제 故안학수(1954-2024)라고 써야 한다. 가끔 '사는 맛이 뚝 떨어지게 '기분 잡치다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이 착한 사람부터 먼저 부르는 게 확실하니 그런 모진 성품의 조물주에게 절대로 애원하지 말아야 한다. 유지남, 송성영, 송기원, 안학수, 신경림 선생님 그리고 중고딩 시절 짝꿍 박종렬과 이성근의 전화번호를 줄줄이 지우려니 분통이 터진다. 벗들에게 ‘깊은사랑’을 주는 속세를 질투하는 하느님의 심뽀가 너무 무서운 이유이다.
지금쯤 구천에 이틀 먼저 자리잡은 송기원 형님께서 '어서 오게 아우님' 화사하게 당기시며 개다리 술상을 마주하는 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