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두번째 주말인 토요일(4/8)은
집주변의 꽃들이 만개를 하여
굳이 꽃나들이를 나가지 않아도 좋을만큼
눈이 호사스러웠습니다
오랜만에 내린 단비가 조급한 꽃들을 나무라 듯이
볒꽃과 목련꽃을 떨어뜨리고 앵두며 미선나무들을 볼품없게 만들었습니다
허나 그 탓이 꼭 빗님만의 횡포가 아니라
비를 몰고온 바람의 가세가 더 큰몫을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태기를 비롯한 텃밭의 꽃들이 절정을 이루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옥매
백도
박태기와 개복숭아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산앵두
개복숭아
꽃복숭아
금낭화
백도(白桃)
금요일의 일몰과 토요일의 일출
할미꽃
꽃복숭아
며칠만에 자전거를 꺼내
삽교호 관광단지의 벚꽃길을 경유하여 맷돌포로 연결되는 해안길을 달립니다
평택과 아산 사이를 파고 든 서해 바다에
햇빛이 모아지며 눈부신 윤슬을 만들어 내니 황홀합니다
삽교호 관광단지의 놀이시설은 사방 어느곳에서 바라봐도 티가 납니다
갯고랑을 통하여 물이 들고 나는 갯벌은 잠시 쉬고 있는 듯 보이는데
작은 구멍에서 게나 망둥이의 숨소리가 들릴 듯 합니다
물가에 앉아 휴식을 즐기던 갈매기들이
지나가는 나에게 위협을 느꼈는지 자리 이동을 하고!
서해대교가 바라보이는 해안에
돌과 나무, 꽃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놓은 바닷가 커피집에서
잠시 페달을 멈춥니다
커피를 마시려는건 아니고 돌틈에 심어놓은 꽃구경을 하려는 것이지요
제주 윤노리 나무
청화 쥐손이풀
자란
??
돌단풍
히어리
약간의 설치물들과 공들여 키운 꽃들이
그냥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곳이지만
건물을 드나드는게 번거로워 전망대 커피숖으로는 올라가 보지 못했습니다
정원에서도 탁 트인 서해대교를 마주 하는 것도 괜찮아요
건너다 보이는 부곡 산업단지도 오늘은 일부러 들려 볼 참입니다
해안 깊숙이 까지 설치된 부교는
서해대교 가까이의 공사현장에 드나드는 차량용 임시 다리인데
모두가 철골이라 그 무게가 엄청날 듯 합니다
수수꽃다리(라일락)
갓꽃??
송악읍 부곡리의 상록수 교회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었다는 심재영 선생의 고택을 먼저 들릅니다
기념관 길목인 교회 앞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스런 걸음이었지요
심재영 선생의 종손(심천보/이경애)이 살고 있는
1930년에 지어진 집의 대문입니다
심훈 선생이 낙향하여 약 2년간 머문 사랑채에는
완당(추사)의 글씨가 걸려 있습니다
심훈 선생의 장조카인 심재영 선생은
작은 아버지인 심훈 선생보다 열한살이 어렸지만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위하여 계몽운동을 하신 선구자였습니다
심훈 선생은 낙향하여 이 집에서 2년간 머물며
그를 모델로 하여 '상록수'라는 대표작을 구상하셨을 것이고
<직녀성> 과 <영원의 미소>는 이 집에서 쓰여진 작품입니다
고택 뜰앞의 산당화(명자나무)가 붉게 피었습니다
담장밖의 진달래도 곱게 피었고
단정하게 가꾼 정원의 소나무들과 그 사이에 핀 꽃과 나무가 고매한 품격을 지녔는데
외출에서 돌아 온 나이 지긋한 종손에게 여쭤봐도 이름을 정확히 모르신다네요
오석(烏石)에 새긴 심재영 선생의 시(詩)
- 눈 내리는 언덕 길 -
내 이미 다 타버린
한 덩이 연탄재
님의 집앞
미끄러운 빙판 길에
이 몸을 바치리다
내 이미 보기도 흉한
쓸모없는 연탄재
님의 집앞 미끄러운 언덕 길에
이 몸을 던지오니
조심 조심
그 위를 밟고 지나 가소서
눈내리는 새벽 길에
이 몸이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 놓고 걸어 가소서
손 잡고 의 좋게 걸어 가소서
1980년 12월 14일 폭설이 오는 날
심훈 선생의 시비(詩碑)
나의 江山이여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 보니
큰 봉우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視線)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는 굽이쳐 달리는 그 산줄기
네 품에 안겨 딩굴고 싶도록 아름답구나
소나무 감송감송 목멱의 등어리는
젖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三角山)은 적의 앞에 뽑아 든 칼끝처럼
한 번만 찌르면 먹장 구름 사라질 듯이
아직도 네 기상(氣象)이 늠름(凜凜) 하구나
1926년 5월 심훈
출입로인 소나무 숲과 사자상
서해랑길 86코스 구간을 걷고 있는 도보꾼들이
심훈 기념관을 다녀가고 있습니다
필경사(筆耕舍)에 들어섭니다
심훈 묘소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마전리에 있던 묘소를
2007년 12월 5일 당진시 송악면 부곡리 자신의 집 옆으로 이전함
집 옆의 향나무와 사철나무(冬靑)
심훈 선생께서 상록수인 소나무와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합니다
심훈의 집(筆耕舍)
내가 화가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밀레]처럼 유한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이 살아서
구름 속 용(龍)같이 꿈틀거리는
[반 고호]의 필력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 1932. 10. 8 심훈 / 생명(生命)의 한 토막 中 발췌 -
상록수 기념관
[그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심훈 기념관]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저항 시인이자 소설가요 영화 배우, 감독 등
당시로서는 다양한 예술활동을 펼쳤던 심훈 선생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문화 공간으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심훈 선생의 일생
1901년 :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검은돌(현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출생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호는 삼준, 삼보, 금강생(金剛生), 해풍(海風), 백랑(白浪) 등이 있다
1915년 : 경성교동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
1917년 : 이해영과 결혼
1920년 : 국문학자 이승희에게 한글 맞춤법을 배움
중국으로 망명하여 우당 이희영, 단재 신채호, 석오 이동녕, 성제 이시영등과 교류를 통해
많은 감화를 받았으며 엄항섭, 유우상, 정진국 등 임시 정부 청년들과도 가깝게 지냄
시 <박군의 얼굴>의 박헌영과도 상해에서 조우한 것으로 보임
1925년 : <장한몽>에 남자 주인공 이수일 역으로 후반부에 출연
1926년 :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동아일보에 연재 - 필명 '심훈'을 쓰기 시작
같은 해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사 퇴사
1926년 4월 29일 순종(융희황제)의 국장이 준비되고 있는 돈화문 앞에서
<통곡 속에서>를 지었고 5월 16일자 시대일보에 발표
1927년 : 일본 유학, 영화수업을 받음, 귀국 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집필, 각색, 감독, 제작(계림여화협회)하여 10월 26일 단성사에서 개봉
1930년 :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게재(검열에 걸려 중단)
1931년 :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경성방송국 문예담당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사상문제로 퇴직
1932년 : 부모님이 살고 계신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해 무산
1933년 :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를 7월 10일 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8월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취직하여 상경하였으나 다시 당진으로 이사
1934년 : 장편소설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장편소설 <상록수> 동아일보에 당선되어 이때 받은 상금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
1936년 : 1월 단편소설 <황공의 최후>를 '신동아'에 발표, 8월 <오오 조선의 남아여!> 발표
9월 장티푸스로 인해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 영화인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
그가 생전에 사용한 책상과 유품들
옥상에 있는 '그날이 오면' 시비 옆에 세워진 동상과 '7월의 바다' 발췌문
그의 삶 앞에 한송이 꽃을 바칩니다
인근에 있는 한진항을 거쳐 부곡산단과 삽교호 해안길로 되돌아 옵니다
햇볕을 받아 더욱 화사해진 벚꽃
호수공원의 노랑꽃이 흐드러진 유채밭
모처럼 지역의 위대한 인물이신
심훈 선생의 얼이 서린 필경사를 둘러보는
뜻 깊은 라이딩을 가졌습니다
꽃구경 봄나들이를 곁들인 바닷가 길에서는
미세먼지 걱정은 잊고 물바람을 가슴에 가득 담은 상쾌한 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