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破竹之勢)
풀이
깨뜨릴 파 · 대 죽 · 갈 지 · 기세 세
뜻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 세력이 강하여 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 혹은 일이 거침없이 잘 풀리는 모양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위(魏) 나라의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265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진(晉)이라 했으니, 이이가 바로 무제(武帝)이다. 이제 위(魏) · 촉(蜀) · 오(吳) 삼국 가운데 남은 것은 오(吳)나라였다. 무제는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 등에게 군사를 주어 오나라를 치게 했다. 279년, 두예는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호북의 강릉으로 진격했고, 왕준(王濬)은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진격했으며 왕혼(王渾)은 수도 건업(建業)으로 진격했다. 다음 해인 280년 2월, 무창(武昌)을 공략한 두예의 군대는 왕준의 군대와 합류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향후의 공격 계획에 대해 회의를 했다. 한 장수가 곧 강물이 범람할 시기가 다가오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니 일단 후퇴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자 두예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대나무를 쪼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몇 마디가 쪼개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져 다시 손 댈 곳조차도 없게 된다.(今兵威已振, 譬如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 無復著手處也.)”」 두예는 곧바로 군사를 재정비하여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으로 진격하여 단숨에 함락시켰다. 오왕 손호(孫晧)는 손을 뒤로 묶고 수레에 관을 싣고 항복해 왔다. 두예는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후(當陽侯)에 봉해졌다. 두예는 만년에는 학자로서 학문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춘추석례(春秋釋例)》, 《좌전집해(左傳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에 나오는데, 두예의 말에서 ‘파죽지세’가 유래하여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세여파죽(勢如破竹)’으로도 쓰며, 칼날이 닿으면 쪼개진다는 뜻의 ‘영인이해(迎刃而解)’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심지어 중국인들까지도)이 ‘영인이해’를 ‘영도이해(迎刀而解)’로 쓰고 있는데, 아마 ‘칼날 인(刃)’ 자와 ‘칼 도(刀)’ 자가 글자도 비슷하고, 뜻도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인 데다, 발음하기에 ‘영도이해’가 더 쉽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迎刃而解 yíng rèn ér jiě, 迎刀而解 yíng dāo ér jiě) 중국 대부분의 공구서에는 ‘영도이해’란 말이 실려 있지 않다.
용례
한국전쟁 초기에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전쟁 개시 며칠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