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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이게 심심파적으로 만든거면
그럼 본격적으로 쓰면 그건 어느정도 수준이 된다는 이야기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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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놉시스 >
척 준 경
1. 장르 : 대하드라마. 100부작
2. 시대적 배경 : 고려 문종 승하시 - 인종조 척준경 사망까지
(서기 1083년-1144년)
2. 기획의도
2천년대 들어 KBS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고려왕조 500년 시리즈는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무인시대’까지를 방영하고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가 5년만인 지난
해 ‘제국의 아침’ 후속작격인 천추태후가 방영되었다. 그러나 이후 고려왕조 500
년 시리즈는 다시 중단되어 언제 다시 이 프로젝트가 재개될지 기약이 없다. 따라
서 고려왕조 500년 시리즈는 여진정벌,몽골의 침임등 정작 중요한 시기들이 많이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마음을 금할길이 없다.
이에 고려 예종조의 여진정벌을 비롯 고려판 세조 숙종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및
인종조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까지의 고려중기 파란만장했던 시기를 특히 이 시
대를 살다간 파란(波瀾)과 비운(悲運)의 장수 척준경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재 조명
해본다.
주제 1. 윤관의 여진정벌과 척준경.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윤관의 여진정벌 이야기. 헌데 우린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은 윤관에 대해선 잘 알아도, 그에 가려진 비운의 장수 척준경에 대
해선 잘 알지 못한다. 실상 여진정벌때 윤관을 최측근에서 도와 결정적 싸움때 마
다 승리를 이끈 장수가 바로 척준경이다. 따라서 그 척준경을 중심으로 이 시대를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진족에 대한 평가는 한 20년전까지만 해도 그저 우리민족을 자주 괴롭히던 북
방의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선 이 여진족에 대해서도 재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는 자신들의 시조가 신라
에서 왔다고 주장해왔고, 고려사 예종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있다. 대개 한 나라를 세운 태조(太祖)는 자신의 개국과 집권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선조를 미화하기 마련이라는 것. 가령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자신들의 조상이 당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했고, 조선을 건국한 이
성계 역시 후대에서 그들의 조상을 용비어천가라든가 각종 전설로 미화시켜놓았
다. 따라서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자신의 조상이 신라에서 왔고, 심지어 마의태자
의 후손이라고 까지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신뢰할만한게 못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여진에게 신라나 고려등 우리 민족이 그만큼 동경
과 흠모의 대상이기도 했다는 방증 아닌가. 과연 고려시대 우리에게 여진족은 무
엇이었나.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해본다.
주제 2. 비운의 장수 척준경의 삶
윤관을 도와 여진을 토벌한 공로로 인종초기 ‘이부상서 참지정사’, ‘개부의동삼사
검교사 도수사공 중서시랑 평장사’ 벼슬까지 오르게 된 척준경. 그러나 불행히도
척준경은 고려사에 ‘반역열전(反逆列傳)’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여진정벌에 공을
세운 명장 윤관,오연총등이 모두 충의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길이 남기고 있는데
어째서 척준경은 반역자가 된 것일까. 실은 그가 이자겸의 난에 가담했었기 때문
이다. 이자겸의 난에 가담한 죄로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로 귀양을 가고,
이후 고향에서 등창이 터져 세상을 떠난 비운의 장수 척준경. 심지어 그의 후손은
오늘날까지 단 한사람도 남아있지가 않다. 윤관만 해도 파평윤씨로 그 명문가가
오늘날까지 번창해 내려오고 있고, 이자겸의 난을 일으킨 경원(또는 인주)이씨 이
자겸 역시 반역자로 귀양을 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 가문만큼은 오늘날까지도 ‘인
천이씨(仁川李氏)‘로 대체로 흥하게 내려오고 있다. 헌데 왜 척준경의 가문 만큼은
이와같은 몰락의 길을 갔는가. 드라마 ‘척준경’을 통해 그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보
고자 한다.
주제 3. 고려판 세조 숙종의 이야기
어린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세조와 판박이인 고려
15대 임금 숙종. 그러나 그의 경제개혁과 부국강병책은 결과적으로 예종조에 와
서 여진정벌과 윤관의 동북9성이란 결실을 보게 된다.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쿠
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나 탁월한 능력으로 국정을 수행해간 숙종. 그 의미를 오늘
날 곱씹어보는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주제 4. 11세기 말-12세기 초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척준경,윤관 그리고 고려 15대 임금 숙종등이 살다간 11세기 말부터 12세기까지
의 동북아는 실로 격동하는 급변의 시기였다. 한때 고려와 송나라를 위협하며 북
방의 강자로 군림했던 거란의 요나라가 쇠퇴하고, 대신 아골타가 흩어져있는 여진
족을 규합 새로운 동북아의 강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아골타는 요나라를 멸망시
키고, 송나라 또한 남쪽으로 쫓아보내 북송시대 막을 내리고 남송시대가 열리게
했다. 게다가 고려의 정세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니, 이토록 이 시기 동북아
정세에 중요한 변수로 자리매김하며 급 부상했던 금나라의 위상. 그리고 요나라,금
나라,송나라 사이의 위기의 시기를 고려조정은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 그 시기를
조명하며 오늘날의 우리를 돌이켜 본다.
주제 5.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그리고 그 후...
단재 신채호로부터 천년에 한번 일어날까말까한 사건으로 평가받았다는 묘청의
난. 하지만 오늘날 사학자들이 묘청의 난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곱지 못하다.
오히려 풍수지리를 내세운 한 요승(妖僧)의 괴설(怪說)에 휘말려들어가 정작 나라
만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는게 오늘날 사학자들이 묘청의 난을 바라보는 평가다.
더욱이 묘청이 살던 고려 인종조는 이미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
까지 쫓아보낸뒤, 북방의 강자로 그 입지를 이미 완전히 굳힌뒤. 그때 묘청의 말
만 무조건 따라 북벌을 감행했다면 어찌되었을까 하는 것이 오늘날 사학자들의
평가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고려는 숙종의 경제개혁과 부국강병책 그리고 예종
때 윤관의 여진정벌등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숙종의 손자 인종조에 접
어들면서 이자겸의난,묘청의난을 겪으며 다시 혼란기로 접어든다. 마치 3대이상을
가는 부자가 없다는 속설을 증명케라도 하듯 숙종이 일구어낸 전성기는 손자 인종
조에 와서 다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뒤를 잇는것이 의종조로 접어들어
무신정변이 일어나며 무신집권의 암흑기로 접어든것이 고려시대임을 감안한다면,
고려 중반기 최고의 전성기와 그 쇠락의 과정을 살펴보면 숙종-예종-인종조의 이
야기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3. 주요 등장인물
척준경 : (1068(추정)년-1144년) 척준경의 출생연도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그러나 척준경을 비롯한 이 드라마 주요 등장인물들의 활동시기를 감안,
그리고 전체적인 극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이 드라마에 한해 척준경의
출생연도를 1068년으로 정한다. (문종 승하시 (1083년) 16세)
그의 아버지는 고향 곡주의 하급관리. 하지만 집안이 가난해 척준경은
글공부를 포기하고 동네 무뢰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아버지의 속을 썩인
다. 그러다 하루는 호기심에 혼인을 앞둔 한 귀족집안 예비신부를 덮치
게 된다. 그러나 마을의 실력자면서 고려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예인 명
문 파평윤씨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게 된 집안은 경사스런 혼인날을 망
치려 한 무뢰배들을 잡아내려 혈안이 된다. 물론 소식을 들은 파평윤씨
집안도 노발대발 격노한 것은 말할것도 없다. 결국 척준경 일당이 잡혀
오고. 하지만 이 집안의 30세 청년 윤관은 그를 눈여겨보는데. 감히 명문
가의 혼례날을 망친죄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척준경. 하지만 윤관은
밤에 몰래 갇혀있는 그를 불러낸다. 그리고는 꾸짖음과 타이름을 섞어 말
한다. “보아하니 무예에 그런대로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 어찌 그와같은
재주를 이토록 무도한 곳에 쓰느냐 ? 무술은 마땅히 정도(正道)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법 ”
그렇게 시작된 윤관과 척준경의 첫 인연. 한편 이 무렵 윤관은 동료 오
연총과 함께 계림공 왕희(훗날의 숙종)를 모시고 있었다. 선종 3년 수태보
가 된 왕희는 이 무렵 황해도 지역을 관할하는 일을 겸임하고 있었다.
윤관과 오연총 밑에서 무예를 배우던 척준경은 두 사람의 추천으로 개경
부의 사환으로 일하면서 훗날 고려 15대 임금 숙종이 되는 계림공 왕희
와도 인연을 맺게 되는데.
숙종이 즉위한 뒤 척준경은 추밀원 별가가 된다. 한편 윤관과 오연총을
따르면서 여진과 거란 그리고 송나라까지 뒤섞인 복잡한 동북아의 정세에
대해서도 차츰 알아가게 되는데...
보영 (가공인물) : 본명 황보영. 척준경 일생의 여인(女人). 활달하고 진취적인
전형적인 고려시대 여성상을 그린다. 무인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오라버니들을 따라다니며 무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
다. 집안에선 여자아이가 무예에 관심이 있는걸 걱정하였으나, 보영은
자라서 결국 한 귀족집안의 여인네들을 보호하는 여성 호위무사를 맡
게되고. 바로 그 집안의 신부를 호위하던 중에 척준경과 처음 맞닥뜨리
게 된다. 척준경보다 세 살 연상인 그녀는 처음엔 척준경의 뺨을 후려
갈기며 호령까지 해 쫓아보낸다. 그러나 윤관에 의해 목숨을 구한 척준
경과의 인연은 다시 시작되고. 하루는 보영이 척준경에게 활쏘기 시합
을 제안한다. “만약 활쏘기에서 네가 나를 이기면 내가 너를 평생 주인
으로 모실것이요, 만약 내가 너를 이기면 넌 내가 바라는 것을 무엇이
든 해줘야한다.” 사실 윤관밑에서 칼쓰는 법은 배웠지만, 활쏘기는 상대
적으로 자신이 없었던 척준경. 결국 어이없이 시합에서 보영에게 패하
고 만다. 그렇게 내기대로 보영의 노예(?)가 된 척준경 하지만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척준경과 결혼 단순무식하고 격정적인 무장인 연하의 남편 척준경에게
조언자가 되어준다. 총명하고 지혜로운 성격. 하지만 이자겸의 난의 소용
돌이속에 척준경과 사이에서 난 1녀1남을 모두 잃게되자 망연자실한다.
정지상의 탄핵으로 척준경이 귀양을 간 뒤에도 끝까지 그를 옆에서 지킨
일편단심의 여인
윤관 : ( ? - 1111) 고려사에서 그가 처음 등장하는것은 숙종 즉위직후. 좌사낭장
으로 임명 된 그는 형부시랑 임의와 함께 숙종의 즉위사실을 알리기 위해
요나라로 파견된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한 그는 특히 여진과 거란등 북방
의 정세에 관심이 많았다. 여진의 침임때 전투에서 패한뒤, 별무반을 조직할
것을 숙종에게 건의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신기군,신보군,항마군의 별무반이
조직된다. 이후 예종대에 이르러 오연총,척준경등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는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고려사 열전의 기록으로 미루어볼때 윤관은 대체로 숙종의 최측근이었을것
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척준경 또한 숙종의 계림공 시절 발탁이 된 것이라
나와있으니 분명 이들 세사람 사이엔 젊은시절 범상치않은 인연이 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척준경에겐 생명의 은인이자 스
승과 다름없었던 윤관. 동북9성의 문제로 여진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결국
신하들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예종 6년(1111년) 세상을 떠난
그. 문무(文武)를 겸비한 충직한 무장으로 많은 이들의 신망을 받았다고 고
려사에 기록되어있는 윤관. 만약 그가 이자겸의 난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척
준경의 불행은 막을수 있었을까.
오연총 : (1055-1116) 윤관,척준경과 함께 여진정벌때 혁혁한 공을 세운 무장으
로 역시 숙종의 최측근. 마치 조선시대 세조처럼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
위에 오른 숙종.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문신들중 숙종의 측근이었던 소태보
,최사추,임개등은 모두 숙종(1054년생)보다 스무살이나 위다. 실제 소태보,
최사추등은 숙종 즉위후 고령으로 사퇴하려 하자 왕이 이를 만류하기까지
한다. 원로급이라 할만한 대신들이 한결같이 숙종을 따랐다는 것은 그만큼
숙종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다는 증거도 되지만, 또 한편으론 스승이나 아버
지뻘 되는 그들과 늘 대해야하는 숙종의 마음은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숙종에겐 그와같은 연로한 문신들보다는 엇비슷한 연배의 무장인
오연총,윤관 같은 인물들이 마음을 나눌만한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숙종 : 고려 제15대 임금. 재위 1095-1105. (1054년생).
조선 7대 세조처럼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고려 숙종
의 경우는 조선 세조의 경우와 좀 달리볼 부분이 있다. 유학을 기본이념으로
한 조선이 적장자 승계원칙을 분명히 했던것과는 달리 고려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후세에 만일 국왕의 맏아들이 착하지 못하거든 왕위를 다른 아들
에게 줄 것이며 또 다른 아들이 착하지 못하거든 그 형제중에서 여러 사람들
에게 신망이 있는 자로써 정통을 잇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으니 적장자 계승
을 원칙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실제 고려는 이미 초창기에 혜종-정종-광종
이 형제간에 왕위를 승계받은 전례가 있고, 숙종의 아버지 문종 역시 형인 덕
종-정종(靖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따라서 숙종은 조선의 세조처
럼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선대왕의 고명(顧 命)을 받들지 못했다는 정치적 부담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더욱이 조선 세조
의 일이야 고려 숙종보다 350여년이나 지난 후세에 벌어지는 일. 따라서 고려
숙종이 조선 세조때나 가서 벌어질 일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1083년(문종 37년). 부왕(父王) 문종의 장례식. 그리고 상주(喪主)가 되어있
는 병약한 문종의 장남 순종(順宗)을 바라보는 계림공 왕희의 눈빛은 의미심
장하기만 하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밝았고, 도량이 넓어 부왕으로부터 ‘후일
왕실을 부흥시킬 자’란 칭송을 듣기도 한 계림공. 특히 그에겐 자신보다 스무
살 많은 소태보,최사추등이 늘상 따라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계림공은 스무살
많은 문신들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무장 윤관,오연총등과 마음을 나누
며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는데. 무엇보다 계림공에겐 남다른 야심이 있었다.
고려가 어떤 나라던가. 바로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 나라다. 그러나 성종,
현종조 세차례 거란의 침입을 받으며 시달리기도 했던 고려는 그후 거란은 물
론 여진족과도 그럭저럭 친분을 쌓으며 나라를 이끌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계
림공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북벌과 고토회복(故土回復)만이 진정한 고구려 정
신의 계승이라 생각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주를 뜻하는 의미의 계림
공이란 군호 역시 내심 불만이었다. 선종이 즉위한후 계림공은 자청하여
황해도 지역을 관할하는 일을 맡게되고 척준경과의 첫 인연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친구처럼 어울려 지내는 무장 윤관,오연총과 늘 북방의
정세를 살피던 계림공. 한편 병약한 순종이 석달만에 세상을 떠나고 문종의
차남이자 계림공의 둘째형인 선종(宣宗)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선종
은 유교와 불교를 모두 상생케 하는 화합의 정치를 펴고, 송과 거란,여진 그리
고 왜를 모두 아우르는 폭 넓은 외교로 나라를 안정시킨다. 하지만 유학으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밖으로는 북벌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던 계림공은 그와같은 형의 정책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종의 통치기간 10년 동안은 그러한 야심을 숨기며 때를 기다릴수밖에 없었
고, 마침내 선종이 승하하고 11세 어린조카 헌종이 즉위하자 계림공은 본격적
으로 야심을 드러내는데...
명의태후 (또는 명의왕후) : 숙종의 비. 숙종의 정치적 동반자. 조선시대 숙종이 장
희빈등 여자문제로 말썽이 많았던 반면 고려 숙종은 오직 명의태후 단 한 사
람과의 사이에서만 7남4녀를 두고 일절 다른 후비나 후궁을 들이지 않아 그
점도 매우 이채롭다. 그만큼 부부간의 정이 두터웠던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말못할 사정이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얼켜 있었던 것일까. 명의왕후는 숙종이
즉위하고도 4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왕후 책봉을 받게된다.
선종 : 고려 13대 임금. 재위 1083-94. 유교와 불교를 모두 상생케 하는 화합정
치, 그리고 주변국가들을 모두 아우르는 외교정책으로 태평성대를 연다. 하
지만 즉위 10년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11살 어린아들이 왕위에 오르
면서 고려왕실엔 한바탕 파란이 몰아치는데
사숙태후 (또는 사숙왕후) : 선종의 비. 선종 재위기간 10년동안 옆에서 그를 보
필,내조하며 정치적 수완과 국정의 경륜을 쌓아갔다. 그리고 남편 선종이 죽
고 어리고 병약한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이 직접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
데. 사숙태후는 처음엔 남편 곁에서 10년동안 보고 배운 경륜으로 능히 국정
을 수행해 나간다. 하지만 여자몸으로 결국 한계가 있었던 것일까. 특히 외척
인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 원신궁주 소생인 한산후 왕윤을 보위에 올리려 음
모를 꾸미자 시동생 계림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계림공과 손을 잡고 이자
의 세력을 척결한 사숙태후. 그러나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
이자의 세력을 제거한 공으로 조정의 실권을 잡은 계림공은 노골적으로 야심
을 드러내 마침내 사숙태후와 헌종 모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른다.
이자겸 : 문종의 장인 이자연(李子淵)의 손자. 고려 문종-인종조까지 최고의 세도
가이자 외척이었던 경원(또는 인주)이씨 집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딸 셋
을 문종의 왕후로 바치고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온 할아버지 이자연
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또한 그의 누나도 12대 순종(順宗)의 후비가
되어 음서로 합문지후가 되는데. 하지만 그의 누나 장경궁주가 궁노와의
간통사건으로 쫓겨나며 그도 연좌(緣坐)되어 벼슬을 내놓게 된다. 이자겸
은 그 일로 생전 처음 고려왕실에 앙심을 품게되고. 그러나 설상가상 이
자의의 난이 일어나면서 그의 가문도 일시적으로 위축된다. 하지만 숙종
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둘째딸을 예종비로 바치게 되고. 마침내
그도 할아버지가 누렸던것과 같은 권세를 누릴 기회가 찾아온다. 예종이
자신의 딸 순덕왕후와의 사이에서 인종을 낳게되고, 이자겸은 왕의 장인
이자 태자의 외할아버지로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데. 인종이 즉위하
자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자신의 딸 두명을 더 인종의 비로 맞아들이게
하는등 갈수록 횡포가 심해진다. 한편 여진정벌의 공으로 병권을 손에 쥐
게 된 척준경은 이자겸에겐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껄끄러운 경계의 대
상이었다. 윤관과 오연총등의 충고로 척준경도 이자겸과는 늘 불가근 불
가원의 원칙을 유지했으나. 하지만 윤관,오연총등에 비해 단순하고 우직
했던 척준경은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차츰 판단력이 흐
려지게 된다. 이자겸은 감언이설로 차츰 척준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
이게 되고, 결국 척준경을 도저히 돌이킬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는 장본인
이자의 : 이자연의 손자로 이자겸과는 사촌지간. 여동생이 13대 선종(宣宗)의 후비
가 된다. 선종이 죽고 11살 어린 헌종이 즉위 그 모후 사숙태후가 실권을
잡자 자신의 누이 원신궁주의 소생 한산후를 보위에 올리려는 음모를 꾸
미는데. 하지만 계림공 왕희와 손을 잡은 사숙태후에 의해 몰락하고 만다.
장경궁주 : 이자겸,이자령의 누나로 12대 순종의 후비가 된다. 하지만 자신보다 열
살 많은 병약한 순종이 왕위에 오른지 석달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모든 것이 허망하기만 했다. 왕비로서의 권세도, 남편과의 두터운 사랑
과 정도 쌓아보기도 전에 그만 과부신세가 된 것 아닌가. 결국 그녀는
궁노와 간통 결국 그 일이 발각되어 쫓겨나고 만다.
원신궁주 : 이자인,이자의 형제의 막내 여동생. 13대 선종의 후비가 된다. 선종에
게 있어 사숙태후(왕일때는 사숙왕후)는 일생을 함께한 정치적 동반자
이자 훌륭한 조언자였다. 하지만 연상의 사숙태후는 선종에게 좋은 동
료는 될지언정 여성으로 대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부담스러운 면이 있
었다. 그런 선종은 훗날 들어오게 된 자신보다 열 살 어린 원신궁주
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쏠리게 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한산후 왕윤
등 아들 셋을 낳게 된다. 사숙태후로선 당연히 질투가 날 수 밖에 없
는 일이지만 그녀는 이 일을 묵인한다. 어차피 왕위에 오를것은 자신
의 아들인 태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하지만 선종이 세상을 떠
나고 사숙태후의 아들이 14대 선종이 되자 원신궁주의 오라비 이자의
가 마침내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예종 : 고려 16대 왕. 재위기간 1105-22. 아버지 숙종의 부국강병책을 이어받
아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는등 영토확장에 힘쓴다. 그러나 여진과
의 끝없는 마찰 끝에 결국 동북9성은 반환하게 된다. 유학을 장려하고 아악
을 들여오는등 문화부흥에도 힘쓴 임금. 이자겸의 둘째딸이 그의 두 번째
왕후(순덕왕후)가 되어 인종등 1남 2녀를 낳는다
인종 : 고려 17대 왕. 재위기간 1122-46. 숙종,예종을 거치면서 부국강병과 문화
부흥의 길을 갔던 고려는 인종조에 이르러서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이미 둘째딸을 예종비로 바쳐 예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외할아버지가 된 이
자겸은 그 권세를 계속 이어가고자 셋째딸,넷째딸마저 모든 신하들의 반대
를 무릎쓰고 인종비로 맞아들이게 하고. 급기야는 인종을 독살하려 하지만
이는 이자겸의 넷째딸이자 인종의 두 번째 비의 기지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
다. 이자겸은 마침내 병권을 쥔 척준경을 끌어들여 반란을 꾸미는가 하면
한편으론 이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십팔자왕위(十八字王位)’설을 퍼트린다.
이자겸의 난에 가담한 척준경을 설득 다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이자겸
세력을 척결하고 이어 정지상의 탄핵으로 척준경까지 처벌하지만 얼마안가
이번엔 묘청등 서경세력에 의한 ‘묘청의 난’까지 겪게 된다. 그렇게 숙종이
꿈꿨던 부국강병과 유학의 나라는 손자 인종대에 가서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아골타 : 금 태조. 동만주의 생여진과 고려 장성주변의 여진족을 통합 금나라를 건
국한다. (1125년) 한때, 만주를 지배했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 마
저 남쪽으로 쫓아보내며,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만주지역을 전전하던 유
목민족에 불과했던 여진족을 모아 12세기 동북아 최강자 금나라로 군림
하게한 불세출의 영웅. 한편으로는 자신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으며 심지
어 마의태자의 후손이라고까지 주장하는 그의 말은 과연 사실일까 ?
오야속 : 아골타의 형. 여진 완옌부 추장으로 동여진중 복종하지 않는 부락들을
공격하다 그 여세를 몰아 고려까지 친다. 고려는 윤관을 시켜 여진족을
격퇴하고 9성을 쌓으나 오야속의 계속되는 압력으로 결국 9성을 반환
하고 여진에게 조공을 하기로 약속하고 화친을 맺는다.
핵리발 : 아골타와 오야속의 아버지
천조제 : 요나라 마지막 황제 (재위 1101-25). 금나라에 패해 나라가 망한뒤
포로가 되어 백두산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송 휘종 : 북송 제8대 황제. (북송 마지막 황제는 그의 아들인 9대 흠종이다)
강성해진 금나라가 송에 사신을 보내 함께 요를 치자고 약속하나, 북송
은 이때 방랍의 난을 진압하느라 출병을 못하고, 뒤늦게서야 군대를 보
낸다. 금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바보신세가 된 휘종은 이번엔 요나
라와 함께 금나라를 합공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 음모를 금나라가 먼저
알아채고 격분 송나라를 공격한다. 송나라는 결국 수도를 빼앗기고 남
쪽으로 이전 북송이 막을 내리고 남송 시대가 열린다. 한편 금 태종은
휘종에게 ‘정신이 혼미한 바보같은 왕’이라는 의미로 ‘혼덕공(昏德公)’ 그
아들 흠종에겐 ‘중혼후(重昏侯)’란 호칭을 하사 치욕을 안긴다
묘청 : 단재 신채호에 의해 ‘천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사건’으로 평가받은 묘
청의 난.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극과극으로 엇갈린다. 그는
과연 풍수지리에 함몰되어 혹세무민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요승일 뿐인가.
아니면 또다른 북벌영웅인가
김부식 : 고려 중기의 문신. 묘청의 난을 진압한 개경파의 대표로, 바로 그가 지은
역사책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현존 최고(最古)의 사서(史書) 삼국사기다.
정지상 : 고려 중기의 빼어난 시인. 이자겸의 난에 가담한 죄를 물어 척준경 탄핵
을 주도한다. 하지만 묘청의 난때는 서경파로 묘청의 편에 서게된다. 고려
사에선 그가 시문(詩文)에 있어 김부식과 라이벌 관계였다고 평하고 있다.
4. 줄거리
1회-10회 (문종 승하 - 선종 승하)
서기 1083년(문종 37년) 7월. 후세의 사학자들로부터 고려판 세종(世宗)이란 평을
받을 정도로 고려조의 태평성대와 문치부흥의 시대를 열었던 11대 임금 문종이 승
하한다. (문종 : 1019-83년, 재위 1046-83년). 한편 병약한 태자가 상주(喪主)가
되어 장례를 치르는 날. 부왕을 잃은 슬픔속에서도 이를 바라보는 국원공 운(13대 선종)과 계림공 희(15대 숙종)의 마음속 계산은 이미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확고한 적장자 승계원칙을 세웠던 조선왕조와는 달리 이에 앞선 고려왕조는 형제
간에 왕위를 물려받은 일이 몇차례 있었고, 고려태조 왕건도 훈요십조에서 ‘맏이가
어질지 못하거든 다른 이에게 왕위를 주라‘고 하여 적장자 승계원칙을 세운것은
아니었다. 실제 고려는 이미 초창기에 2대 혜종,3대 정종,4대 광종이 형제간에 왕
위를 물려받은 사례가 있었고, 국원공,계림공등의 부왕 문종 역시 형님인 9대 덕
종,10대 정종(靖宗)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조에 부
왕의 승계때 다른 왕자들이 혹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는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까지 한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병약
했던 문종의 장남 12대 순종(順宗)은 결국 석달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해에
문종에 이어 그 장남 순종까지 두 번이나 국상을 치러야 했던 고려왕실. 하지만
국원공과 계림공의 희비는 엇갈리고 만다. 순종의 장례를 치른 조정의 중론은 이
미 문종의 차남인 국원공이 형님의 뒤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
지고 있었다. 소태보,최사추등 유학자 출신들은 친(親) 불교적인 국원공보다는 자
신들에게 제자이기도 한 계림공이 왕위에 올라 유학이 번성하는 나라를 세우길 내
심 바라고 있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황. 아쉬움에 소태보,최사추등은 계림공을
찾지만 계림공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새로 즉위하신 폐하께 충성을 다하라”고 충
고 돌려보낸다.
한편 이 무렵 황해도 곡주. (지금의 황해도 곡산) 16세의 척준경은 글공부를 하
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동네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고을 하급관리이기도 한 척준경의 부친 척위공은 아들이 글공부를 하여 과거
를 보고 벼슬길에 오르길 바랬으나, 준경은 가난한 집안에 어디 과거시험을 볼 여
력이나 있느냐며 싫다고 했다. 하긴 그와같은 준경에 말에 위공은 딱히 할말이 없
었다. 집안이 빈한해 어디 좋은 선생을 모실수도 없는 처지고, 게다가 하급관리인
척위공 역시 기껏 유학의 경전이나 겨우 더듬거리며 읽는 수준이라 아들들 글공부
를 가르칠수 있는 실력은 되지 못했다. 결국 척위공은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허송
세월하는 아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볼 뿐 더는 어쩌지를 못 하고.
한편 선종의 비 사숙왕후는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왕실 내부의 조정작업부터 들
어간다. 사숙왕후는 남편에게 계림공,낙랑후 등 다른 왕제(王弟)들을 각기 지방의
임지로 보낼것을 건의한다. 적장자 승계원칙이 분명치 않은 고려왕실에선 자칫 다
른 왕제들이 보위를 노릴 위험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어릴때부터 총명했고,
무엇보다 남편 선종이 국원공 시절부터 늘상 곁에서 훌륭한 조언자이자 내조자 역
할을 해주었던 사숙왕후는 계림공등의 야심을 오래전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다. 선
종은 왕후의 뜻을 받아들여 계림공,낙랑후등을 모두 지방으로 내려보내려 하는데.
하지만 계림공은 그와같은 선종과 사숙왕후의 조치에 내심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사숙왕후는 계림공이란 작위에 알맞게 계림 즉 지금의 경주로 내려갈것을 권했
으나 실은 계림공의 관심은 북방에 있었던 것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정신을 승계
한 나라. 따라서 마땅히 그 정신을 이어받는 길은 북방의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고
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계림공. 거기에 또 하나 선진
문물인 유학이 성하는 나라를 만들기를 바라는것이 계림공의 꿈이었던 것이다.
결국 계림공은 사숙왕후와 처음으로 작은 갈등을 빚은 끝에 자신의 뜻대로 경주
가 아닌 황해도 지역을 맡아 올라가게 된다. 한편 이 무렴 사숙왕후는 회임을 하
니, 고려 14대 임금이자 열한살 나이에 왕위를 숙부에게 빼앗기고 비운의 죽음을
맞는 14대 헌종은 그로부터 열달후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무렵 곡주땅엔 작은 경사가 하나 벌어진다. 이 지역 세력가인 황씨 가문
과 명문 파평윤씨 가문의 혼례가 치러지는 것이다. 소문은 척준경의 귀에도 들어
오고 척준경에게 소식을 전해준 동료 무뢰배는 혼례날 함께 신부 행렬을 덮치자고
제의한다. 고려의 혼인 풍습에 따라 혼례는 신랑인 파평윤씨 가문에서 신부인 황
씨 가문에 가서 치러지게 된다. 그러나 척준경 일당이 덮치려 하는 것은 혼례준비
를 하는 황씨 가문의 딸인 것이다. 결혼식날 아침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돌아오는
황씨 가문의 딸 일행을 덮치려는 척준경 일당. 하지만 아씨를 모시는 황씨 가문의
여성 호위무사 보영등에게 혼쭐이 나고만다. 요즘으로 치면 양아치 남고생 7-8명
정도와 여대생 검도선수 열댓명 정도의 대결이 되었던 셈이다. 게다가 척준경은
호위무사의 우두머리격인 보영에게 뺨까지 얻어맞는 수모를 당하고 만다. 이만 덮
어둘터이니 돌아가라는 보영의 호령에 척준경 일당은 돌아가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혼례준비를 위해 모여있는 양가의 어른들은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를 직감한다. 아씨와 보영등은 좋은날이니 아침에 있었던 일은 이 정도로 덮으려
는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집안 어른들의 추궁에 결
국 다른 호위무사들의 증언으로 척준경 일당의 행패사실이 알려지고 만다. 특히
격분한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공신 윤신달의 후예인 명문 파평윤씨 집안의 어른들
이었다. 마침내 척준경 일당이 붙잡혀 들어오고 제발 아들만은 살려달라는 아버지
척위공의 눈물겨운 애원에도 불구하고 척준경 일당은 일단 뒷채에 갇혀 다음날 관
아로 넘겨지게 되어 있었다.
한편 파평윤씨 가문의 서른살 청년 윤관은 이날 무뢰배의 우두머리인 척준경을
눈여겨 보게된다. 비록 혼례식날 신부의 행렬을 덮친 무뢰한 무리들이지만 윤관은
척준경의 강렬한 눈빛에서 웬지 범상찮은 느낌을 받게 된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
벼슬을 하고 있는 윤관은 지금은 계림공을 그의 임지에서 모시고 있다. 한편 윤관
은 자신과 엇비슷한 연배인 계림공과는 은근히 통하는 면이 있다. 윤관 역시 계림
공처럼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길이라 평소
생각해오고 있었고, 특히 여진족 부락도 틈틈이 방문 그곳 추장 핵리발과 친분을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윤관은 밤에 뒷채에 갇혀있는 무뢰배의 무리중 우두머리인 척준경을 몰래 빼내
온다. 그리고는 대뜸 칼을 겨눈다. “네놈들이 오늘 파평윤문의 경사스러운 혼례
날을 망치려 했으니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내 칼에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
으렸다.” 호통을 치는 윤관. 이제 정말 꼼짝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척준경
은 무릎꿇고 살려달라 애원한다. 하지만 윤관은 칼을 거두고 척준경을 다른 조용
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는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네가 무예를 아느냐 ?”
여태까지 척준경은 그저그런 고을 무뢰배에 불과했지만, 실은 간간이 물어물어
아는 동네의 무장들 밑에서 무예를 배워본 사실이 있다. 애초부터 공부에 흥미가
없고, 대신 힘이 장사였던 척준경은 무(武)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저 조금...’ 기
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척준경에게 윤관은 간단히 그의 실력이 어느정도
되는지 시험을 해본다. 그리고는 척준경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무예는 마땅히 정
도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것이다. 네 만약 나를 따르겠다 약조한다면 내 무예는 물
론 전술도 네게 전수해주고 네 동료들도 용서해주도록 선처를 부탁드려 보겠다. ”
죽는줄만 알았던 척준경은 살려준다는 말에 감읍해서 그리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척준경은 윤관의 사람이 되는데.
한편 선종(宣宗)은 즉위 초기엔 대체로 친 불교적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 원년(10
84년)에는 승과가 설치되고, 이듬해엔 문종의 4남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로 유학
을 떠나 그 1년후 불경 3천권을 싣고 귀국한다. 6년(1089년)에는 모후 인예태후(
문종 비)의 청에 의해 천태종의 본산인 국청사가 건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무렵 궁궐에는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바로 이미 승하한 12대
순종(順宗)의 후비였던, 장경궁주 이씨가 궁노와 간통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인주이씨 가문 사람으로 선왕의 후비가 되었던 장경궁주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위
인 병약한 남편 때문에 남편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 하고 대체로 쓸쓸한 나날
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남편마저 왕위에 오른지 석달만에 승하하고 말았으
니, 장경궁주의 입장으로선 인생이 이토록 적막강산이요 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던 차에 그나마 외궁에서 자신을 모시는 궁노가 그녀에게 유일한 벗이요 말상대
였다가 그만 부적절한 관계로까지 이어져버린 것이다. 이 일로 장경궁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그 여파로 장경궁주의 동생 이자겸까지 면직된다. 장래가 유망한 청년
이자겸으로선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누이의 일이야 잘못이긴 하지만, 그것이 자
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자신까지 벼슬에서 내쫓는단 말인가. 이 일로 이자겸은 고
려왕실에 처음으로 앙심을 품게되고. 한편 이 무렵 인주이씨 가문은 선종(宣宗)에
새로운 후비를 맞아들일것을 권하니 그가 곧 한산후 왕윤을 낳게되는 원신궁주 이
씨(이자의의 여동생)다. 인주이씨 가문이 자신들의 권세를 이어갈려고 추진한 혼사
이긴 했으나, 선종은 원신궁주에게서 이성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된다. 사
실 자신에게 더할나위 없는 정치적 동반자이나 내조자인 사숙왕후 이씨이긴 했으
나, 연상의 그녀는 선종에게 이성으로 대하기엔 어딘가 벅차고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미 원년(1084년)에 원자가 태어나기도 했으나, 선종은
이 무렵 지나치게 총명해 어떨땐 자신이 아닌 사숙왕후가 국정을 이끌어 가는듯
한 느낌마저 들어 다소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이 무렵부터 선종은 차츰
사숙왕후를 멀리하고 대신 자신보다 열 살어린 원신궁주의 처소를 자주 찾게 된
다. 한산후 왕윤을 비롯한 선종과 원신 궁주 사이의 아들 셋은 그렇게 연달아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무렵 척준경은 윤관을 모시며 무예를 배워가고 있었고, 한편으론 윤관
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오연총 그리고 그 둘이 모시는 계림공에게까지 인연이
닿게 된다. 그리고 계림공의 배려로 부(府)의 사환으로 일하게 되는데. 하루는 일
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보영과 마주친다. 수년전 윤관과 황씨 가문 혼례일을
망쳐놓으려 했다가, 그때 호위무사인 보영에게 따귀까지 맞게 된 척준경. 그후에
도 척준경은 보영과 우연히 마주칠일이 몇 번 있었으나 척준경은 가급적 그를 피
해다녔다. 헌데 이날따라 보영이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척준경을 불러세운다.
“소문은 들었다. 네 요즘 계림공을 모시고 있다며 ?” 애써 보영을 피해보려는 척
준경을 막아서며.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되고. 몇 년전만 해도 그
저 동네 무뢰배에 불과했던 척준경이지만, 지금은 미관말직의 벼슬살이라도 하며
조금씩 철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 보영도 척준경에게 조금씩 호
감을 느끼게 된 것 같은데.
그러다 하루는 보영이 척준경한테 활쏘기 시합을 제안한다. 윤관과 오연총 밑에
서 무예를 배우며 척준경은 특히 검술실력이 나날이 늘어갔으나 활쏘기만은 영 자
신이 없었다. 그래서 번번이 시합에서 보영에게 패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분
심(忿心)이 난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한테 매번 진다는게 사나이로서 자존심 상하
는 일 아닌가.
척준경과 보영의 활쏘기 대결이 횟수가 거듭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이제 더 이
상 시합이 아닌 연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간다. 그렇게 차츰 두
사람의 사랑이 싹터가고...하루는 척준경이 나무를 하고 산을 내려오다 시냇물에서
목욕을 하는 보영의 모습을 훔쳐보게 된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넘어져 엿보고 있
었음이 보영에게 들키게 되고. 보영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제법 호탕하게 웃으며
준경을 부른다. “준경아 ! 이 누이의 벗은몸이 그리 보고 싶었느냐 ?”, “아...아닙
니다 누님.”, “들어오너라. 기왕 이렇게 된거 같이 목욕이나 하자꾸나.” 그렇게 보
영이 끌어들여 두 사람은 같이 목욕을 즐기게 되고...(*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
려인의 목욕풍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모여 남녀
구별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것을 괴상하게 여
기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이 싹터가는 척준경과 보영. 결국 머지않아 혼례를 치
르게 된다.
선종 9년(1092년). 계림공은 선종을 따라 서경에 갔다가 문득 자색 구름이 장막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본다. 이때 한 기인(술사 김위제)이 나타나 계림공에게 ‘왕이
될 징조‘라 말하고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천도하면 나라가 흥할것이라는 등 횡설
수설한다. 계림공은 정신나간 사람이라며 쫓아보내나, 내심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불안해한다.
북방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며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있는 계림공
이었으나, 상황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사숙왕후는 선종이 자신을 멀리
하고 원신궁주를 자주 찾는것이 내심 서운하긴 했지만, 이는 묵인한 채 대신 자신
이 낳은 왕자 왕욱을 - 아직 태자로 책봉되진 못 했음 - 후계자로 세우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한편 이 무렵 병이 든 선종은 마치 자신의 생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예견한듯한 이상한 시를 짓는다. “약효야 있건 없건 무슨 소용이랴 / 시
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 오직 원하는건 선행을 쌓아 청정(淸淨)한 극락세계(*
원문에는 ‘예범(禮梵)’으로 되어있다)로 가는 것.”
11회-20회 (헌종 - 숙종 즉위까지)
서기 1094년(선종 11년). 고려 13대 임금 선종이 재위 11년만에 승하한다. 한편
사숙왕후는 선종의 유언을 받들어 자신의 아들인 11살난 아들 왕욱을 왕위에 올
리니 그가 곧 14대 헌종이다. 한편 사숙왕후는 태후가 되고, 중화전(中和展)을 짓
고 영녕부(永寧府)를 설치. 아직 나이가 어린데다가 조갈증까지 있는 아들을 대신
하여 국정을 총괄한다. (조선시대 수렴청정과는 달리 고려사에 분명히 국정을 총괄
했다는 의미의 표현이 나온다 : ‘범 군국대소사 함취결(凡 軍國大小事 咸取決)’ )
이미 선종의 재위 11년동안 남편을 곁에서 보좌하며 국정경험을 충실히 쌓아갔
던 사숙태후는 조정의 실권을 잡은뒤 한동안 어렵지 않게 국정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사숙태후의 정책은 대개 남편 선종시절의 불교,유교 화합정책과 균형외교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계림공을 따르는 소태보,최사추등의 원로
중신들은 아쉬움에 그를 찾는다.
형님 선종이 건재하게 살아있는 10년동안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몸을 낮추었
던 계림공. 하지만 이제 형님은 계시지 않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있고, 여자인 형
수가 국정을 총괄하는 상황. 그동안 북방을 돌며 거란,여진등의 정세를 예의주시
해 온 계림공은 이제 노골적으로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다. “고려의 개국 정신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오. 아울러 나는 충효(忠孝)와 인의(仁義)의
유교사상으로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을 것이오. ” 자신이 왕이 된 뒤의 국가비전
까지 몸소 천명한 계림공 앞에서 소태보,최사추등은 감격에 몸을 떨며 큰 절을 올
린다. 특히 이들과 함께 있던 윤관과 오연총은 고토회복이란 말에 김격의 눈물까
지 흘린다.
한편 이 무렵 척준경은 추밀원 별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내 보영(황씨 부인)
과의 사이에선 1녀1남을 낳았다. 그리고 꾸준히 윤관,오연총과 교류하며 계림공을
모시고 있다.
한편 이즈음에 계림공 세력처럼 또다른 심상찮은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이
들이 있다. 바로 문종의 장인이었던 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면서 선왕 선종의 후
비 원신궁주의 오라버니가 되는 이자의(李資義)다. 이미 이자의에겐 적잖은 사람
들이 줄을 서고 있었고, 외척인 그에겐 수많은 재물이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 이
자의는 왕이 어리고 병약한데다 여인이 실권을 잡았다는 점을 트집잡아 본격적으
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바로 원신궁주와 의기투합 그녀의 소생 한산후 왕윤
을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인 것이다.
한편 이자의 세력의 음모는 사숙태후에게도 포착된다. 사숙태후는 일시적으로 시
숙인 계림공에게 도움을 청해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한편 이때 이자의의 집엔
그에게 줄을 서려는 조정중신들 말고도 집안을 기웃거리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자의에겐 사촌동생 뻘이 되며 선왕때 궁노와 간통한 사건으로 궐에서 쫓겨
난 장경궁주의 동생 이자겸이다. 누이의 일로 졸지에 자신까지 벼슬자리를 잃게
된 이자겸은 스무살 연상의 사촌형 이자의에게라도 줄을 대 다시 벼슬자리에 나아
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자의는 아무래도 장경궁주 사건이 여전히 마음에 걸
렸는지 이자겸을 외면한다. 하는수없이 이자겸은 이번엔 이자의이 형 이자인을 찾
아가 자신의 어린 동생 이자량(李資諒)을 이자의의 딸과 결혼시켜 사촌간이면서도
사돈간이 된다. (* 고려사 열전 및 인천이씨 족보 참조)
이자의는 왕이 어리고 병약하여 그 혼란한 틈을 타 옥새를 노리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명분으로 사병을 일으켜 궁궐을 습격하려 한다. 하지만 이 정보가 먼저
계림공에게 흘러들어간다. 계림공은 긴급히 평장사 소태보를 불러 궁궐을 호위하
라 하고 소태보는 상장군 왕국모와 함께 군사를 인솔 궁으로 들어간다. 왕국모의
부장 고의화가 선정문 안에서 이자의를 죽이고, 그의 나머지 도당도 선정문 밖에
서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이자의의 난은 친위 쿠데타격인 계림공의 거병에 선수
를 빼앗겨 이자의의 세력은 모두 몰살을 당한다.
계림공은 중신들의 추대로 중서령에 오르고 조정의 실권을 잡는다. 그리고 대대
적인 인사개편을 단행 소태보,최사추,임개등 자신의 측근들을 모두 전진 배치한다.
사숙태후로선 늑대를 몰아내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조
정의 민심이 이미 계림공에게 기울고 있었다.
소태보와 최사추는 계림공을 찾아와 이제 본격적으로 왕위에 오르실 것을 권한
다. 하지만 계림공은 보다 확실한 명분을 잡을 필요가 있다며 일단 민심을 자신에
게 돌릴 방안을 모색해보라 명한다. 한편 이 무렵 이자의의 남은 잔당들은 완전히
척결되고 원신궁주와 그 아들 한산후등 3형제는 유폐신세가 된다. 한편 백성들 사
이에선 ‘선왕(선종)에게 이미 장성한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는데도 무리하게 어린아
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이번 일(이자의의 난)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다. 사숙태후는 계림공을 불러 소문의 진원지를 따지고 계림공은 시치미를 뗀다.
한편 사숙태후와 계림공 사이에선 또 다른 갈등이 불거지는데 계림공의 측근들이
병권을 계림공에게 건네줄것을 사숙태후에게 간하는 것이다. 사숙태후는 다른 것
은 몰라도 병권은 안 된다는 판단하에 강경하게 맞서지만 이미 조정엔 사숙태후의
사람이 없었다. 특히 이 일엔 소태보,왕국모 같은 나이많은 장수들은 물론 윤관,오
연총과 같은 젊은 장수들도 가세한다. 사숙태후는 송나라를 비롯 거란,여진,왜
와 고루 친교를 쌓자는 것이 선왕의 뜻이었다며 자신은 그 뜻을 이어받아 정책
을 펴나가고 있을뿐이라며 병권과 외교권만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수 없
다며 끝까지 맞서지만 조정의 여론은 이미 계림공에게 기울어 있어 연약한 여자
혼자 몸으로는 도저히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한편 이때쯤 왕
실엔 또 하나 심상찮은 움직임이 있기 시작하는데 계림공의 이복동생이 되는 부
여후 수(문종의 세 번째 비 인경현비 이씨 소생) 에게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
이다.
계림공이 어린 임금대신 실권을 잡는 모습을 보며 부여후 또한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일까. 하지만 그에대한 확증은 없다. 한편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소태
보,최사추등은 화근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원신궁주와 한산후 3형제를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고 간한다. 이미 유폐상태인 원신궁주 모자들. 하지만 사숙태후는 사
사로이는 사촌동생이며 같은 경원이씨 가문 사람이기도 한 원신궁주와 그 어린
아들들까진 차마 죽일수 없었고, 다만 유폐상태로 철저히 감시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림공과 그 지지세력은 이제 노골적으로 원신궁주와 한산후 3형제를 사
사(賜死)할 것을 요청한다. 한편 원신궁주는 자신의 어린 아들들까지 데리고 사
숙태후와의 면담을 요청 그녀의 발앞에 무릎까지 꿇고 자신은 상관없으니 어린
아이들만이라도 살려달라 피눈물을 흘리며 애원한다. 여인의 측은지심으로 차마
어린아이들까지 죽일수는 없었던 사숙태후. 알겠노라며 원신궁주를 돌려보내긴
하지만 사숙태후는 이미 힘에 부쳐있었다.
사숙태후. 그녀에게 다른 마음은 없었다. 다만 선왕(선종)의 즉위기간 10년 왕
후이자 아내로서 남편을 도와 국정을 보좌하면서 남편이 이루고자 했던 상생과
화합의 정치. 그리고 균형외교 그 뜻을 이어가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조
정의 모든 실권은 계림공에게 넘어가 있었고,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일시적
으로나마 자신이 국정을 총괄하며 여왕(女王) 행세를 했던 사숙태후는 이제 어느
새 한낱 힘없는 아녀자의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고민 끝에 사숙태후는 결국 어
린 아들을 설득 계림공에게 양위할 결단을 내리도록 하고, 계림공은 형식적인 두
번 사양의 과정을 거쳐 보위에 오르니 그가 곧 고려 15대 임금 숙종이다.
21회 - 50회 (숙종조)
서기 1095년 10월. 마침내 고려 제15대 임금 숙종이 즉위한다. 왕위에 오른 숙
종은 원신궁주 이씨와 그 아들 한산후 왕윤등 3형제를 경원으로 귀양보낸뒤, 사
약을 내린다. 폐위된 헌종과 사숙태후 모자도 유폐신세가 된다. 한편 숙종은 고려
를 유학의 나라로 바로 세울것을 천명하고 그 첫 번째 조치로 근친간의 결혼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좌사낭중 윤관을 형부시랑 임의와 함께 요나라로 보내 새 황
제의 즉위사실을 알린다.
하지만 요나라에 도착했을때 요나라 8대 황제 도종은 윤관을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본다. 나이어린 황제가 갑자기 이유없이 물러나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
다는 것은 고려에 뭔가 변고가 있었을 것이란걸 짐작케 한다. 도종은 이미
선종때도 요나라를 방문한 사신 이자인에게 전 임금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새로운 임금이 죽었다는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며 고려에 어떤
변고가 있었던것이 아니냐며 차갑게 추궁한 바가 있었다. 그때의 일은 이자인
의 적극적인 설명과 해명으로 수습할 수 있었으나, 이번만은 사정이 달랐다. 윤
관은 선왕 헌종이 병치레가 잦고 몸이 약했으며, 게다가 간신들의 발호(이자의
의 난)까지 있어 부득이하게 신왕에게 양위한 것 뿐이라고 설명하지만 도종은
믿지 않았다. 다행히 도종이 사신들에게 위해나 핍박같은 것은 가하지 않았으
나 윤관은 아무래도 앞으로 거란과 고려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것 같다는 예
감에 심란하기만 하다.
윤관은 귀국길에 잠시 여진마을에 들른다. 윤관은 이미 선왕때부터 오연총,척
준경등과 종종 여진부락을 방문 그곳 추장과 친분을 쌓은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진 분위기는 과거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3년전 세상을 떠
난 여진 완옌부 추장 핵리발 시절때 까지만 해도 여진은 윤관등 고려장수들을
환대했었다. 그러나 핵리발이 죽고 그 동생 영가가 추장이 된 지금은 윤관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뭔가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낄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다.
핵리발의 두 아들 아골타와 오야속은 “우리가 언제까지 고려와 요나라의 눈치
만 보며 살아야하느냐 ? 우리도 이제 나라다운 나라를 한번 세워보자“며 숙부
인 추장 영가를 부추기기까지 한다. 윤관은 그런 아골타와 오야속 형제를 심상
찮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골타가 윤관에게 더더욱 범상찮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스스로 “신
라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당당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너희 고려가 우리 신
라를 멸했지만, 나는 우리 선조 마의태자의 뜻을 이어받아 반드시 그 울분을 씻
을것”이라고 까지 말하는 아골타. 윤관도 여진족 추장중에 그 조상이 고려에서
도망간 사람이 있다는 소문 정도는 들었다. 하지만 김행지니 금준이니 하는 이름
석자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그런 사람이 고려에서 도망을 가 여진 추장이 되
었는지까진 모르겠으나, 게다가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니.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
아들일순 없었다. 사실 아골타의 부친 핵리발까지만 해도 자신의 조상이 고려인
이란 말은 했어도 마의태자까지 들먹이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골타가 마의
태자를 들먹이는 저의는 과연 무엇일까.
영가는 고려로 귀국하는 윤관일행을 환송하지만 아골타와 오야속은 그와같은
윤관일행을 심상찮은 눈빛으로 쏘아본다. 거란에서의 마찰, 그리고 여진족의 심
상찮은 분위기 그런것들을 느끼며 윤관은 고려로 돌아온다.
한편 왕위에 오른 숙종은 앞으로는 가급적 적장자 계승 원칙을 분명히 하고 싶
었다. 하지만 이를 천명하기엔 숙종에게 정치적 명분이 약했다. 이미 숙종 자신
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처지며, 게다가 부왕(父王) 문종의 장남
도 아니었다. 더욱이 왕건 역시 장남이 어질지 못하면 다른 아들에게라도 왕위
를 물려주라고 해 적장자 계승 원칙을 세운것은 아니라, 숙종입장에선 이래저래
공개적으로 적장자 계승 원칙을 천명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숙종
역시 아들들중 장남 왕우(훗날의 예종) 보다는 차남 왕필을 더 총애하고 있어 이
미 숙종3년 (1098년) ‘개부 의동삼사 검교태보 수태위’ 및 상서령 관직을 하사한
바 있다.
하지만 얼마안가 왕필이 어린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헌데 이와 관련 이상
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왕필의 죽음에 숙종의 이복동생인 부여후(왕수) 세력
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란 소문이다. 이미 고려에는 형제간에 왕위를 물려받은 사
례가 여러차례 있고, 숙종 역시 선왕 순종(12대),선종(13대)의 동생. 따라서 숙종
다음에도 그의 다른 동생들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이
때 숙종의 동생들중 부여후의 근처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던것이다.
숙종은 결국 부여후를 귀양보낸다. 부여후 세력이 왕필의 죽음에 개입되었을 것
이란 확증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떠돈다는것 자체가 어쩌면 동생을 더 위
험에 빠트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차라리 적당히 죄를 내려 귀양을 보내
는것이 오히려 동생으로 하여금 더 이상 다른 정치적 구설에 휘말려들게 하지 않
는 방편일수도 있다. 그것이 숙종의 판단이었다. 숙종은 부여후에게 귀양조치를 내
린뒤 유교와 불교 경전을 보내 그를 위로한다.
한편 이무렵 고려 황궁에는 숙종과의 독대를 청하는 기인이 하나 있었다. 숙
종이 그를 들게하니 바로 수년전 그가 계림공 시절 서경에 행차했을때, 그에게
왕기가 서렸다며, 남경으로 천도하면 나라가 흥할것이라 예언한 술사 김위제다.
그는 도선비기의 예언을 다시 거론하며 남경천도를 건의한다. 숙종은 유학자로
점술이나 풍수지리 같은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새로 왕위에 올라 나라
분위기도 바꿀겸 남경천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최사추등 측근들도 남경
천도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자 숙종은 남경천도를 준비할것을 명한다. 한편
집권초기 숙종은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은병을 주조하는등 경제개혁에도 박차를
가한다.
한편 이자의 세력이 척결되고, 게다가 역시 같은 경원이씨 사람이었던 사숙태후
까지 폐위된 뒤, 경원이씨 가문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장인이자 숙종의 최측근인 최사추를 통해서라도 다시 벼슬길에 나가보려 하지만
최사추 역시 비록 사위라도 이자겸의 사람됨만은 탐탁치않게 여겨 이자겸의 뜻
은 이루어지지 못 했다. 한편 척준경은 이때 일이 있어 최사추의 집에 들렀다가
최사추의 집을 드나드는 이자겸과 첫 만남을 갖게된다.
동북아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완옌부 추장 영가가 세상을 떠나고, 그 조카
이자 핵리발의 장남 오야속이 새 추장이 된다. 오야속은 흩어져있는 여진부락을
규합하고, 복종하지 않는 부락은 무력으로 진압하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간다. 한편
요나라를 돕는척 하면서 역으로 모반을 꾀하는등 오야속의 시대에 이르러서 여진
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속히 팽창해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파는 고려
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기 1104년 (숙종 9년). 동여진인 1,753명이 고려에 의탁한다. 이전에도 여진족
의 귀순은 종종 있어왔으나 이와같은 대규모 귀순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들은 대개 오야속이 세력을 넓혀나가자 그를 피해, 또는 그에게 복종하기 싫어
고려로 넘어온 사람들이다. 오야속의 갑작스러운 세력팽창은 이미 고려도 알고 있
었다. 따라서 이 일이 앞으로의 여진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고려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2월. 마침내 여진족이 고려를 침입한다. 고려는 평장사 임간을 보내 정주에서 맞
서 싸우게 했으나 패하고 만다. 한편 임간의 연전연패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급히
윤관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을 싸움터로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윤관은 척준경의
간곡한 부탁과 용기를 가상히 여겨 숙종에게 진언 그를 정주에 보낸다. 척준경은
임간이 이끌던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진에 들어가 장수 한 사람을 베고, 사로잡힌
두 사람을 빼앗는다. 그리고 교위 덕민,준린이 적장을 쏘아죽이니 적이 퇴각한다.
고려가 군사를 되돌리자 여진은 다시 1백명의 기병으로 추격한다. 척준경은 대장
인점과 함께 적장 두 사람을 쏘아죽이고,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해 아군
이 입성할수 있었다. 척준경은 이 전투의 공으로 ‘천우위록사 참군사’가 된다. 젊
은시절 한낱 무뢰배에 불과했던 척준경을 등용 장수로 만든 윤관은 그를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한편 고려조정은 윤관을 ‘동북면 행영병마 도통’으로 삼고 중
광전에 거동하여 부월을 하사한다. 윤관이 여진족과 싸우나 패하고 만다.
여진과의 싸움에서 패한 윤관은 그해(1104년) 12월. 별무반 설치를 건의한다.
문,무,산관,이서로부터 장사하는 사람,종 및 주,부,군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을 가
진자를 신기(神騎)로 삼고, 말 없는자중 나이 20이상의 남자로 과거응시자가 아닌
사람들을 신보(神步)로 삼는다. 그리고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을 결성하니 이것
이 신기군,신보군,항마군으로 이루어진 별기군인 것이다.
하지만 별무반 설치는 단순히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윤
관은 이때 마침내 숙종 앞에서 자신의 꿈이었던 북벌의 비전을 밝힌다. 그와 숙종
의 꿈은 여진과 거란을 고려의 밑에 복속시키고 고구려가 지배했던 드넓은 만주벌
판을 되찾는 북벌의 꿈이었던 것이다. 별무반 조직은 그렇게 북으로 가기위한 첫
시발점인 것이다. 이날을 위해 기다려온것이 어느덧 20년 세월. 고려를 더 이상
오랑캐에게 굴하지 않는, 여진과 거란을 고려의 발밑에 거느리는 대 제국의 건설.
그것이 진정한 두 사람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서로의 꿈이었던 북벌의 이상이 맞
아떨어지는 순간 윤관과 숙종은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감격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떤다.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북벌의 꿈을 펼치기도 전에 숙종의 최후는 다가오고
있었다.
서기 1105년(숙종 10년). 숙종은 윤관,오연총,척준경등 무장들 그리고 수많은 문
신들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서경으로 행차한다. 한편 이에 앞서 나이 70의 최사
추가 벼슬길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숙종은 거절하고 궤장을 하사한
다. 따라서 최사추 역시 숙종의 서경행에 함께하고 있었다.
숙종은 동명성제의 제단에 제를 올리고, 북녘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다. 한편
으로는 군사들의 조련을 점검하고 활쏘기를 사열하며 태자가 과녁을 맞히는 모습
을 치하하기도 한다. 허나 무리한 서경행차로 과로했던 것일까. 숙종은 그만 자리
에 몸져눕고 만다. 10월 병인일 밤. 금교역을 떠나 장평문 밖에 이르렀을때 즈음
숙종은 그만 수레안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숙종의 안타깝고 갑작스러운 죽음앞에
문무백관들은 대성통곡한다.
51회 - 70회 (예종조)
숙종은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북벌의지는 아들 예종대로 이어진다.
서기 1107년(예종 2년) 윤 10월. 고려는 마침내 윤관에게 명하여 17만 대군을
일으켜 대대적인 여진정벌에 나선다. 예종은 윤관을 비밀리에 불러 숙종이 남긴
밀지(密旨)를 전해주며, 선왕의 밀지를 받은 윤관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성고
의 유지가 깊고 간절함이 이와 같은데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연총,
척준경등의 부장들을 이끌고 마침내 출병한다.
여진정벌은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윤관을 비롯한 오연총,척준경,왕자지(王字之)
등은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윤관은 여진을 정벌한 지역에 9성을 쌓고. 한편 그
옛날 파평윤씨 가문의 혼례를 방해한 죄로 윤관에게 죽임을 당할뻔한 척준경은
이번엔 전투에서 윤관의 목숨을 구해주는 공을 쌓는다. 윤관의 명을 받드는 날
척준경이 윤관에게 이와같이 말했다. “지난날 종사로 있을때에 죄를 범했는데,
공이 나를 장사라고 여겨 조정에 청해서 용서받게 하였으니 오늘이야말로 척준
경이 목숨을 버려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그런 척준경의 손을 부여잡고 윤관이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이제부터 내 너를 마땅히 아들과 같이 보고, 너는 마땅히
나를 아버지같이 보라. ” 여진정벌의 공으로 척준경은 합문지후에 봉해진다.
한편 이 무렵 예종은 이자겸의 딸을 두 번째 비로 맞아들인다. 이자의의 난 이후
몰락할 위기에 직면했던 경원이씨 가문은 이로인해 부흥의 기회를 잡게된다. 이자
겸은 숙종조 10년간 대체로 쇠락해졌던 경원이씨 가문을 일으키는데 전력을 쏟는
다.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는데.
한편 윤관의 여진정벌로 인해 자신들의 근거지를 잃어버린 여진족은 충격적인 치
명타를 입었다. 고려와 거란사이에 끼어 고생하는 유목민족의 한계를 벗어나 이들
과 맞설만한 새로운 대 제국을 건설하고 말겠노란 아골타와 오야속 형제의 야망.
그 야망이 송두리째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것이다. 결국 여진족은 기를쓰고 윤
관의 9성을 탈환하고자 끊임없이 괴롭혀온다.
결국 고려에 있어서 9성은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9성을 유지하자니 여진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그렇다고 윤관,오연총,척준경등 당
대의 명장들이 목숨을 내놓다시피 하여 쌓은 9성을 포기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예종을 더 갈등하게 만드는 것은 선왕의 유지였다. 여진,거란이 차
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반드시 회복하고 말겠노란 선왕 숙종의 의지. 헌데 그 뜻
을 아들인 자신의 대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문
신들은 들끓고 있다. 9성을 돌려주고 여진과 화친하며, 이러한 분란의 원인제공자
인 윤관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조정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예종은 9성반환과
여진과의 화친까진 어쩔수 없는 것이라하나 어찌 나라에 공을 세운 윤관에게 죄를
줄 수 있겠느냐며 끝까지 버틴다.
한편 조정에서 윤관의 죄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눈이 거꾸로
뒤집힐 지경이었다. 어린시절 한낱 동네 무뢰배에 불과했던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고 장수로 삼아준, 그래서 평생을 스승이자 형님,아버지처럼 모셨던 장수 윤관.
헌데 그 윤관을 탄핵하고 죄를 물으려 한다니. 세상에 이런 몹쓸놈의 나라가 어디
있단말인가. 다혈질의 척준경은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대궐에 쳐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오연총은 물론 현명한 척준경의 아내 보영까지도 그일만은 극구 만류 겨우
척준경의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윤관은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고 머지않아 병을 얻는다. 척준경이 윤관을 문병하
러 갔을때 윤관은 자신의 몸보다 오히려 척준경의 앞날을 걱정한다. “자네는 무예
는 출중하나 지혜가 부족하고 무엇보다 성정이 너무 다혈질인게 문제일세. 자네도
이제 조정에 공을 얻어 높은 벼슬까지 얻었으나, 이제부터가 더더욱 몸가짐을 바
로하고 조심해야 할 것일세. 특히 정치에는 지나치게 관여하지 말게나. 자네같은
용맹하기만 한 무장이 공연히 정치싸움에 휘말려든다면 훗날 반드시 큰 화를 당
하고야 말걸세. ” 훗날에 있을 척준경의 불행한 최후를 예견이라도 하고 있음인
가. 방안에 도는 무거운 정적은 어떤 미묘한 의미심장함마저 들게한다. 오연총 역
시 평소 척준경의 지나치게 다혈질인 성격, 그리고 지혜가 부족함을 늘 걱정하고
있었다.
서기 1111년(예종 6년). 마침내 여진정벌의 영웅이자 불세출의 명장 윤관은 파
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한편 윤관의 문상을 온 척준경은 분노로 치를 떨고 있
었다. 윤관이 이토록 허망하게 죽게한 것이 저 간악한 조정의 문신들 떄문이란 생
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대궐로 쳐들어가 아버지
같고 스승같은 은인 윤관을 죽음에 이르게 한 조정중신들을 모두 때려잡고 싶었다
. 하지만 윤관의 경계와 만류의 말이 아직 가슴속에 맴돌고 있어 차마 그렇게까진
할 수 없었다.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대궐로 향한다면 그에 앞서 윤관의
혼령이 척준경앞에 나타나 호통이라도 칠 것 같았다. 그만큼 척준경에게 윤관은 마
음속 큰 스승이었던 것이다. 결국 척준경은 차마 대궐을 뒤엎어버릴 결단은 내리지
못한채 술로 자신의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한편 그와같은 척준경을 언제부터인가 눈여겨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자
겸이다. 벼슬자리에 다시 나아가기 위해 장인 최사추의 집을 드나들때부터 면식이
있었던 척준경. 이자겸은 저 단순무식하고 우직하기만 한 용장 척준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조정의 병권은 척준경 저자가 쥐고 있다.
그러니 저 단순무식한 자를 자신이 잘 구슬리기만 한다면 충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이용해 먹을 수 있겠다. 그게 이자겸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종종 척준경에서 술과 밥을 사주는 이자겸에게 척준경은 울분을 토로한다. 이자겸
은 침착하게 척준경을 만류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히 그에게 동조하는 태도를 취하
며 척준경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그려먼서 어느새 척준경과 이자겸은 형님,아우
하는 절친한 사이로 변해있었다. “장군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 얼마든지 내응해
드리리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좀 더 기회를 두고 봅시다. ”. 한때 몰락의 위기에 까지 몰렸던 경원이씨 가문이긴 하지만 이제 이자겸은 자신의 딸이 왕후가
되어있는 몸이다. 게다가 이자겸의 둘째딸인 순덕왕후 이씨는 얼마전 왕자까지 출
산했다. 그러니 그 왕자가 왕이 되면 왕의 외할아버지가 될 몸인 이자겸에게 무슨
부족함이 있을까. 하지만 이자겸에겐 이미 단순한 국구(國舅) 노릇이 아닌 그보다 더 큰 무엇을 쥐고자 하는 야심이 한켠에서 싹트고 있었다.
71회 - 90회 (인종. 이자겸의 난 - 척준경의 몰락)
세월이 흘러 예종도 세상을 떠난다. 예종 후반기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대체로
태평성대였다. 한편 척준경은 이무렵 딸을 이자겸의 아들 이지원에게 시집보내
사돈간이 된다. 한편 예종 11년(1116년)에 오연총마저 세상을 떠났다. 오연총도
윤관처럼 세상을 떠나기 전 척준경에게 권세가 높아졌다고 교만하거나 정치싸움
에 지나치게 휘말려들지 말것을 특히 다혈질인 성질을 좀 죽이고 지혜를 갖출것
을 신신당부하고 세상을 떠난다.
고려 17대 임금 인종(1109-46년. 재위 : 1122-46년)이 즉위하고, 예종의 비
였던 자신의 딸 순덕왕후의 소생인 인종이 왕이 되어 왕의 외할아버지가 된 이
자겸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다.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딸과 넷
째딸마저 연거푸 인종비로 시집을 보낸다. 고려는 물론 그 이전 신라에도 근친
혼이 성행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모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이전까지 사례
를 거의 찾아볼수 없는 해괴한 일이었다. 더욱이 숙종이 근친혼을 전면 금지시킨
지 얼마되지도 않아 벌어진 일이다. 중신들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과 인종의 결혼을 독단으로 밀어붙여 성사시킨다. 하지만 하늘의 어
떤 경계라도 되는 것일까. 이자겸의 두 딸을 인종비로 맞아들이는 혼례날 하필이
면 두 번 모두 비바람이 불고 벼락이 친다.
단순한 척준경이었지만 이자겸의 권세가 날로 커가는 것에 어떤 두려움을 느꼈
음일까. 인종 3년(1125년) 4월. 척준경은 일시적으로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
아간다. 그러자 임금이 직접 시랑 최식과 봉어 이후를 보내 척준경을 설득 돌아
오게 한다.
이자겸에 대한 견제세력은 조정에도 만만찮게 존재했다. 그 대표격 인물이 한안
인이다. 한안인은 이자겸을 비방하는 글을 올리다 궁지에 몰려 스스로 휴가를 신
청한다. 이어 한안인은 자신의 세력을 규합 예종의 아우 왕보와 함께 이자겸을 제
거할 음모를 꾸미지만 오히려 이자겸에 의해 역도로 몰려 제거당한다.
한편 이 무렵 동북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오야속의 뒤를 이은 아골타는
마침내 황제가 되어 금나라를 건국한다. (1115년). 거란과 고려의 사이에 끼어
전전하는 유목민 신세를 벗어나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보고 싶다던 오야속,
아골타 형제의 야망은 결국 동생 아골타때에 이르러 결실을 본 것이다.
한편 송나라는 금나라에게 함께 요나라를 칠 것을 약속하니 그것이 ‘해상의 맹
약‘이다. 내용은 함께 요나라를 멸한뒤 금나라는 중경을, 송나라는 연경을 차지하
며, 지금까지 요나라에 바치던 세공을 대신 금나라에 바칠것이며, 송.금의 국경을
만리장성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의 적 때문에 송나라는 군사를 파병할 처지가 못 되었다. ‘방랍의 난’ 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금나라가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다시한번 대승을 거두
었을때, 송나라는 방랍의 난을 진압하느라 아무런 군사도 파병할 수 없었다.
결국 금과의 약조를 지키지 못하고 바보신세가 된 송나라. 이번엔 요나라에
밀사를 파견 함께 금나라를 칠것을 약조하나, 그 밀약은 곧 금나라에게 발각
되고 만다. 격분한 금나라는 우선 요나라를 공격 무너뜨리고, 요나라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백두산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요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골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금 태종은 마침내 송나라마저 공
격 남송으로 쫓아버리고 만다. 이렇게 송나라는 북송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남송의 시대가 열린것이다. 그리고 11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고려와 거란사
이의 약체 유목민족에 불과했던 여진족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마저 남
송으로 쫓아보내고 12세기 동북아 최고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한편
금 태종은 사로잡힌 송나라 황제 휘종과 그 아들 흠종에게 ‘정신이 혼미한
바보같은 자‘라 하여 휘종에겐 ’혼덕공(昏德公)‘, 아들 흠종에겐 ’중혼후(重昏
候)‘란 모멸적인 호칭을 하사한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던 금 태조 아골타. 그 아들대에 이르러 당나라의 뒤를 이은 송나라가
마의태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굴욕적인 패배와 치욕을 당한것이다.
한편 고려에선 이와같이 급변하는 동북아의 정세를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
는 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바로 묘청이다. 이제 고려는 더 이상 숙종-예종대
에 활활 타올랐던 북벌의 의지는 찾을래야 찾을수 없었다. 윤관과 오연총등 북
벌의 명장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는 척준경은 그저 이자겸하고만 붙
어서 자기 일신의 권세만 탐하는 자 같았다. 묘청도 한때는 척준경을 눈여겨
보고 그를 만나러 가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척준경의 단순무식한 성품에
실망 돌아오고 말았다. 대신 그는 같은 서경출신인 정지상,백수한등과 교류하며
이제 다시는 북방의 영토를 회복할 길이 없어보이는 현실에 대한 탄식만을 내
뱉는다.
한편 임금의 장인이자 외할아버지로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이자겸은 그
래도 조정에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고 인종 또한 자신을 의심하
는 기색이 보여 어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이자겸은 인종을 독살할 음모를
꾸민다. 이자겸은 자신의 넷쨰딸이자 인종의 두 번째 비를 시켜 음식에 독약을
넣어 보낸다. 하지만 인종비는 차마 아버지 이자겸의 독살음모에 동조할 수 없
어 조카이자 남편이 되는 인종에게 이를 고백한다. 이자겸의 거듭된 인종 독살
음모는 이렇게 자신의 딸이자 인종의 후비로 들인 왕비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
고 만다.
이자겸의 음모를 본 인종은 이제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본
격적으로 이자겸과 척준경의 세력을 몰아낼 궁리를 한다. 한편 이 무렵 도성에
는 참람되게도 ‘이씨가 장차 왕위에 오를것’이라는 ‘십팔자왕위(十八子王位)’설
이 돌고 있었다.
인종은 이자겸 세력의 전횡과 횡포를 더 이상 두고볼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측근 내시인 김찬을 원로 김인존, 평장사 이수등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이자겸의 세력이 너무 커 결행하긴 힘들것 같다고 말한다.
허나 인종은 결국 이자겸 체포 결단을 내린다. 1126년(인종 4년) 2월 25일. 인종
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등의 장수들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 척준경의 아
우인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 척순등을 살해하고 시체를 궁성밖으로 던져버린다.
사랑하는 아들과 동생의 죽음을 본 척준경은 눈이 뒤집히고 만다. 이자겸과 척준
경은 측근들을 불러모은뒤 자신들이 먼저 공격을 가하기로 한다. 척준경의 명령
을 받은 군사들이 궁성에 도착하자 자물쇠를 부수고 성안으로 들어선다. 이튿날,
척준경은 군사들에게 최탁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말하고 궁성을 포위하라한다. 졸
지에 궁성은 포위당한 꼴이 되고, 그러나 인종이 불현듯 신봉문위에 양산을 펼쳐
보이며 나타난다. 왕은 궁에 들어온 병사들에게 무장해제를 명한다. 일부 병사들
이 왕명을 따르려하나, 척준경은 분노하여 화살공격을 명령한다. 척준경은 화공으
로 궁궐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고, 최탁,오탁등은 모두 척준경의 병사들에게 살해
된다. 사태가 일단락되자 이자겸은 궁성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을 모두 처단하고, 그
가족,친지들도 유배보낸다. 인종을 자신의 사택에 연금해버린 이자겸은 이제부터
실질적인 왕 행세를 시작한다.
한편 얼떨결에 이자겸의 역모에 가담한 셈이 되어버린 척준경은 바로 얼마가지
않아 후회한다. 그도 어느덧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였으나 정치에는 여전히 미
숙하고 단순한 무장에 불과했다. “내 어쩌다가 이자겸을 따라 이 지경까지 왔던가.
? ”. 척준경이 아무리 단순무식하고 미련하다 한들 어찌 이자겸의 저 참람된짓이
역모라는것을 모를까. 헌데 자신도 어느덧 이자겸을 따라 더 이상 돌이킬수 없는
깊은곳까지 와버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척준경이 이자겸과 교류를 쌓게된 것은, 북
벌이 좌절되고 윤관,오연총등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자 특히 윤관을 탄핵한 조정
문신들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 불만의 시기에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척준경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자겸에게 솔깃했던것 뿐이다.
하지만 이제 척준경은 그 옛날 여진정벌때 윤관을 따라 나서며 혁혁한 공로를 세
운 북벌영웅이 아니었다. 이자겸의 난에 가담한 패역무도한 반역자일 뿐이었다. 어
쩌다 자신의 신세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하는 생각에 척준경은 이자겸 같은자와
지금까지 교류해온것을 후회막심해한다.
한편 이 무렵 척준경의 집사와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집사가 시비가 붙는 일이
발생한다. 한편 은밀히 사람을 보내 척준경과 이자겸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인종
은 마침내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인종도
척준경은 그저 단순무식한 무장일뿐, 따라서 자신이 잘만 설득하면 자신에게 돌아
올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했다. 결국 척준경에게 은밀히 조서를 내려 잘 설득하고
이자겸의 무리를 몰아낼것을 명한다.
척준경은 마침내 이자겸의 난에 가담한 죄를 눈물로 참회하고 임금이 계신곳을
향해 4배를 올린다. 마침내 그해(1126년. 인종 4년) 5월. 척준경은 군사를 일
으켜 이자겸 세력을 척결한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지 불과 석달만에 인종과
척준경의 역전극이었다.
이자겸의 난을 척결한 공로로 척준경은 문하시중에 오른다. 하지만 척준경은
자신 또한 한때 이자겸의 난에 가담했던 처지로 높은 벼슬에 오르는건 당치않
다 생각했는지 벼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조정은 척준경에게 다시 ‘추중 정국
협모 동덕 위사 공신’의 칭호를 주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의 벼슬과 ‘상주국’의 훈위
를 더한다. 또한 부인 황씨에게도 ‘제안군 대부인’을 봉하고 의복,금은기명,포백
,안장말 및 노비 10명과 밭 30결을 내리고 화상을 벽상에 그린다.
한마디로 이자겸의 난이 진압되고 난 뒤 세상은 척준경의 세상이 되는듯 했다.
하지만 조정중신들은 대체로 척준경에 대해서도 그다지 탐탁찮게 여기는 분위기
였다. 무엇보다 이미 이자겸의 난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는것은 척준경에게 치명
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결국 정지상이 직접 나서서 척준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척준경은 다시 벼슬을 박탈당한 뒤 암타도로 귀양을 간다.
91회 - 100회 (묘청의 난 - 척준경의 죽음)
척준경에겐 자녀가 남아있지 않았다. 하나있던 아들 내시 척순은 이자겸의 난
때 인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이지원에게 시집간 딸 역시 이자겸 세력이 몰락
할때, 목숨을 일었다. 게다가 하나뿐인 동생 척준신마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
가. 암타도에서 다시 고향 곡주로 귀양처가 옮겨진 척준경의 곁엔 그를 일생동
안 지켜준 황씨부인 보영 뿐이었다. 이때는 이미 보영도 척준경 앞에서 불호령
을 내리던 호탕한 여전사가 아닌 환갑을 넘긴 힘없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한편 영광 법성포로 귀양을 간 이자겸은 그곳의 특산물인 조기를 먹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를 임금에게 진상하기로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로 조기에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새로 적어서 함께 올린
다. 이자겸의 저의를 알 수 없는 인종으로선 불쾌할 뿐이고 이자겸은 인종 4년
(1126년) 12월 숨을 거둔다.
한편 고려조정엔 다시한번 북벌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바로 묘청의 난이
일어난것이다. (1135-36. 인종 13-14년). 고려조정은 개경파와 서경파로 갈
라져 또 한바탕 큰 홍역을 치른다. 하지만 서경천도와 북벌을 주장하는 묘청의
주장은 무모해보이는 면이 많았다. 김부식등 개경파가 서겅천도와 북벌에 반대
하는 것도 결국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것이다. 무엇보다 첫 번째로 묘청과
백수한등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오직 풍수지리에만 의거 서경천도를 주장할뿐
막상 서경으로 천도한뒤 국가를 어찌 이끌어나갈지에 대한 아무런 통치철학도
정책비전도 없었다. 다만 그저 서경으로 천도 금나라 오랑캐를 정벌해야 한다는
‘묻지마 천도’였고 ‘묻지마 북벌’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나라는 이제 더 이상 불과 20-30년전 까지만 해도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그런 허약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금나라는 이미 만
주를 지배했던 대 제국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까지 남송으로 쫓아보내며
12세기 동북아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터였다. 따라서 지금의 북벌은 윤관이
나 오연총 또는 숙종이 있던 시기의 북벌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
만약 숙종이나 윤관,오연총 같은 이들이 이 때 살아있었더라면 묘청세력의 무모
한 북벌론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며 막았으리라.
묘청의 난 소식은 고향에서 조용히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척준경에게도 들려
온다. 척준경은 착잡한 감회에 사로잡혀 그 반란소식을 전해듣는다. 이미 척준경
의 눈엔 세상을 떠나고 없는 윤관,오연총 그리고 숙종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니, 차라리 그때 다소 무리가 가더라도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금나라가 지금 저토록 강성한 대제국으로
성장할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지만 지금 그런걸 후회하고 아쉬워한
들 무슨 소용이랴. 이미 이젠 모두 지나간일 곱씹어보고 후회해봐야 아무런 소용
이 없는것을.
묘청의 난이 개경파인 김부식에 의해 진압된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에 적극적
으로 가담한 이들의 이마에 ‘서경역천(西京逆賤)’이란 글자까지 새기는 등 가혹하
게 숙청한다. 한편 묘청의 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정지상은 비밀리에 척준
경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척준경은 정지상을 몽둥이로 쳐
서 쫓아보낸다. 자신을 탄핵해서 귀양보낼땐 언제고 이제와서 도움을 요청한단
말인가. 묘청의 난에 과연 어떤 대의(大義)가 있으며, 또한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
과연 금나라 정벌은 승산이 있는것인지, 척준경은 그와같은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역량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한때 자신을 탄핵 귀양을 보내놓
고 이제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정지상의 기회주의엔 척준경도 치를 떨었던 것이다.
서기 1144년(고려 인종 22년). 고려조정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척준경에게 ‘검교
호부상서‘를 제수한다. 비록 신하로서의 도리를 잃은적은 있으나 사직을 보호한 공
이 있다는 것이 호부상서 제수의 이유였다. 묘청의 난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지나
고 난 뒤 새삼 척준경에 대해 아쉬워한 인종의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척준경은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창이 나서 고향 곡주에서 파란만장했
던 80 생애를 마감한다. 척준경의 부인 황씨 역시 그보다 몇 년 앞서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척준경. 죽음을 앞둔 그의 눈에는 함께 북벌의 꿈을 키워갔던 스승과 같고 은인
과 같았던 이들. 윤관,오연총,숙종등이 어떤 의미로 스쳐갔을까. 그러나 단순무식
하고 용감무쌍하기만 한 그였기에 정치에 대해선 몰라도 너무 몰랐다. 차라리 진
작 윤관과 오연총의 충언을 받아들여 정치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지 말 것을.
한때의 울분을 이기지 못해 이자겸과 너무 깊이 교류했던것이 척준경을 결국 돌이
킬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만 것이다.
이로써 숙종-예종조 뜨겁게 타올랐던 고려의 북벌의지는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만다. 윤관,오연총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척준경마저 귀양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
감했다. 여진정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윤관과 오연총은 모두 공신의 반열에 올
랐건만, 이자겸의 난에 가담했던 죄로 척준경만 홀로 쓸쓸히 고려사 ‘반역열전’
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자손도 하나 남기지 못한 비운의 장수 척준경. 그러
나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진정벌과 북벌의 의지가 그 어느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던 숙종-예종조의 시기. 윤관,오연총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파란만장한 삶
을 살다간 척준경(拓俊京)이란 장수가 있었음을. 한편 그로부터 1년후 묘청의 난
을 진압한 1등공신 김부식은 인종에게 자신이 집대성한 우리나라 현존 최고(最古)
의 사서(史書) 삼국사기를 올리게 된다.
첫댓글 척준경을 단순무식한 주인공으로 위의 시놉시스에서는 그렸는데...실제 드라마로 만들면 척준경은 아킬레스급이 될겁니다. 주인공, 특히 대하드라마 주인공을 단순무식으로 그리는 것은 한국사극에서는 불가능합니다 ㅋ 혹자는 척준경 친구 이름때문에 드라마화가 힘들거라고 하는데 이름 하나때문에 드라마를 못만드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특히나 한국사극은 기본적인 역사왜곡도 밥먹듯이 하는데 이름 하나 정도는 깜도 안되지요 ㅋ
드라마의 시놉시스라는 것을 처음 봅니다.
시대적 배경, 기획의도, 등장인물, 회별 주요사건 순으로 정리하셨군요.
어디선가 들으니 A4 10장내외라고 하였는데, 님의 글은 꽤 길더군요.
시놉시스가 긴 것이 좋은지 아니면 짧은 것이 좋은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님의 글을 토대로 드라마를 만드려면 시대적 배경이 60년 차이가 납니다.
2부작 내지 3부작 시즌제로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뜻을 잃지말고 더욱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라며,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단막극의 경우 10장 이내 분량인거고요, 일일극이나 장편 드라마일경우 달라집니다. 제가 시놉 많이 써 본 사람이라서 그 부분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이전에 모 대하사극 같은 경우엔 시놉 분량만 A4 용지로 100장 가까이 되어서 화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시놉이란게 드라마 전체의 개괄적 스토리와 등장인물 설정 그리고 중심주제와 기획의도를 밝혀놓는것이니까요
시놉시스라는 것은 무조건 짧게 쓰는 것이 좋은 줄 알았은데, 그것이 아니었군요.
너무 길게 쓰다보면 소설(혹은 대본) 작가의 상상력을 제약하거나 사실 몹시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적당한 것이 좋은데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짧고 굵게 만드는게 더 좋지 않을까요?
동북9성 설치 전부터 반환까지만 그리는겁니다.
"소드마스터 척" 이라고 불리는 그 화려한 무용을 TV로 보고 싶네요.
아무래도 척준경에 반한 분들이 대개 밀러터리 매니아 분들인듯 하니, 만약 전투중심으로만 한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인것 같네요. 전 이 참에 한번 대하사극 도전해 보고 싶어 이렇게 장대한 시놉시스를 써본거지만요 ^^;;
최근 스파르타쿠스 열풍도 있고 하니 척준경을 대하드라마로 만들면 액션씬이 볼만할겁니다. 근초고왕에서도 스파르타쿠스의 피튀기는 씨지효과를 모방하더군요 ㅋ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에서는 선혈이 낭자하는 듯한 느낌의 피튀김을 보여주지만.. 근초고왕에서는 그것보다는 좀 약하더라구요. 그래도 전투신은 방송 3사 중에서는 제일이죠. MBC 주몽에서 보여준 추모왕의 공중부양은 정말..할 말을 잃었습니다.
주몽의 피디가 그 유명한 막장드라마 인어아가씨 피디였죠...게다가 무려 사학과 출신이었답니다. 희한하게도 이 피디가 연출한 드라마는 대박을 쳤으니 이게 우리 시청자들의 수준인가 좀 씁쓸하더군요 ㅋ
밀리터리 매니아 사이에서 척준경은 '소드마스터 척'이라고 불린다고 하네요. 소드마스터 음..우리말로 하자면 '검의달인''검신(劍神)'정도 다물전사님 글처럼 '스파르타쿠스'같이 전투신(솔직히 스파르타쿠스는 전쟁신 보다는 개인간의 결투신이 많죠)을 선보인다면 남성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를 끌 것 같습니다. 단 정치적인 이야기 보다 척준경 개인사를 위주로 한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끌어 간다면 말이죠.
어쨌든 고려 중기 격동의 시대를 관통할 대하드라마 주인공으로는 척준경만한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글세요... 저도 드라마를 공부하고 있지만 이야기가 너무 붕뜰 것 같은 느낌... 차라리 고려 숙종을 다루시거나 아니면 김부식 쪽이 괜찮을 듯 하네요.. 척준경은 보여줄 것은 많은데 정작 이야기거리로서는 .... 뮤지컬이나 연극으로 한다면 몰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