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이순신(백승종)
1.
충무공 이순신은 물론 장군이죠. 그러나 그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선비의 도덕이요, 기품이었습니다. 대개 아시는 내용이지만 함께 확인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백호 윤휴가 충무공에 관해 쓴 글을 토대로 간단히 살펴봅니다. 참고로, 이순신의 서녀(서출 딸)가 윤휴의 서모(아버지의 첩)여서 윤휴는 이순신의 측근을 많이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 증언을 들었습니다. 윤휴가 직접 밝힌 바지요. 그러니까, 지금 제 말씀은 이순신의 측근이 바라본 그의 모습입니다.
2.
다음은 윤휴의 총론입니다.
"순신은 젊어서 웅대한 뜻이 있어 항상 말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몸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못할 경우에는 초야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귀에게 아첨하여 한때의 부귀를 훔치는 일은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출신하여 처음 벼슬할 때부터 대장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이 도리를 변함없이 지키었다."
삶의 대강은 출처, 즉 조정에 나가고 물러섬에 관하여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에 충실하였더란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제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되는 구체적 사건을 들어볼까요.
"훈련원의 낮은 벼슬아치는 직무가 난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꺼렸으나, 순신은 태연하게 취임하였다. 순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나긋나긋한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출세가 아니라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윤휴는 자신의 불위한 처지와 이순신의 삶이 겹쳐지는 모습을 본 것 같아요. 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낮고 고달픈 지위에 있으면서도 초연하게 대처하였고, 자신을 단속하는 풍도가 늠름하여 일체 무턱대고 몸을 굽혀서 남을 따른 적이 없었으니, 그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2.
윤휴의 주장은 객관적일까요. 확언하기 어려우나 아래의 몇 가지 사례담을 읽어보면, 틀린 말로 보이지 않아요. 윤휴가 제시하는 이야기를 하나씩 함께 읽어봅니다.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적에 순신은 정읍(井邑)에 있었다. 도사(都事) 조대중(曺大中)이 역옥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금오랑(金吾郞)이 문서들을 수취(搜取)하는 과정에서 순신이 조대중과 문답한 글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순신에게 은밀히 말하여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순신이 말하기를, 내 글에는 다른 말이 없다. 그리고 이미 수취한 가운데 들어간 것을 어찌 훔쳐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 후 조대중이 죽어서 널[柩]이 정읍을 지날 때 순신이 곡하며 보냈다. 이를 비난하는 이가 있자, 순신이 말하기를 조군(曺君)이 자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그 죄의 유무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금방 사객(使客)을 지낸 터에 무관한 태도로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은 지금도 오리무중입니다. 정말 역모를 일으켰는지 아니면 조작된 사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이순신은 정읍현감이었지요.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었고, 그 가운데 이순신과 친한 조대중도 포함이 되었는데요. 이순신의 태도는 당당하더라, 의리를 끝까지 지키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예가 뒤따라 나옵니다. 이번에는 벌 받은 상관에 대한 이순신의 태도입니다.
"의정 정언신(鄭彦信) 또한 옥에 갇혀있을 적에 순신이 마침 사령에 따라 서울에 왔다가, 그가 옛 장수였기 때문에 그 감옥에 나아가 문안을 하였다. 듣는 이들이 순신을 의롭게 여겼다. "
차라리 오해를 받고 세상의 버림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인간의도리를 외면하지는 못한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어요.
"순신이 대간의 평론에 의해 하옥되어 의율(議律)할 적에 옥리가 뇌물을 쓰면 죄를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은밀히 말하였다. 자제가 그 사실을 보고하니, 순신이 노하여 말하기를, 죽게 되면 죽는 것이지, 어찌 정도를 위배하여 살아나기를 구할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융통성은 없었어요. 타협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선비의 장점이자 단점이지요. 대개의 선비는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알고는 있으나 실천은 못하였지요. 이순신은 참 선비였습니다!
3.
그가 충청, 전라, 경상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사령관(삼도수군통제사)이 되자 선비이순신의 진면모가 드러났습니다. 윤휴는 그 점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순신이 장수가 되어서는 간이하게 다스리면서도 법도가 있어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지만, 삼군(三軍)에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고, 아무리 신분을 믿고 빳빳하게 구는 자라도 순신의 풍채만 바라보면 저절로 굽히었다. 일을 만나면 과단성 있게 처리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형벌을 쓰거나 상을 내리는 데 있어서도 일체 귀천이나 친소 관계로 인하여 마음속에 경중을 두지 않았으므로, 뭇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우리는 위인전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합니다. 사람이 실수도 좀 있고, 꼬인 대목도 있어야지, 재미가 없는 사람이네라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저도 그런 사람입니다만, 이순신과 같은 분이 한두 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윤휴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몇 가지 예를 들어요. 그의 글쓰기 방식이 늘 이러합니다. 주장부터 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논증하는거지요.
"그가 진영에 있을 적에는 먼데까지 척후(斥候)를 하고 경위(警衛)를 엄격히 하고서, 항상 갑옷을 입고 부월(鈇鉞)을 베고 누웠다가, 적이 오면 반드시 먼저 알아냈다."
솔선수범하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말로야 쉽지만 보통은 이렇게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반드시 스스로 전우(箭羽 화살에 꽂는 것)를 다스리었고, 싸울 때에 당해서는 처음에 사사(射士)들에게 빈 활만 주었다가 반드시 적이 가까이 온 다음에야 화살을 나누어 주었다."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도 전쟁 물자를 얼마나 빈틈 없이 관리하였는가를 알려줍니다. 이순신의 막하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은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휴의 글은 그런 점에서 자료로서 가치가 뛰어납니다!
"또 말하기를, 우선 적을 많이 죽이는 데에 힘쓰고 머리 베는 것을 일삼지 말라. 너희들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내가 직접 본 바이다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수공(首功)을 숭상하지 않았다."
포상이 중요하 것이 아니라 승전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이런 가르침을 되풀이하는 이순신 덕분에(?) 우리 군사들은 적의 목을 베는데 열을 올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현장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매번 싸움이 닥치면 장사(將士)들과 똑같이 활을 쏘았으므로, 장사들이 도리어 적탄에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순신을 부액하고 간하기를, 어찌하여 나라를 위해 자중자애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면, 순신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 명이 저기에 달려있는데, 어찌 너희들에게만 대적하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부하를 사지에 밀어넣고 자신은 공만 추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서 아는 내용이지만 백호 윤휴의 서술을 통해서 다시 확인해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울림이 생기는지요?
4.
이상의 내용은, <<백호전서>>(제23권)에 <사실(事實):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 統制使李忠武公遺事>라는 제목 아래서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물론 <사실>의 일부일 뿐이지요.
아마도 우리 자신이 어느 면에서는 이순신과 같은 태도로 세상살이를 하고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면으로는 거기서 너무 멀리 떨어진 삶을 영위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똑같은 태도를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오늘도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얼굴을 곰곰 살펴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첫댓글 오늘날 진정 이순신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가 해 같이 빛날 것이다. 언젠가부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나는 거리낌없이 이순신, 세종대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