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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인트장이
‘예쁜 물감으로 서너 번 덧칠했을 뿐인데
어느새 다 덮여버렸구나 하며 웃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오래된 예배당 천장을
죄다 메꿔야 하는 페인트장이였구나
그렇다고 내가 눈물 한 방울 글썽이는 것도 아니지마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지
이게 그 때 그 노래라도 그렇지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 때 그 노래’ 가사 중 일부분이다.
무심코 이 노래를 듣다가
‘알고 보니 나는 오래된 예배당 천장을 죄다 메꿔야 하는 페인트장이였구나’에서
가슴이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게 아닐까?
서너 번 덧칠해서 모두 덮었고 지워버렸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뜩 노래 한 구절에, 책 한 권에, 어느 골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리는 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지만,
그 때 그 노래에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라며 한탄하는 이 노랫말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안에 맴돌았다.
꼭 첫사랑이나 잊지 못할 연애사에 관한 일만 그런 건 아니다.
부모와 있었던 일, 친구와 절교했던 일,
자식에서 던졌던 어느 시점의 잘못된 말들 까지,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예쁜 페인트로 쓱쓱 몇 번 덧칠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어느 말간 날,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내 뒷통수를 치는 그 기억들 앞에서,
나는 참 대책 없이 망연자실하면서, 읊조리는 것이다.
‘그래, 그래,
나는 죽을 때까지 이 낡아빠진 예배당 천정을 다 칠해야하는 페인트장이구나‘ 하고.
시골살이 하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했지만,
그 중에 가장 적성에 맞고 재미있는 일 중 하나가,
페인트칠하기 였다.
나무로 만든 담이나 데크에, 페인트나 오일 스텐을 칠하는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페인트장이가 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천정을 칠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것 같다.
고개를 꺾어서 위를 봐야 하고,
페인트도 가끔 흘러내릴 것인데,
상상만으로도 고된 노동일 것이라는 추측이 되고도 남는다.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잘 간직하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어야 할 것을 잘 잊어버리고 사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 기억들이 불쑥 불쑥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와,
잘 사는 나를 한 방 먹이고 사라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노을이 아주 붉은 어느 가을 날,
서쪽 하늘을 마주 하고 앉아, 그 기억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평생 페인트장이로 살아온 나를 이제 좀 쉬게 해달라고…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런 기억 하나도 없이, 거울처럼 말갛게 정석대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참 재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길 건너편에서 또 다른 예배당 천정을 칠하고 있는,
어느 페인트장이를 만나면 친구 삼고 싶다.
기억 지우기의 고된 노동이 끝난 늦은 저녁답에,
(소주는 못 마시니,) 얼음물이라도 한 잔 건네면서,
마주 보고 웃으면 위로가 될 것 같다.
페인트장이, 나쁠 건 없는 인생이다.
첫댓글 덮어지지 않는 천장, 굳이 덧칠 하지 않으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잘못에 대한 기억이 떠 오를 때마다 가슴이 아리지만 그것으로 갚아 나간다 생각합니다. 평생~~
나도 페인트로 칠하고 싶은 일들이 많으니 재수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위안을 얻습니다.ㅎㅎ
아름다운 미얀마의 석양에 마음을 뺏기던 추억은 말갛게 남겨 두고 싶은거죠! 평생~~
가끔 지난 기억들이 아프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페인트장이로 살아가는 게 그리 나쁘지 않은 까닭은, 그 모든 기억 밑바닥에 그리움이 깔려있기 때문이겠지요...
가끔은 덮어 버리고 싶은 기억들을 잠시 끄집어 내 놓고 나를 위로하는 시간도 참 소중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