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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사유 공간의 현실과 다른 상상력들
박노식 시집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 박인하 《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중심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여린 허리를 지그시 밟고 오던가 그도 아니면 아예 온몸으로 맞서 스스로 쟁취하듯 모습을 드러낸다. 계절로 구분되는 이 세상의 만물은 그렇게 생동과 소멸을 반복하며 이르고자 한 형상만큼을 기어이 실행한다. 거기에는 누가 뭐라 해도 본질 속에 숨어있는 실행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절대적 불변의 순리인 것이다. 그것을 한 줌의 의식으로 막아서려는 인간의 오만이 간혹 그 실행력을 늦추거나 훼손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그것의 지속적인 실현 의지를 멸실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도 하나의 세계라면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들도 세계를 구성하는 한낱 인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 도도한 순리처럼 인간의 본성을 깨워 이룬 상상력으로 현현한 시는 당연한 의지의 결정체인 것이다. 결국 추진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를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기어이 이르고자 한 문학적인 세계로 응집된 시집은 많은 사유의 파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사람에 대하여 절실해져야 하는 까닭을 알게 된다.
그립다는 것의 발원
박노식 시인의 문학 전반을 관통하는 설움 같은 그리움은 이미 본능화된 심성임을 알 수 있다. 부단히 우리는 그들과 살아왔고 다만, 혼자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도저히 물러설 수 없는 것으로 익히 알고 있던 것처럼 의식하며 그들(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워한다. 다만, 그런 마음속의 생각들을 감추고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눈을 떴을 때 엄마가 곁에 있었던 것에서부터 문제였는지 모른다. 혼자라는 것에 익숙할 수 없는 출생 이후 누군가가 곁에 있어줘야만 한단 학습된 의식이 체화되어 버린 탓이다.
노박덩굴을 꺽어서
벽에 걸어두었지
절로 껍질 벌어지고
붉은 열매 나왔네
저 씨앗들은 왜 이리 황홀할까
그건 외롭기 때문,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생존의 슬픔이지
누구나 무관심하니까
누구나 무정하니까
그래서 깊은 눈[眼]에 띄게 하려고
그러니까 살아보려고
속으로 맺혀버린 거야
붉은 명,
오랜 자학,
“새야, 어디 날아와 나를 물어 가다오”
지난 한 계절
노박덩굴과 함께 살았네
제 몸을 비우는 것처럼
제 맘을 태우는 것처럼
간절하니까
절박하니까
-<나는 왜 노박덩굴을 사랑하는가> 전문
어딘가에 기대어 의지해야 성장할 수 있는 노박덩굴이다. 노박덩굴은 돌담이나 담벼락처럼 울타리용으로 심거나 아니면 아예 밭 가장자리나 그도 아니면 산비탈 험한 곳에서 꿋꿋하게 잘도 자란 덩굴에 약성이 있어 민간 약재로도 활용한다. 화자는 그런 노박덩굴 가지를 잘라 방안에 한 동안을 걸어두었다. 그것도 하얀 벽지가 발라진 방안에서 “절로 껍질 벌어지고/ 붉은 열매 나왔네/ 저 씨앗들은 왜 이리 황홀할까”라며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하얀 방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바꿔놓진 못했다. 근본적으로 평소 품고 있는 방안의 하얀 색감에 강렬했기 때문이다. 하얀 방안에 홀로 덩그라니 앉아있는 반복된 삶이 그래서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마음을 바꿔보려고 들인 노박덩굴이 오히려 “외롭기 때문”에, 고독한 “슬픔”으로 스며 나오고 “무관심”한 주변 탓에 “무정”한 마음까지 들어 더 쓸쓸해졌다. 마른 껍질을 비집고 나온 노박덩굴의 붉은 열매를 보며 억눌렀던 감정이 번져 나온 것이다. 스스로 고독해져 그리움이 깊어진 마음을 들쑤셔 놓았고 누군가가 마음속으로 들어와 주길 바라는 간절함까지다. 그 속내에 진하게 침전된 외로움은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 화자는 온통 사물로 다가온 대상을 그렇게 바라보기로 작정한 듯하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는 건
설움이 많기 때문이지
너와 너의 누이와 나의 어머니와 그리고
그물코에 걸린 숭어 떼의 눈망울들도 마찬가지야
고요하거나 들끓거나 쓸쓸하거나
간절함은 먼 데서 찾아오는 바람 같은 것
그러나, 부귀한 자는 손을 모을 줄 모르지
구름을 끌어올리듯 가슴에 두 손을 얹을 때,
설움 속에서 우리의 고백은 진실한 거야
손을 모아봐
겨울 화분에 싹이 올라오는 순간처럼
손을 모아봐
손을 모아봐
-<손을 모아봐-운주사, 석조불감 앞에서> 전문
조상의 영혼을 모신 곳이 사당이다. 그처럼 ‘석조불감’도 신앙의 대상인 불상을 한데(바깥) 다 그냥 모실 수 없다는 숭앙심을 드러낸 것으로 불상을 모실 석탑을 만들어 그 안에 들였다. 그 마음이 인간의 생전과 사후를 구별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숭배한 불상은 무한한 것으로 그 끝없음을 보여주는 당시의 보편적인 불교 신앙심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석조불감 안에 모셔진 불상을 통해 전이된 심상을 다른 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 그 표정과 매무새를 화자의 심리적인 무의식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것의 마음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경건함과 위엄을 최대한 고려해서 불상의 두 손을 가슴 언저리에 모았을 것이다. 화자는 그런 형상에서 ‘설움’을 달래고 있는 모습으로 상상력을 끌어낸다. 부처의 형상인 불상이 한갓 인간의 설움만을 품고 석조불감 안에서 긴 세월을 견뎌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가 안고 있는 그리움이나 쓸쓸함의 근저에는 인간이기에 겪어야 하는 죽음 이전의 고행이 담겨있다. 그 근원적인 설움은 석조불감 안 불상의 눈으로 바라본 삼라만상의 “너와 너의 누이와 나의 어머니와 그리고/ 그물코에 걸린 숭어 떼의 눈망울들도 마찬가지야/ 고요하거나 들끓거나 쓸쓸하거나/ 간절함은 먼 데서 찾아오는 바람 같은 것”으로 일반 대중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결국 석수장이의 마음이 불상 안에 스며들어 돌을 쪼아 만든 피조물이니 불상을 종교적인 대상이 아니라 화자는 인간의 마음으로 들여다본 것이다. 운주사 불감 안 불상은 등을 맞대며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 때문 쓸쓸해지거든 가슴으로 두 손을 모아볼 일이다. 생각보다 세상살이에 대한 생각이 편안해질지 모르겠다.
파도가 불러서 우리가 왔지
고갱의 병식, 시엔의 수영, 가세 박사의 현묵, 탕기 영감의 동근, 테오의 상순
자은도 수평선 뭉게구름 위에 만월처럼 둘러앉아 압생트를 마셨지
난 미친 게 아니야, 색채 속에 갇힌 것뿐이야
그날 밤도 그랬어, 나의 모든 것이 어두우니까 눈빛이 날 밖으로 인도한 거야
하늘은 바다보다 더 깊어, 그래서 내 눈도 깊어진 건데 그만큼 눈물이 많아
그러니까 그 별은 바다 위의 별이지만 실은 나의 눈물 자국이야
파도가 불러서 우리가 왔지
파도가 불러서 우리가 왔지
-<고흐의 아주 사소한 독백 하나-‘별이 빛나는 밤’에 대하여> 전문
누구의 주동이 아니라 의기투합한 유년기 충동이 그들을 덮쳤다. ‘고흐’의 사소한 ‘독백’ 하나라는 말의 특별함에 사방이 어둠인 그들의 의식 속에 잠재된 ‘별이 빛나는 밤’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사轉寫하고 있다. 바다의 파도를 기억하며 자란 그들이 분명하다. 아마 태생적으로 섬에서 나고 자란 친우 관계일 수도 있다. 다섯의 각기 다른 애환을 말하며 ‘고흐’의 불우한 삶을 상기할 수 있는 “고갱의 병식, 시엔의 수영, 가세 박사의 현묵, 탕기 영감의 동근, 테오의 상순”으로 대변하고 있다. 먼저 고갱의 삶을 되짚어 보자. 잘 나가던 중년의 삶에 닥친 불우는 끝간 데까지 가버렸고 아내와 아이들과의 이별 후 타히티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고갱의 병식’ 또한 그리 잘 풀리지 않은 삶을 에둘러 말해준다. 또한 ‘시엔의 수영’도 어찌 보면 이루지 말아야 할 불가촉한 사랑을 만났음을 은연중 암시한다. 그래도 그중 잘 나간 친구가 의사인 ‘가세 박사의 현묵’이다. 또한 상순의 그림을 몇 점 떠안아 준 고마운 친구가 탕기 영감 같은 동근으로 밤은 깊어도 정담은 그칠 수 없다. 그들은 고흐가 자아 속에 갇힌 고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던 타히티 같은 섬 자은도에서 삶의 고독을 삭히느라 압생트를 털어 넣고 있다. 화자가 안고 있는 절망 같은 쓸쓸함이 그리움으로 치달을 때마다 고흐가 그랬던 것처럼 “난 미친 게 아니야, 색채 속에 갇힌 것뿐이야”라며 근원적인 슬픔을 위로한다. “하늘은 바다보다 더 깊어, 그래서 내 눈도 깊어진 건데 그만큼 눈물이 많”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주변의 충동적 격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변명이라고 볼 수 있다. 연거푸 받아 마신 압생트로 인해 하늘에 뜬 별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을 것이다. 그럴 즈음 사람들은 주사처럼 혼잣소리를 쏟아낸다. 그 말은 억눌러온 넋두리같은 한탄이다.
“이번에 그림 팔아서 아들 녀석 전세금 해줬지”
“······,”
“그림은 돈이 되는데 시는 돈이 안 되잖아?”
속으로
‘나는 아들 원룸비도 못 대주는데’
그리고 또 속으로
‘나는 무명 시인이라서 남의 돈만 축내고 있는데’
그리고 며칠 전, 아내는
“그놈의 시, 그놈의 시가 뭐라고!”
질책하며 나를 타박하는데
-<어떤 독백> 부분
일상으로 맞이한 내면의 심리적 갈등을 조곤조곤 묘사하고 있다. 시를 쓰는 화자의 삶 그 자체가 넉넉하지 않아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만큼 시를 쓰는 환경은 열악한 곳이고 닥칠 앞으로의 전망도 희망적이지 않다. 누구는 몇 점의 그림을 팔아 아들 전세금을 마련해줬다고 한다. 그런 화자는 시 몇 편을 팔겠다고 해도 쉽게 팔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기껏 시집으로 엮어 내놓아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태에 대한 자괴감에 더 괴롭다. 결국 그 고단한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방편은 시 쓰는 것을 그만두고 매표소라도 근무를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한 달을 꼬박 채워 “ ‘나도 아들 원룸비 대준다’ 이 말을/ 그 화가에게 들려주려다 그만두었다”라며, “ “그놈의 시, 그놈의 시가 뭐라고!” ”라며 따져 들던 아내에게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었다. 생업이 될 수 없는 시에 몰입해 사는 시인들을 세상은 한 번도 안타깝게 바라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고독하고 외롭다.
시 <너의 편지와 이른 저녁의 눈>에서 “그리하여 밤은 또 오고 말았다”며 세상을 차단당한 채 긴 밤을 지새워야 한다. 그토록 기다린 너의 마음은 어제처럼 나에게 멀어져 간 듯했고 들려오는 “너의 노래와 나의 고독이 만나고 있”다 해도 그 노래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너의 편지와 이른 저녁의 눈이 그만큼 우울한 얼굴을 만든다”며 지금껏 일어난 일 들은 화자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온통 어둠을 타고 온 저녁의 눈들로 화자를 지독하게 바라볼 것이다.
그 긴 밤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한다. 스스로 자신과 단절된 오랜 시간을 뛰어넘기 위해 연인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편지에 전하듯 글을 쓰고 사랑하는 법과 그것을 지켜보는 ‘눈’을 거두게 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목울대를 치고 넘어오는 울음을 어이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눈 그친 후의 햇살은 마른 나뭇가지를 분질러 놓는다
때로 눈부심은 상처를 남기고
산새는 그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거나 종종거리지만
시린 몸이 노래가 될 때까지 겨울나무는 견딘다
하지만 그가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은 가슴이 먼저
울어버리기 때문이다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 전문
가슴으로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매한가지라며 쓸쓸하게 묻힌 봉분 앞에 엎드려 꺼억꺼억 우는 칠십 아들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참았던 회한의 통곡을 쏟아냈다. 작은 산이 온통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주위를 맴돌던 휘파람새가 설움을 가슴으로 받아 멀리 날아갔다. 한참 지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 그친 후의 햇살은 마른 나뭇가지를 분질러 놓”았고, 항상 슬픔과 상처는 앞뒤 아귀를 맞춘다.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설 즐거움이란 것은 아예 없는 것으로 모든 것은 ‘상처’가 된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의 일들이 상처였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슬픔과 눈물은 이종 세트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슴으로 울고 있는 줄을 몰랐다. 가끔은 같이 미치도록 웃어 주었다. 박노식의 시는 원천적인 슬픔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의 근원은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밀입한 고독이다. 그것을 탐침 하여 기어이 찾아내 그 안에 내장된 그리움을 시적 극단의 실체로 형상 발현케 한다. 그렇기에 박노식의 시가 마냥 슬픔이라거나 그로 인해 더 우울해진다거나 전염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 안에 억눌린 그리움들을 발색하여 시각적으로 공감케 한다. 따라서 심정적 교감을 시적으로 실감해 내는 주체적 상상력에서 발화한 개성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말들 속 심언들
박인하 시집 《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를 만나 볼 때이다. 산행을 하다 보면 지나칠 수 있는 길을 마주칠 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냥 지나칠 것인지 아니면 그 길을 한번 가볼 것인가를 그러다 운이 좋아 들어선 길에서 의외의 풍경에 눈과 마음이 즐거운 때가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상상력으로 발현하여 이룬 시적인 세계를 만날 때의 마음과 같다. 사유의 세계로 드러낸 형상을 접할 때 한정된 지면 때문에 신중한 고민을 해야 한다. 비평의 일을 하면서 사람 간의 친소관계가 아닌 문학적인 고려가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가장 아름답고 진정한 것의 진면은 무엇일까? 첫 마음처럼 첫 느낌이란 것에서 박인하의 첫 시집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려 했다. 무의식 속 세계에서 잠재된 외연에 내포된 사유가 궁금했다.
다 가 버렸는데 늘 너만 돌아와
꼭 쥔 손을 떠나갈 때의 탄력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
그래서 거침없이 툭 내던지는 즐거운 놀이 놓쳐 버린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어떤 봄날은 내내 온몸이 홑이불 속에서 이리저리 바스락거렸거든 형체도 없이 몸을 누르는 손목들 그리고 다시 피어난 꽃들
어떤 날들은 돌아오지 말았어야 해
다른 얼굴로 오면 다른 것인 줄 알고 피식 웃음이 나 네 이제 더 노련한 변장술이 필요하제 않겠니 그럼 모르는 척 조금 속아 주다 네 옆구리를 쿡 찔러 줄게 놀라지 마 이건 어차피 놀이니까 즐거워야 해 눈물 같은 것 없이도 짜릿할 수 있지 후후 마음이란 게 자주 변덕을 부리니까 하는 애긴데 반칙 같은 걸 써서 먼저 도망가지는 마 네 몸에 감긴 줄이 다 닳아 끊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은 놀이 지루하지 않게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들고 돌아오는 너라는 시간
-<안녕, 요요> 전문
‘요요’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이다. 필자도 손주들이 요요를 갖고 놀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신기해서 몇 번 가지고 놀아본 적도 있지만, 시적인 상상력까진 이르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되돌아온다는 것의 운동성을 사회적인 인간관계로 환기하고 있다. 은연중 심리적인 갈등 상황을 노출하며 “다 가 버렸는데 늘 너만 돌아와” 곁에 있어 주었다는 상황을 떠올리며 ‘요요’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행위로 편입하고 만다. 사실 우리는 매번 누군가를 만나거나 헤어진다. 하물며 백년가약을 맺은 배우자와 살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한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무의식 속에 잠재된 분리 불안을 안고 산다. 매번 환하게 웃으면서 시작한 아침 같은 저녁이 나에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 심리도 따지고 보면 ‘요요’가 작동하는 반경을 보며 그런 마음이 든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요요처럼 귀소 반복을 거스른 적이 없는 ‘얼굴’을 기억한다. 매번 달라지지 못해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안기는 당신 같은 요요가 화자의 곁에 있어줄 것이라는, 그런 그에게 “어떤 날들은 돌아오지 말았어야 해”라며 심술 같은 말을 할 때도 있지만 절대 당신을 도망가게 할 수 없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의 또 다른 말은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가슴으로 품은 사람은 쉽게 할 인연이 아니란 것이다.
깊은 밤이었는데
달을 보러 가자고 했어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나섰지
엄마는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물속에 반짝이는 거울을 집어넣는 거야
그날도 아버지는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어
적막한 마당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것 같아
바람도 조금 서늘했던 것 같고
달의 가장자리가
검은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하자
엄마는 천천히 엎드려 앉아 대야 속을 들여다봤어
땅에 엎드린 여자의 뒷모습
저 물속의 거울엔 무엇이 있을까
거울에 비친 달
붉고 푸른빛으로 떨리고 있었어
붉은 꽃 한 송이
달은 밤하늘에 떠 있고 지상엔 꽃이 피어나고
집 나간 남자들이 멀리서 돌아오는 듯
바람 소리 점점 깊어지는 밤이었어
-<아름다운 루나> 전문
요즘 세상에 가족 중 누군가가 멀리 떠났다 해도 달을 보며 간절한 마음을 기원하는 일은 흔치 않다. 여러 이유로 철새처럼 흩어져 살아가는 세태 속에서 과연 아내와 아이들이 간절하게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살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것은 각기 다를 수 있는 예외라고 치자. 행상 나간 지아비의 안전한 귀가를 염원하는 고려조 정읍사井邑詞에 등장하는 아내의 머리 위로 환한 달이 떠올랐다. 집을 떠난 이후 깜깜무소식인 남편을 향한 간절함을 달Luna에게 전한다. 그 이후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왔는가는 문헌상 기록이 없기에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적 화가가 말하고 있는 과거에 “깊은 밤이었는데/ 달을 보러 가자고 했어/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나섰지/ 엄마는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물속에 반짝이는 거울을 집어넣는 거야”라며 어린 나이의 화자가 알 수 없는 행동을 어머니가 했던 것이다. 나중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집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대야 속 거울을 통해 비친 달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 한참을 그런 뒤 “달은 밤하늘에 떠 있고 지상엔 꽃이 피어나고/ 집 나간 남자들이 멀리서 돌아오는 듯/ 바람 소리 점점 깊어지는 밤이었어”라며 신비한 광경의 그날을 떠올리고 있다. 달을 통해 지극한 마음을 실현하려 한 의지가 “거울에 비친 달/ 붉고 푸른빛으로 떨리고 있었어/ 붉은 꽃 한 송이”와 일체를 이루며 현대판 정읍사의 신화적인 전설을 재현한 것이다. 오래된 것도 다시 활용하면 새롭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언니, 자꾸 코가 빠진다
코 빠트리고 산 게 셀 수도 없는데
어쩌자고 이 코바늘까지 헛손질을 하는지 몰라
색색의 실 술술 풀리는 게 예쁘다 뭐, 어쩌다 꼬여 버리기라도 하지만
스웨터가 목도리가 되고 장갑이 되느라 꼬불꼬불 헤매기 좋은 길
저 달랑달랑 흔들리는 나뭇잎 언니, 난 요새 무릎이 시려
바람을 오래 덮어서 그런대
이 조각들을 나란히 이으면 완성되는 거지
알록달록 늙지 않는 영혼이라니 긴 밤을 떠돌다
잠시 까무룩 다 꿈이야
어떤 섬망은 가슴을 파고드는 애인 같아
무한 반복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코바늘이 지나간 구멍들 촘촘한 그물 같아
아무 데나 던져도 무엇이든 다 걸려들겠어
하지만 너무 가까운 건 놓칠지 몰라
잘 보이면 더 쓸쓸해질까
-<블랭킷> 부분
‘블랭킷’의 우리말은 코바늘뜨개질이다. 보풀이 있는 털실을 사용 코를 구멍과 구멍 사이로 얽히게 해서 옷이나 필요한 생필품을 만든다. 코바늘 뜨기에 열중하다 보면 코를 빠뜨려 지금껏 했던 일이 못쓰게 된 경우가 발생한다. “언니, 자꾸 코가 빠진다/ 코 빠트리고 산 게 셀 수도 없는데/ 어쩌자고 이 코바늘까지 헛손질을 하는지 몰라”라며 허망한 마음을 전한다. 그런 일들이 블랭킷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요한 일을 하면서 몇 번을 그랬던 것이고 그래서 힘들었던 때를 떠 올린다. 아직은 세월이 희망처럼 느껴지니 다행이다. 그런데 “바람을 오래 덮어서 그런대”라며 예전과 달리 무릎 시린 일이 잦다. 예전처럼 고만고만한 생각으로 줄거워 할 일만은 아니다. 무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궁리가 필요해졌고 그것을 이루려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섬망 증상이 잦아져 집중력 저하와 판단이 흐려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어떤 섬망은 가슴을 파고드는 애인 같아/ 무한 반복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코바늘이 지나간 구멍들 촘촘한 그물 같아/ 아무 데나 던져도 무엇이든 다 걸려들겠어”라며 잘못된 것들에 아무렇지 않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잘못 떴다가 풀어 버린 밤에서 나오지 못했어/ 어둠을 뜨는 일, 생각해 봐/ 커다란 밤의 실타래에 잡혀 뜬 눈으로 하얘진” 화자의 얼굴이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마음은 닳아 버린 연골처럼 서로 조금만 닿아도 벌벌 떨어/ 눕지 못했더니 무릎이 아파, 언니”라며 말보다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모른다. 얽히고설킨 모양이 마치 화자가 살아오며 겪었던 많은 일들과 흡사하다. 종종 무릎이 아파온 것처럼 수습되지 않아 불편한 마음을 떠올려본다. 삶 자체가 노력한 만큼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안 뒤 열정마저 시들해졌다.
그것의 시작은 이미 예고되었고 알게 모르게 시 <붉은 욕조>에서 학습으로 나타난다. 나의 의지가 아닌 타자의 욕망으로 이끌려 나온 태생의 잊힌 기억을 구체적인 상상으로 사실화한다. “나는 탯줄을 감은 아이 무서운 가위 나를 잘라내지 마, 울음소리를 기뻐하는 사람들 핏물 속에서 나는 건져진 아이 나의 아가미는 오래 끌고 다닌 먼지와 바람 속에 있었”다며 의지와 상관없이 계획된 일들은 일사불란하게 실행되었다. 다만, ‘나’란 자아는 철저히 배제된 상태였다. 엄마의 태 속에서 온통 뭉뚱그려진 “그것은 빛이 바랜 탯줄의 표식처럼 툭툭 떨어지는” 동백을 혼돈하듯 아이라고 부르곤 했다. 환청처럼 들린 소리가 귓속으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말을 생각해 보니 “붉은 꽃은 다 동백이라고 읽는다”라며 사람들은 핏덩이 같은 아기를 보며 붉은 동백을 떠올렸다. 저 작은 동백이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였던 때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 <팔월>은 아무 때나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막연하게 길을 나섰다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팔월’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으로도 미래는 이런 것이라고 특정하여 말해줄 수 없다. 겨우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직 오지 않는 팔월에 대해 쓴다/ 아이스크림처럼 빨리 녹는 시계는/ 지루해진 시간을 모래 위에 슬쩍 흘리고 있을 것”이라며 막연한 상상으로 “우리는 아무런 소식도 주고받지 못하며/ 어떤 기억들로 예감을 만들며 그곳으로 이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 정도를 예감할 뿐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팔월’이란 것도 일몰 속으로 사라지면 그만이다. ‘팔월’은 년 중 가장 왕성한 자연력으로 생애 속 중년기처럼 “너는 이미 가버리고 없는 팔월”과 같은 하루들이 대체적으로 허망하게 끝나곤 했다.
모두가 아는 나의 이름은 갈대를 엮은 발
나만 아는 나의 이름은 당신 방을 향해 걸린
가늘고 여린 방패이며 당신을 비추는 순한 빛입니다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올올한 결로
지나가는 그림자를 붙들어 새로운 것을 펼칩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걸러 당신 쪽으로 들이는 동안
푸른 나무들은 능선을 넘어 어딘가로 가 버렸고
흩어져도 아름다운 구름은 석양을 몰고 왔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쓸쓸한 방향에서 눈을 거두고
문을 닫아요, 누군가 당신을 봅니다
볕이 좋았던 어느 날은 그 볕을 따라
쭉 뻗은 당신 발끝에 나의 발이 힘들게 닿았는데
그순간 우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의 눈부신 몸을 보았습니다
-<나만 아는 나의 이름은> 부분
마음이 닿아야 할 곳은 시선이 멈추는 지점이다. 간혹 모호한 시선으로 인해 엇나간 표적을 맞추곤 했다. 그런 뒤의 후회는 오랫동안 마음을 아프게 한다. 바라보는 지점이 한 곳이어서 빗나갈 여지가 없는데 닿지 못한 때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오묘해 아예 그럴 생각이 없다. ‘나만 아는 나의 이름은’에서 말하고자 한 진짜 이름은 ‘당신’이다. ‘당신’만을 위한 유별한 삶을 들여다보자. 지극하여 “모두가 아는 나의 이름은 갈대를 엮은 발/ 나만 아는 나의 이름은 당신 방을 향해 걸린/ 가늘고 여린 방패이며 당신을 비추는 순한 빛”으로 살아온 당신이다. 그토록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지만, 당신을 위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빈속을 염려하며 흘린 눈물은 하염없다. 때늦은 사랑 타령이 아니다. 그 진정한 ‘당신’은 곧 화자 자신인 생애를 떠받친 손이었고 발이었고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살아남은 눈빛이었다. 그 순한 시간을 오래도록 입을 맞추며 수시로 드나들던 방이었다. 그럴 때마다 서로를 할퀴며 긴 시간을 견뎌온 흔적이었다. 항상 당신은 나의 이름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쓰다듬곤 했었다.
시큼한 바람에도 눈물이 잦아졌다. 시신경이 자율 제어 능력을 상실해 간다는 증좌다. 습관처럼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야 하는 외출은 불편하다. <눈물>이란 시에서 “그것은 난해한 기호들로 이루어진 세계”라며 기존의 완강한 인식에서 풀린 긴장처럼 “분명한 음을 가진 소리 곁에서 주눅”든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도 자신을 맴돌고 있는 “쉼표 없는 싸늘한 부음들이 저녁이면 들려온다/ 닿지 않는 먼 곳을 두드리다가 이탈한 손가락”마저 상처가 된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아픔을 고백하듯 “나는 당신을 위해 만들어졌”다며 속내를 들추지만, 끝내 당신한테 닿을 수 없었다. 가장 몰입해 있을 화자의 삶 안에서 멀어져 버린 “두꺼운 책처럼 잘 넘어가지 않는 당신은/ 가끔은 다정해서 흘려 버리고 말아/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마음들이/ 캄캄한 곳으로 발을 밀어 넣으면/ 나였다가 너였다가 엿같이 늘어나는 슬픔/ 잠시 얼굴을 가리고 나 아닌 듯 너 아닌 듯/ 매끄러운 피부가 되어가는 촉촉한 밤/ 하얗게 마른 얇은 낱장을 걷어내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이한 밤”(<마스크 팩>)을 떠올리며 마지막일지 모를 눈물을 준비해야겠다.
시집 속 박인하의 시에서 언어의 다양한 변곡점을 만나게 된다. 그 지점은 본성처럼 내재된 시적 변주라는 데서 의외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서 시적 세계로 유인해 가는 촉감도 상당한 것이고 그 비말적飛沫的인 전개가 단발로 그치지 않는다. 끊임없이 시적 유혹을 궁리하고 문장의 유로에서 사유를 통한 운동성을 활발하게 교차해 간다. 또한, 상징에 도달할 즈음 미끄러져 흘러내린 형상적인 시어가 여지餘地를 넓혀 줘 상징성과 공감도를 높여간다. 그것 또한 쉽지 않은 것이라서 시의 궁극인 문장의 변위를 잘 활용하는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