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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의 스승이었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학 유산기>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 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았던 사람.......”
이것이 무위당 장일순을 단적으로 소개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동안 장일순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유기농을 기반으로 도시의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를 직접 연결하는 ‘한살림 운동’을 시작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내세웠던 ‘생명사상’에 대해서는 김지하로 인해서 한동안 오해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 초반 ‘조선일보’에 기고한 김지하의 글로 인해, 당시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을 급기야 패륜 집단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내 서가에서는 당시까지 애지중지 소장하고 있던 김지하의 책이 모조리 치워졌고, 지금도 간간히 발표되는 그의 글들은 애써 읽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장일순의 ‘생명 사상’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전의 형식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입수하고, 그것을 음미하면서 장일순의 일생을 재구해 내었다. 저자인 김삼웅 선생은 이 책의 저작 동기를 ‘생전에 만나지 못한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장일순은 젊은 시절 진보정치에 뛰어들어 불합리한 한국 사회를 고쳐보려는 패기를 지녔고, 나이를 들어가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한살림 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고향인 강원도 원주를 기반으로 ‘올곧은 정신으로’ 살아가며 많은 이들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한 삶의 궤적을 더듬으면서, 저자는 장일순을 물질문명과 거리를 두고 ‘월든’ 숲에 정착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에 견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장일순의 삶을 새삼스럽게 다시 정리하기보다, 나는 그의 삶을 통해서 느꼈던 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서울과 대도시에서 살고 싶어 한다. 아마도 대도시에서의 삶이 보다 편리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회가 쉽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출세 지향주의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일순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대 복학을 포기하고, 고향인 원주에서 교육운동과 농민운동을 병행하면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고 파악된다. 즉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종교에 대한 그의 열린 태도였다. 가톨릭 신자로 당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지학순 주교와의 만남은 그의 삶에서 운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로 인해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고향 사람들을 위하여 신용협동조합을 시작하고, 협동조합과 나아가 ‘한살림 운동’에 뛰어드는 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학의 최시형 선생을 존경하고, 노자의 <도덕경>에 심취하는 등 맹목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자신의 종교만을 고집하며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부 성직자나 신도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라 할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을 추구하던 그의 삶의 자세가 잘 드러난 면모가 아닌가 여겨진다.
“무위당 장일순은 엄혹한 시대를 절망하면서도 ‘길이 없는 길’을 찾아 나선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하고, 양심수들을 위로하고, 청년들에게 미래의 눈을 틔운 구도자 또는 경세가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나서기를 꺼리고, 지도자인 체하지 않았다.”
저자가 평가하는 장일순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자세야말로 진정 이 시대에 본받아야 할 삶의 태도일 것이라 생각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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