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하다고, 충분하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는것 같다. 늘 허틋해지고, 애매해지는게 체워지지 않는 허전함 때문은 아닐까. 여기저기서 떡을 나누어 받았다. 귀한 과일도 받았고, 며늘이 사온 보쌈도 아이들과 먹었다. 냉장고에도 제육볶음과 닭 볶음이 들어가 있다. 먹을게 없어서가 아니고, 먹을거리를 선택해야할 정도다. 어쩌면 내일은 딸과 외식을 할지도 모르고, 아들이 출장에서 돌아오면 함께 밥을 먹게될수도 있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그럼에도 왜 허틋할까. 그냥 살이 찌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2Kg이 찐 상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곧 80에 이른다. 이 나이가 되고서도 진중하지 못하고 허둥데는 것은 왜 일까. 문제가 무었일까. 어제는 길에서, 뽑아버린 채송아 모종을 주워서 들고왔다. 사실은 눈독을 드리고 있었다. 눈독을 들이기는 했지만 경비아저씨가 있어서 삼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의것인것은 사실이니까, 도둑질이 될수도 있으니까, 이 나이에 변명하는 것도 쉽지는 않는 일이니까. 아니, 좀 가저가겠다고 말하고 가저올수도 있긴 했다. 너무 배게나서 속아내야 할태니까. 단지 말하지가 싫어서 망서렸다. 그리고 드디어 뽑아버린 것들을 줘올수가 있게된것이다. 살아나긴 할까. 내 나름대로는 정성을 기우려서 심었고, 아껴두었던 거름도 뿌려주었는데, 살지는 모르겠다. 사실 지난해에 채송화가 심겨저 있었으니까 씨가 떨어저서 올해는 신경 안써도 채송화가 나고 자랄거라고 행각했는데, 그리고 기다렸는데, 전혀 소식이 없었다. 채송화 뿐아니라 봉숭화도 그랬다. 뭔가 나서 자라는게 마땅하다고 기다리는대 아무것도 기척이 없다. 아니, 이제 막 뭔가가 돋아나는 듯 했다. 지난번에 갑자기 말라버렸던 제비꽃 풀잎이 살아나는 듯 했고. 빈 화분에서도 싹이 보이고 있다. 생명력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끊질기는 것이니까 어디 기다려 봐야겠다. 옮겨심은 채송화가 살아나는지, 혹은 저절로 돋아나온 싹이 꽃이될려지 말이다. 정답이 없는 세상을 살고있다. 노인들의 삶만 힘든것은 아니다. 어쩌면 무한 질주를 해온 나이든 사람들은 그래도 한길을 걸을수 있어서 다행일수 있다. 아이들은 어쩔것인지 걱정이고 미안하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다. 연애인들이나 유명선수들의 인생이 빛나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스타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무명으로 대기실만 전전하다가 사라지고 마는 스타후보생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고있다.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지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또있다. 수능 만점을 받고 명문 의대를 진학한 어느 젊은이가 살인자가 된 오늘날의 현실은 뭘까. 가치관결여, 도덕적인 윤리의식의 부족이 가저온 사태는 아닐까. 수능 만점을 받았을때, 명문의대에 합격했을때, 그 부모는 세상의 주인이 된듯 했을게다. 아마 나도 더하면 더 했을태니까. 그런데 살인자가 되다니, 그것도 결별을 원하는 여친구를 잔인하게 죽인 것이다. 있을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짓을 저지른게 수능 만점자가, 명문의대생이 저지른 범죄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가 공범인가. 인성이 부제인 세상을 한탄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럼에도 만점자에 대해 명문의대 합격에 대해 환상을 갖고 동경을 갖고 포기하지 못하는 이 불행을 누구 탓이라고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