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월나라에 서시라는 미인이 있었다.
서시는 늘 가슴앓이를 하여
통증이 있을 때마다
한쪽 눈을 찡그리곤 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오히려 아름답게 느꼈다고 한다.
그러자 동네 처녀들도 서시의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프지도 않은 사람이 아픈 사람의 표정만 따라 하니,
그 모습은 아름답기는커녕
괴이하게 보였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빈축을 산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남의 아픔은 보지 않고 겉모습만 따라 하면
나도 모르게 이상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이야기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할머님들은 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셨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삶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계신다.
조선시대의 환갑을 살던 분들이
대한민국의 환경 속에서는 팔십 안팎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 아날로그 윗세대의 어른들이
무병장수의 삶을
몸으로 그 환경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프신 어른들에게
“웃으세요”라고 한다고 웃을 수 있을까?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아픔이 가시면 웃지.”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웃음을 만들어야
환경이 좋아지는 것인지,
환경이 좋아져야 웃음이 나오는 것인지 말이다.
억지로 웃으라고 하기보다
먼저 내가 살아가는 환경부터 청소해야 한다.
집안이 어지러우면 먼저 청소를 해야 한다.
마음이 어지러워도
무엇이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지 찾아야 한다.
주변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환경이 맑아지고,
환경이 맑아지는 만큼 나도 편안해진다.
내가 좋아지면 다시 주변 사람도 좋아진다.
그러니 웃음은 혼자 만들어 내는 표정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
게 만들어 주는 환경일지도 모른다.
손자들이 찡그리고 있는데
할머님에게만 웃으라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웃으라고 하기 전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먼저 웃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먼저 주변을 청소하고,
내가 먼저 마음을 정리하고,
내가 먼저 웃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그 웃음은 가족에게 전해지고 이웃에게도 전해진다.
한 사람의 변화가
또 다른 사람의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가 다시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환경을 먼저 청소하면 주변이 맑아지고,
주변이 맑아지는 만큼 나도 맑아진다.
내가 맑아지면 다시 주변을 맑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의 이치가 아닐까.
일노일노(一怒一老), 일소일소(一笑一少).
화를 내면 한 번 더 늙고,
웃으면 한 번 더 젊어진다는 옛말처럼,
웃음과 찡그림을 단순히 개인의 표정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어른들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왜 웃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나는 이분들이 웃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가?
이 질문부터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환경의 모습이다.
같이 연구해 볼 일이다.
2026년 8월 24일
사회연구원 김수길
분명 아가는
엄마가 해주는 말을듣고
가족들이 해주는
말씀을 듣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정법강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