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해설/ 겨울 가로수
겨울 가로수
하는 수 없구나 인제는
자기 몫의 추위를 안고
걸어가자
아들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아득하고
건너야 할 강과 밤은
아직 많은 것을
이 겨울 사금파리로 빛나는
아침 햇살을 나눠 받아
맨살의 가지에 걸치고
뿌리로 뿌리로 내려가자
내려가서는
아슬한 물소리 속에
한때의 헛소문으로 더럽혀진
귀도 씻고
눈도 씻을 일이다
가자, 아들아
우리들 헐벗은 등허리에 스치는
한 움큼 눈보라도
넉넉한 꽃으로 피우면서
제 몫의 아픔이라면
한 움큼씩 녹이면서
살아갈 일이다.
< 1986년 11월 26일의 생각>
어젯밤이었다. 시내의 어느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봉동 가는 27번 시내버스를 금남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날씨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추웠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더욱 추웠다. 거리에서 나처럼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가 추워 보였다. 잎을 죄 떨구고 서 있는 은행나무 가로수 밑에서 어깨를 잔뜩 웅크린 모습들. 가령 우리가 따뜻한 손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추위를 조금씩 덜려고 하여도 그것은 어려울 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겨울에 어차피 우리는 제각기 주어진 몫만큼의 추위에 시달려야 하리라.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할 자기 몫의 추위. 나는 그런 생각을 가져보았다.
내 아들이 자라면서 나랑 같이 목욕 가는 때가 많아졌다. 즐거운 일이다. 아빠의 등도 곧잘 밀어주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다. 자그마하고 도톰한 아들녀석의 손을 잡고 목욕탕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내가 너와 함께 이렇게 손잡고 가는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벌써 내 나이도 사십대 중반이니 그런 기회도 사실 많지 않을 것이다. 메마른 나뭇등걸 같은 내 손아귀에 전해 오는 아들의 따스한 체온이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웠다. 우습게도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단어가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제각기 살아간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 몫의 주어진 운명에 부대껴야 하는 걸 뜻할 것이었다. 그것을 나는 나보다 더운 아들의 체온을 느끼며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전해주고 싶었다. 마음으로 전해주고 싶었다.
여름철의 무성한 이파리들을 모조리 떨구고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거리의 가로수들. 아스팔트 양편에 나뉘어 늘어선 가로수들이 마치 어디론가 먼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비쳐졌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이 겨울에 저 나무들이 다정히 손잡고 가는 곳은. 나무와 나무가 손잡고 도란도란 끝없이 걸어가는 곳은.
이 시는 어느 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것인데 발표 당시엔 「나목(裸木)」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너무 흔한 제목이라서 「겨울 가로수」로 고쳐 시집에 수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