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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생명, 사랑 중 그 중에 제일은(2)
4.1 뜻하지 않은 득템들
아침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한성대 입구에서 내렸다. 6번 출구에서 길상사해 버스를 타면 된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바쁠 일이 없는 나로서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 물론 틈틈이 네이버 지도가 나를 안내해 줄 거고.
6번 출구로 나와 큰 길에 서고 보니 바로 왼쪽 길 건너편에 큼지막한 건물에 ‘청우cw’라고 씌여 있었다. 아니 저건 내가 15년 동안 학원을 운영하는 내내 아이들의 수면 방지용으로 준비하여 먹게 했던 과자회사가 아닌가. 새삼 15년 동안 그 사탕을 애용하면서 학생들에게 애정을 쏟았던 날들이 먼 옛날처럼 아득하였다. 아직도 cw 사탕이 학원에 좀 남아 있을 텐데. 내려가면 한 번 찾아서 먹어봐야지.
* 청우 cw 식품 사옥
좀 걸어 올라가니 구포국수라고 하는 오래되고 허름한 식당이 보였다. 한 눈에 역사와 전통이 있어 보였다. 이따 유명한 보리밥 집에 가서 점심을 먹으리라고 예정한 터였지만 혹시 모르니 눈여겨 보아두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 옆에 성북동 문인들을 소개하는 안내 표지판이 있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모두 내가 아는 문인들의 이름이어서 반가웠다. 나도 1930년대 여기 살았더라면 같이 놀았을 텐데. 아니 그 때에 안 태어나길 잘 했지. 그 때에 이곳에 있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끔찍하다.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성북동 과 문학 안내판
네이버 지도를 보고 길을 가노라니, 아니 이게 누구인가. 최순우 고택? 학교다닐 적이 배웠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글로 유명한 분이 아니신가. 또 조금 떨어진 곳에 거금을 들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한 간송미술관이 자리잡고 있지 아니한가. 평소에도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여겼던 최순우 고택과 간송미술관이라니. 그야말로 이런 것을 두고 득템이라 하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최순우 고택엘 찾아갔더니 10:00부터 개방한단다. 지금이 9시 40분인데. 그래서 간송미술관을 먼저 가 보자하고 지도를 보면서 몇 차례 헤매다가 겨우 “간송미술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입구에 웬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복원 공사로 출입을 금한다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게 웬 일이야. 아님, 아직 내게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라는 말인가.
*간송미술과 정문
*간송미술관 입구
그러나 어쩌랴. 떼를 쓸 수도 없고. 다시 길을 되짚어 최순우 고택으로 갔다. 시간이 되어 대문이 열려 있었다.
*최순우 옛집의 외관
*최순우 옛집의 표지판
*최순우 옛집의 대문
*최순우 옛집의 정원
*최순우 옛집의 뒷뜰
*최순우 옛집의 안방
*최순우 옛집의 정원과 우물
크지 않은 ㅁ자 형 집이 아주 단정하였다. 마당도 넓지 않으나 규모가 있었다. 또 뒤뜰에 가니 울타리 가엔 석상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고, 돌 의자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원형 돌탁자 그리고 나무들이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어 참 아늑하고 깔끔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나무와 풀들에 물을 주고 있었는데 조용하고 정제된 집안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보였다.
사랑방에는 쪽마루가 있고 굵은 통나무로 깎아 만든 나무함지가 놓여있었다. 앞뜰 쪽 사랑방 문 위에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은 '문을 닫아걸면 곧 깊은 산중이다'라는 뜻으로 혜곡 선생이 직접 쓴 글씨가 걸려 있었다.
또 안방 쪽 문 위에 걸린 "온량공검양이득지(溫良恭儉讓以得之)"라는 말을 '한국고전용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었다. "『논어(論語)』에서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의 인격과 언어 동작을 평할 때 쓴 말로 원만한 인격자의 덕성(德性)을 가리키는 말이다. 온(溫)은 화후(和厚)이고, 양(良)은 고상하고 순수함이며, 공(恭)은 마음속의 공경심이 밖으로 나타나서 정중한 것이고, 검(儉)은 마음에 절제가 있어 방종하지 않은 덕을 가리킨다."
오랫동안 국립박물관장을 지냈고 미술사학자로 한국 문화재에 대해 깊은 애정과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혜곡 최순우 선생의 옛집을 돌아보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다시 살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와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1일 여행의 두 번째 행선지인 길상사로 향했다.
막 골목으로 들어서서 길을 가는데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지조론으로, 또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 생가터‘ 표지판이었다. 천천히 길을 가다 보니 이렇게 보물을 뜻밖에 만나게 되는구나 싶어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흐뭇하였다. 최순우 고택에 이어 또 한 번의 득템을 한 셈이다.
*시인 조지훈의 집터 표지석
이어지는 길가엔 육중함을 자랑하는 고급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과 내다보이는 주택의 구조 등이 너무 무겁고 짐스러워 보였다. 어젯밤에 성미산 마을에서 본 9평에서 34평 내외의 공동체주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조금은 격리되어 있고 단절된 그래서 따뜻하기 보다는 어둡고 부담스러운 모습들이었다. 또 곳곳에 외국 대사관들이 자리잡고 있어 주택가로서는 아주 고급스러운 곳인 모양이다. 하긴 그 끝머리에 당대 최고의 요정이 있는 것이니 묘한 조합인가 싶기도 하다.
4.2 맑고 향기로운 사랑, 길상사를 찾아①
이윽고 길상사 정문 앞에 섰다.
일주문 현판은 추사 선생 이후 최고의 명필로 손꼽히는 여초 김응현 성생님의 글씨로 “삼각산 길상사”라 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일주문 양 옆 주련에는 神光不昧萬古徽猷 入此門來莫存知解(신광불매만고휘유 입차문래막존지해/ 신령스런 광명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빛나니,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라 하여 함부로 아는 채 하지 말라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적어도 그 옛날 이 대문을 들락거리던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채 할 만한 고관대작들이었을 덴데. 격세지감이라 할까, 인생무상이라 할까.
*삼각산 길상사 정문
*길상사 정문 오른쪽
*길상사 정문 왼쪽
그래 내가 길상사에 오고자 했던 것은 아무래도 이 절터를 무상보시한 길상화(吉祥華) 김영한의 순도 높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가.
김영한과 백석에 관한 두 편의 글을 길지만 다시 읽어 본다.
- 백석의 첫사랑은 통영의 ‘난’이다. ‘난’과의 사랑에 실패한 백석이 서울로 돌아와서 만난 여인이 바로 ‘자야’다. 1940년 만주로 떠났으니 약 3년 정도의 사랑이 백석과 자야가 사랑한 시간이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서 기생이었던 진향(자야)을 만났다.
진향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한 그는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외적인 도피.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는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그는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그는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를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했다.
그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하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그는 괴로워하고 갈등했다.
그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만주로 떠나는데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잊혀져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우리 문학사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인사가 되고 만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바로 그녀와의 사랑을 노래한 시다.
지금 눈이 내리는 것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 있어’
기자는 또 한 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 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이생진,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백석의 여인1-자야의 사랑)> 전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첫댓글 차를 타면 휙~ 지나쳐 버리고도 모를 것을 걷는 여행이 길 위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세세히 만나보게 했네요. 여행 계획에 참고하겠습니다. 교수님 뒤따라 함께 걷다온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