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의 날을 벼리며
안면도에서 가까운 적돌만 바닷가에서 유년을 보냈다. 도비산 상봉으로 떠오른 해가 서쪽 백화산으로 저물던 그 자리이다. 서해안 어디쯤에서 헤엄을 치다 보면 백화산 꼭대기로 넘어오던 노을이 시나브로 수평선을 덮었다. 팔뚝에 붙은 소금 더께를 털어내다 보면 초가집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아름다웠으나 표현 방법을 몰랐다. 심약한 가슴이나마 무탈하던 소년 시절이었는데.
6학년 어느 초가을, 그러니까 1968년 9월이 맞다. 아버지가 교실 문 열고 나를 부르시더니 서울행 완행버스에 몸을 밀었다. 그 후 청파동 후미진 그늘에서 셋방 사는 서울 유학생으로 변신하면서 그때까지 몸에 익었던 모든 시스템이 바뀌었다. 야간 중학교에 다니면서 강박증이 더욱 깊어졌다. 배가 고팠다. 연탄불이 꺼지면 무조건 굶었고 올빼미 수업이 끝나면 종로구 무교동에서 용산구 원효로까지 도심지 밤길을 걸어가며 차비를 아끼기도 했다.
더딘 사춘기 때문에 힘이 들던 기억도 있다. 그때 중등학교는 키 순서로 번호를 먹였는데 학년이 바뀔 때마다 앞자리로 배치되었다. 사춘기가 늦게 오면서 3년 동안 달랑 7센티만 큰 것이다. 방학 때 고향에 올 때마다 눈에 띄게 확연해진 벗들의 성장 속도를 보며 두근두근 심장박동을 눌렀다. 가슴이 봉긋해진 고향의 소꿉친구들이 느리게 크는 내 몸을 만날 때마다 갸우뚱했었다. 향수병에 시달리면서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는 대신 날마다 일기를 썼다.
고두리 바다 낚시질 가던 사내
조개잡이 열아홉 여인과
갯벌 외길 비켜서다 맨살 스쳤네
실오라기 안부도 나누지 못한
그 사내, 새도록 막걸리 사발에 몸 담그고
그 아낙, 새도록 뜨개질에 빠지던
격렬비열도 은밀한 사연
심장박동 누를수록 빨갛게 사무치는
- 「해당화」전문 -
스무 살 후반 황산벌 어디쯤 여고의 총각 선생이 되면서 몸이 허공 15센티쯤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대학 시절에 여학생들의 눈길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인기 스타가 된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만큼 할 일이 많아졌다. 풋보리 소녀들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 몸을 다지던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85년 여름, 학교를 쫓겨났다. 무크지 『민중교육』에 발표한 단편소설 「비늘눈」이 필화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해 8월 12일 ㅈ신문에 발표된 내용은 ‘지방대 출신 졸업생이 사립학교에 취업하려다가 금품 요구에 임용을 포기함’이라고 적혀있다. 그게 ‘허위사실 유포이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다’니 어이없는 조작이다. 소도시가 발칵 뒤집혔고 신새벽 구두 발자국 소리와 함께 승용차에 실렸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식이 되던 아침 나는 담벼락 뒤에서 ‘새로 오신 선생님’ 부임 인사를 훔쳐 듣고 있었다.
그대여 우리들이 지쳐 힘이 빠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보자 더욱 멀리 보기 위하여
어깨를 기대보자 다수움을 찾기 위해
낮달로 이어지는 새벽별이 올 때까지
파고드는 온기로 기다려보자
아직도 우리들은 우리이어야 하기에
눈빛에 남아있는 행복을 더듬으며
두 뺨에 남아있는 희망을 떠올리며
그대들의 깡마른 가슴에 불을 지피고
믿음으로 지켜보는 등불이어야 한다
- 시집 『유년일기』의 「믿음을 위하여」 부분 -
해직 교사가 되면서 몸의 구조가 공격형으로 바뀌었다. 나이 서른, 그제야 지하실에서 유인물을 만들고 거리의 스크럼에 끼어 목청을 올렸으니 늦깎이 운동권의 입문이다. 마침내 신군부 정권의 철옹성이 무너지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던 날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맑을 수 없다’며 확신도 했다. 3년 8개월 만의 복직을 하면서 바뀐 몸값을 체감하던 즈음까지이다.
두 달 후 1,550여 명의 스승들 목이 우수수 날아갔다. 교사가 노동조합을 세우는 게 불법이므로 각서를 쓰면 살려주고 끝까지 버티면 목을 날리는 황당 사태였다. 그날 밤 초인종이 울렸고 멀리 서산에서 택시를 타고 오신 부모님과 하급 관료와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죄다 들었다. 만들어진 문서에 도장 찍는 스크린을 벽 너머 떠올리며 나는 술에 취한 채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두 번째 해직은 피했는데.
출항의 닻 올려도 손수건을 흔들지 않는 그대
고깃배 따라간 사람들 그믐달로 돌아오더라도
분연히 일어서지 못하는가
버릴 수 없는 그런 갈망의 그림자들이
제련소 굴뚝마다 무시로 눈물 솟구쳐서
기적소리 터칠 때마다 기우뚱거리기도 하면서
- 시집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를 찾는다』의 「군산횟집 앞에서」 부분 -
단두대에 목을 몇 차례 내민 건 부채를 털겠다는 부담 때문이다. 글쓰기보다 세상을 바꾸는 게 먼저라는 당위성이었다. 밤마다 어금니 갈아마시며 징계위원회에 세 차례 출두했다. 언제라도 학교를 다시 떠날 수 있다는 긴장의 나날이 이어지면서 날마다 기도를 했다. 신호등 앞에서나 햇살을 받으며, 더러는 통근 버스 안에서 두 손을 모으며 심장을 다독다독 다스렸다.
그 와중에도 아들과 딸이 무럭무럭 성장했으나 감사한 일이다. 집회 현장과 숙직실, 회식 자리까지 따라다니며 고사리손에서 망아지 발굽으로 달궁달궁 몸을 키우는 것이다. 특히 도서관이 가장 가성비가 좋은 공간이었다. 나중 얘기지만 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 아빠 따라 도서관에 많이 다니면서 책 보는 게 익숙해졌다’라고 회고해주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싱크대 틈새기로 빠져버린 참기름 병뚜껑 그 사소함에 온 세상 우지끈 뒤집어지는 사태일 뿐이다 동굴 속에 안주하던 온갖 잡동사니들 ‘틈입자 빗자루’와 맞붙으며 아우성이다 먼저 썩은 행주 조각이 모서리에 발목 묶인 채 안 된다 나갈 수 없다며 이를 옹문다 이번에는 식칼로 바닥 긁기다 사이다 병 뚜껑이 뽀얀 먼지 뒤집어쓴 채 ‘아아, 형광등은 너무 눈이 시려요’ 옷고름 부여잡고 얼굴 붉힌다 마지막으로 효자손 갈퀴질이다 찌그러진 볼따구 지줏대 삼아 치켜 올린 둔부 색깔이 빨갛고 검은 짬뽕빛이다 모가지 힘줄 때마다 우두둑 이를 갈지만 녹슨 젓가락 하나 토해냈을 뿐 딸깍딸깍 밀려만 가는 병뚜껑
동트는 새벽, 밥고리 찾아 출근길 허발나게 달리자 삼월 아침 하늘 뚜껑이 열려 대설주의보가 내렸던 날이다
- 시집 『꽃이 눈물이다』의 「꽃샘눈」 전문 -
한때 도서관 중독자가 되려 했다. 머리로 안 되면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지론으로 몸을 의자에 붙이고 엉덩이 싸움에 돌입했다. 고스톱, 당구, 영화, 여행, 운전, 핸드폰을 베란다 너머 던져버려야 내가 산다고 믿으며 또 실제로 바쁘게 움직였다. 문어발 뻗어 집안 살림도 챙기면서 도서관과 쏘주잔만 옆구리에 끼고 살던 시절이다. ‘불안을 머금고 약진하는 자본주의’ 시류에서 그나마 밀폐된 자부심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문제는 소통이다. 언제부터였나, ‘자신의 몸 만들기’에 몰입하다가 벽을 만났고 더러는 단절의 실상을 쓸쓸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랬다. 나의 지난한 사연들은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기도 했고 더러는 무너지는 절망으로 길을 막았다. 그럴수록 글과 합체하는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난경을 활자로 풀어내는 과정은 쓸쓸하면서도 실상을 디테일하게 음미하는 특권이었는데.
자 덤벼라 자신만만 포즈 잡다가
가로등 그림자에 막혀
꿩처럼 머리 박고 엉덩이 돌리는 변신의 귀재
그러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세상을 뒤집는 기형 물건
심장박동 횟수가 1초에 지구 세 바퀴는 돈다
그래서 인류를 둘로 분류하면
하나는 호모사피엔스이고
하나는 호모중딩사핀엔스가 된다 할 말 있나?
- 청소년 시집 「호모중딩사피엔스」 부분 -
나는 초로가 되었다.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흐르더니 등이 굽고 머리칼 빠지는 사이에 알파고가 인간의 뇌를 삼켜버렸다. 어른들은 빨간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클략숀 빵빵 누르며 분노를 터쳤고 아이들은 스마트폰 그물망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내가 첫 발령 때 가르쳤던 소녀들이 수탉 같은 장년이 되었는데 바로 그네들의 아들딸들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세월의 간극을 메우느라 밧줄을 당기다가 문득 ‘늙었다’라는 상념이 머리를 딱 때렸다.
그러면서 ‘청소년 시’를 떠올렸고 계절 내내 매달렸던 게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또 이상했다. 글판 수십 년의 새로운 시도로 봇물처럼 쏟아지던 감성이 시집 한 권으로 완성되는 찰나 모든 감성이 절벽처럼 끊어진 것이다. 샘물처럼 솟던 문장 사태가 꽉 막혀버렸으니 조화스런 사단이다. 깊은 사랑이 사위여 가기 전에 다시 한번을 벼르기도 하면서.
마을에는 바다가 있었다 격렬비열도에서 가장 가까운 리아스식 해안은 그림자끼리 꾸불텅꾸불텅 커다란 호수처럼 출렁거렸다 이 세상 모든 바다가 옆구리처럼 붙어있는 줄만 알던 즈음이다 세 살 많은 동급생 최윤희네 뒤란이나 딸부자 김재련에 마당에도 파도가 흰 이빨을 드러내었고 소년의 외갓집이나 당숙네 대밭에서도 언덕바지만 넘으면 해당화 홍자색이 하늘로 번 지곤 했다 망둥이 잡던 악동들 겁도 없이 고두리 해안선까지 개헤엄 내기 걸 때마다 외톨이로 쪼그려 앉아 조마조마 구경하던 물빛 풍광이다 푸른 빛 맞닿은 저쪽에서도 누군가가 황혼의 파도 울멍울멍 바라볼 것 같아 소년도 똑같은 자세로 웅크려 있어야 했다 나는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진 줄 알았다
- 시집 『사랑해요, 바보몽땅』에서 「바다라는 이름 전문」 -
해마다 책을 내면서 언제부터였나, 스무 권을 훨씬 넘겼다. 36년 훈장의 마감인 정년퇴임을 의식한 면도 있지만 조급증 탓이 더 컸을 것이다. 그랬다. 책을 출간하고 일정 시점이 지나면 또 새로운 출산에 대한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결혼 생활의 절반 이상을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새벽마다 도서관 면벽 두 시간을 거친 다음 출근을 했다. 쏜살처럼 흐르는 세월에 그런 식으로 끼어들며 보내는 게 지당한 줄만 알았다.
늙은 아낙 틈에 끼어 호미질하던 사춘기 복자는
방통대에 진학하여 시인이 되겠다는 금자는
짝사랑 쪽지 아홉 통 받고도 가슴을 열지 않던 새침떼기 미순이는
방직공장 삐라 뿌리다가 퇴학당한 부설 학교 금자는
세숫대야에 화염병 나르던 탈춤반 아연이를 떠올리며
(중략)
오피스텔 성매매하다가 함정단속에 걸려
옷 입을 동안 나가 계세요 방심한 사이
12층 베란다에서 통째로 알몸 던진 그미
대밭집 명희가 틀림없다 꺼이꺼이 울던 새벽이었던가
- 시집 『다시 한판 붙자』의 「라떼는 말이야」 부분 -
빙하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흙바닥에 엎드린 채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밤 기차 소리와 함께 전신주가 스쳐 지나갔고 미루나무에 오르던 봄물들이 어느새 늦가을 낙엽으로 뚝뚝 떨어졌다. 지금은 고희의 문턱을 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이니 빛의 속도로 흐르는 세월에 발목을 걸고 싶은 것이다. 벗들이 떠날 때마다 스마트폰 번호를 지우는 몸짓도 지금은 익숙하다.
등이 굽고 잇몸이 흔들리더니 인생의 시계추 밤 아홉 시 언저리이다. 한반도에도 열한 명의 대통령이 바뀌면서 이제는 ‘아, 내가 그들보다 늙었다’는 상념으로 몸을 새롭게 성찰한다. 서두를 일이 없다면서도 밤마다 고희의 날을 벼리는 것은 타고난 체질 탓이다. 배추 뿌리 뽑아낸 자리마다 억새꽃 하얗게 날리는 계절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