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순교자들
●1885년 4월 5일,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는 미국을 출발한지 6개월여만에 인천항에 첫발을 내려 놓았다. 그후 불과 1세기만에 5만 교회와 1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1998년 8월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분포"에 따르면 개신교인 20.3%, 천주교인 7.4%, 불교인 18.3%, 기타종교 0.9%, 무종교인 53.1%로써 개신교인의 비율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제시대와 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한 수난과 순교의 피의 열매이다.
수난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일제의 침략자들은 구한말의 관리를 매수하여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였 다. 일제는 무수한 애국자를 투옥하였고 많은 순교자들의 피 를 뿌리게 하였다. 일제가 한국교회를 말살하기 위한 최초사 건은 "105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05인사건"이란 1911년 악독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찌(寺内)가 압록강 철고의 개통 식에 참석코저 선천역에서 잠시 하차했을 때 암살하려 했다 는 구실로 체포된 자의 수는 151명이며, 2명 옥사, 23명은 석 방되었으나 나머지 123명중 기독교인이 97명이었다.
그러나 1910년 이후의 한국교회는 신앙면에 있어서나 그 수적인 면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찬란한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16명이 길선주 목사를 비롯 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이 이점을 간과 했을 리가 없었다. 가장 비인도적인 박해를 일본은 기독교회에 대해서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 1919년 5월에 일본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손해의 통계 는, 파괴된 교회당의 수가 82棟, 교회재산 손해액 대략 30,000불, 오산중학교 5,000불 이었다. 이것은 일제의 통계 이 기 때문에 사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한 편, 1919년 총회석상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해서 고생을 겪은 장로교인들의 수가 보고되었는데 체포된 목사와 장로의 수가 134명, 교인수는 3,804명, 사살된 신도의 수는 47명이었 다.
한국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일본의 신사참배강요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일제의 신사참배강요가 더하여 갈수록 한국교회안에서는 비록 적은 무리들일지라도 진리를 사랑하고 교회를 파수하기로 결심한 이들이 전국 각 지에서 생겨났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신사 불참배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그들이 당한 고난도 형언 할 수 없었다. 신사불참배운동이 표면으로 노출되자 일본경찰은 1940년 7 월부터 전국적으로 신사불참배 운동자를 일제히 검거하기 시 작했다. 이들은 1945년 5월 18일에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 죄등을 적용하여 중벌이 내려졌으나 이미 순교의 면류관을 쓴 사람도 있었다. 한국교회역사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 간의 하나였었다.
다음은 이기선, 주기철, 한상동, 한부선, 손 양원 제목사들이 신사불참배 운동지도자들이다.
일제말기의 기독교탄압은 교묘한 방법으로 자행되었으며 교회에 대한 탄압은 교회의 페지 혹은 병합과 성경, 찬송에 대한 제재와 예배의 통제 등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인근교회와의 중복을 피하고, 분포지역의 균형을 이루며, 유휴건물의 이용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교회병합을 실시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의 군비조달과 기독교탄 압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이와같은 통폐합이라는 일 제의 탄압정책으로 인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수난을 당하였 고, 전국에서 2백여 교회당이 폐쇠되는 비극을 겪었다. 1943년 4월에는 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였고(의장 金弼淳) 이 교단은 일제의 지령에 따라 성경의 제한적 사용을 주도하 였다.
혁신교단은 이스라엘의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이유로 모세 5경을 내세사상 강조의 이유로 계시록 폐기를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을 폐기토록한 군국주의자들은 기독교 신앙 고백인 사도신경 중에서도 신도(神道)의 창조설화와 위배된 다는 이유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사용하지 못하게하고 천황의 영원사상을 파괴한 다는 이유로 "저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 라"를 고백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미국 과 영국에 대들었던 일본이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교회의 박 해는 형언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1945년 8월 6일에 일본의 나가사키, 히로시 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자 8월 15일 일본천왕은 항복하고 말았 다.
그런데 미국의 일본과 한반도 진주가 늦어지는 바람에 소련이 선수를 쳐, 6일동안 참전하고 38선 이북을 점령하였으며 미국은 5년 전쟁에서 수백만의 인명과 재산상의 손해를 보고도 한반도 남한만을 차지하는 꼴이 되었고, 한국을 분단 으로 이끌어 분단의 아픔, 이념의 갈등 그리고 6.25전쟁의 비극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주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받은 국민전체의 손실과 참화 그리고 기독교회가 받은 비극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공산당에 대항 하던 목사들은 남북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손양원 김익 두 목사를 비롯하여 남궁혁, 양주삼, 송창근 제목사와 신학자 들이 납치되어 순교당하였다.
이 6.25전쟁을 통해 파손,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152교회, 감리교가 84교회, 성결교가 27교회, 구세군 4교회, 기타 교파에서 그 손해는 막심했다.
순교, 납치당한 이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이었다. 다음은 일제 수난시 그리고 6.25전 쟁 때 순교한 자랑스런 한국교회의 수백명의 순교자 가운데서 김익두 목사, 주기철 목사, 박관준 장로, 손양원 목사, 박상건 목사의 순교화를 살 펴보기로 한다.
한국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는 1840년 9월 7일 에 영국 한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1863 년 고향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선교사 로 임명을 받은 뒤 약 두달 후에 결혼하였다. 약 한달 뒤 7 월 21일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의 선교활동은 처음부터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864년 중국에 도착한 후 영국 선교본부에 발송한 편지에 "... 처 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글을 써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가슴 찢은 비통으로 아내의 사망소식을 전 해야 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 : 1866년 여름, 영국 런던교회에서 파송한 토마스목사(Rev. Rovbert J. Thomas)가 미국 상선 제너럴 셔 어먼호에 편승, 천진을 떠나 평양 대동강에 상륙하였으나 선교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순교했다. 문제는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선교회 총무로 있던 선교사와 끝없는 불화로 일시 선교사를 사직하고 청국해상세 관에 통역으로 일하기로 하였다. 이런 전환기에 우연하게도 중국에 곡물을 갖고 보내던 조선인을 만나게 되어 조선내에 서의 천주교 수난을 전해듣게 된다.
여기서 불타는 한국선교 의 염원을 갖게 되고 1865년 8월 드디어 그 세관원직을 그만 두고 선교활동에 나서기로 다시 결심하였다. 1865년부터 두차례 조선상륙을 시도하였으나 중국으로 되 돌아 왔었다. 여기저기 길을 찾아 수소문하던 끝에 결국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교역 희망차 조선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편승하기로 했다.
1866년 8월 9일 출발하여 8월 16일 용강 주영포에 도착한 배는 계속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에 격분한 관군과 군중들은 투석등으로 공격하자 셔먼호는 하류까지 피난했다 가 때마침 홍수로 불었던 강물이 빠지면서 좌초상태에 놓이 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관군의 총공격이 있었고 1866년 9월 5일 셔먼호는 불타기 시작했다.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마지막 글이 1866년 8월 1일자로 쓴 편지 한통에 남아있는데 이에 따르면, '나는 상당한 분량 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한테 환영받 은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올라 희망에 부풉니다... 런던선 교회 이사들이 이 성경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아무런 인간의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 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시인해 주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그러나 그는 환영도 받지 못했고 또 상륙하여 정식 복음 선교를 못하게 될 것을 안 나머지 불타는 뱃머리에 올라서서 마지막 사력을 다하여 전도하였으나, 결국 칼에 맞아서 장하 게 순교하니 그의 나이 26살의 한창 젊음이 무르익는 때였 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었고 동시에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을 역사에 남겼다.
●깡패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 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 16세때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 가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17세가 되면서 상업을 시작 했으나 망하게 되자 술에 젖어 살게 되었다. 그는 술만 즐기 는 것이 아니라 완력도 세어 한다는 싸움꾼도 그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김익두는 소안련 선교사 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를 엉 접하고, 1901년 나이 27세에 세례를 받 았다. 그 후 그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예수 믿으라" 전도하면서 성경을 팔았 다. 이렇듯 열심한 김익두를 소안련 선 교사는 신천교회(信川)개척을 맡겼고 얼 마가지 않아 30여명의 신천교회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리 고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1907년부터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 했다.
그는 이때부터 벌써 부흥회를 인도했고 가는 곳은 많 은 인파로 들끓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곱사등의 허리를 펴주었고, 문둥병 자, 폐병환자, 혈우병자등 신유의 능력이 있어 1만여명의 병 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1943년 김목사는 신사참배를 않는다고 부흥회 인도중 연행 되어 신사 앞에 강제로 세워 사진을 찍고 "김익두목사가 신 사에 절했다고 신문에 선전했다. 그리고는 김목사를 강당에 서 끌어내어 황해도 은율군 어느 과수원으로 보내어 주거를 제한했다. 8.15해방이 되면서 강양욱에 의해 기독교연맹이 조직된 후 김목사를 강제로 위원장에 추대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고 그 해 10월 신천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공 산당이 교회당에 들이닥쳐, 교회 앞뒷문을 포위하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김목사와 임전도사외 청년 3명이 쓰러졌고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는 부흥사로 770회를 인도하고 150여 교회를 설립했으며, 1만여명의 환자가 고침을 받았고, 그로 인해 목사된 사람 이 2백여명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크게 쓰셨던 큰 별, 김익두 목사는 피를 흘리고 죽으며 "하나님 아버지"하며 눈을 감았다.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朱基徹)목사는 1897년 11월, 경남 창원군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부유하여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 한 후 연회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눈병 으로 중퇴했다. △ 주기철 목사 그는 고향 웅천교회 집사로 봉직할 때 김익두 목사의 "성신받으라"는 설교에 감명을 받고 신학공부를 결심하고 1921 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1926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량동교회, 마산 문창교회에 서 큰 역사를 일으켰다. 그는 문창교회 재임시부터 한국교 회의 부흥사경회 초청에 응답해서 가는 곳마다 부흥의 불 을 일으켰으며 한국교회 부흥의 종으로 일컬어지게 되었 다. 급 포 교 리 도 러 굗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주목사는 거금 7만원 을 들여 교회를 건축하였다. 그런데 1938년 9월, 장로교 제 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가결하고 말았다. 이 때 합부만 선교사,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등은 적극 반대하였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는 1938년 2월(1차), 1938년 가을(2차), 1939년 8월(3 차), 1940년 5월(4차)에 체포 구금되어 갖은 고문을 다 당 했다. 다음은 그가 일경에 끌려가면서 교인들에게 설교한 "일사각오"의 5종목의 나의 기원의 요약이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장차 받을 영광은 천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 뿐 이오,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원 영 화의 몸이 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 하였느냐 물으시면 무슨 말 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길 이 있을 따름입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 아, 한국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너에게서 떠났도다.
우뚝 솟 은 모란봉아 통곡하여라. 대동강아 나와같이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미천한 목숨이나마 주님 위하여 제물로 드리리 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누가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 이나 칼이랴. 다른 아무것도 주님 위한 일편단심 변하게 못 하옵니다.
나는 죽고 또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을 사 랑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몸 드립 니다. 인생은 초로와 같이 짧고 의는 영원무궁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을 위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만도 못합 니다. 예수로 같이 죽고 예수로 같이 삽시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 무릇 인생은 죽게 돼 있습 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이 얼 마나 영광되며 자동차에 치어 죽는 자도 있는데 예수 이름으 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예수 위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장기(長期)의 고난도 견디게 하소서 : 단번에 죽임을 받는 것은 누구나 견디겠지만 오랜 고난 속에서 지조를 지키기란 쉽지 않은 것인데 장기의 고난까지 견딜 건강과 용기를 주옵 소서,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당신께 부탁하나이다 : 저는 80 노모 가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으며 세상을 분별하지 못할 어린 자식들이 있고, 길잃은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끝까지 돌보 지 못하고 떠남을 슬퍼하오나 우리 주님 친히 돌봐줄 것을 부탁하나이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 충신도 충의대절(忠義大節) 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데 그리스도의 종되어 어찌 그리스 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주님 위한 일 편단심이 언제라도 변하지 않게 하소서.
그 후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 모진 고문으로 안질이 다시 악화되고, 폐와 심장이 약해져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주목사는 병감에서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 소서"하는 기도를 끝으로 1944년 4월 21일 숨을 거두어 하나 님 품으로 돌아 갔다.
●박관준(朴寬俊)장로는 1875년 4월 13 일 평북 영변에서 태어났다. 많은 돈을 가진 부호의 아들인 그는 어린시절부터 방탕하여 한때는 병까지 얻게 되었다. 병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 그는 마음 의 안식을 얻기 위해 불교, 시천교에서 3년의 수도생활까지 했으나 마음의 평안 을 얻지 못하고 나중에는 기독교에 입문 하게 되었다. 그후 가장 인간답게 사는길, 예수를 위해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었 다. 그는 의원이 되어 환자들에게 전도하기에 힘썼다. 그런데 박장로는 1935년에 특별계시를 받았다.
"나를 위하여 홀릴자 가 누구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홀리겠습 니다" 이튿날이었다. 조간신문엔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교회가 위 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이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 숭실전문학 교, 숭실중학교, 숭실여학교가 폐교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었 다.
그는 교계는 물론 우가끼(宇垣一成)총독까지 면회했다. 그러나 일인지도자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박장로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미나지(南次部)총독을 면회하 여 결판을 내려고 평양에서 13회나 서울 총독부를 올라갔으 나 면회를 하지 못하였다. 마침 그 때에 그는 모든 종교를 일본제국 숭인하에 신봉할 수 있도록 하는 종교단체법을 상정통과할 것이라는 소식이 그에게 들려왔다. 이때 박장로는 신사참배문제로 선천보성여 학교 교직을 사임한 안이숙(安利淑)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신 학교에 재학중인 아들 박영창과 합세하여 그들의 뜻을 국회 의원들에게 알릴것인가를 연구했다. 아직 국회가 열리기엔 4 일이 남아 있었기에 전조선총독 우가끼 등을 찾아가 신사참 배의 부당성을 알리는 진정을 해보았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 릴 수가 없었다. 1939년 3월 22일 세사람은 방청권을 구입하여 제74회 일본 제국의회 방청석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국회가 사무절차를 밟아 종교법안이 시정될 때, 박관준은 번개처럼 뛰어나가며 손안에 든 대봉투를 아래층 의사당안으로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다" 의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들 세사람이 한국으로 송치될 때 동원된 형사는 50여명 이나 되었다. 드디어 1941년 봄 일경은 그를 치안유지법위반 및 황실불경죄 등의 죄목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시켜 버렸 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도 신사참배 반대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쉬지않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전도를 계속했다. 그는 1945년 1월 1일부터 7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그는 해냈다. 금식 70일째 되는 3월 10일이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난다.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하시면서 성 경도 오늘이 졸업이고 내일은 밖으로 나가서 3일간 가르치고 하나님 앞으로 오라고 하신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금면류관 을 예비하셨다고 말한다" 1945년 3월 11일, 일경은 빈사상태 에 있는 박장로를 병보석하였다.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한 박 장로는 그를 찾아오는 문병객들에게 "신사참배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열심히 예수 믿읍시다." 그의 시신은 평양교회의 공동묘지인 돌박산에 옮겨져 순교 자, 주기철, 최봉석 목사가 묻혀있는 그 옆자리에 안장되었 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孫良源)목사 는 1902년 6월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났 다. 손양원은 칠원보통학교를 다닐 때 궁성요배를 거절했다가 정학처분을 받았다.
●손양원 목사 학교를 중퇴했다. 1919년, 18세때 서울로 올라가 중동중학 교에 입학을 했으나 아버지가 3.1운동에 연루되어 마산형무소에 수감되는 바람에 그러다가 1921년 동경에 건너가 스가모 중
학교에 다녔다. 손양원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1년으로 이때는 신 사참배문제로 많은 고통을 당할 때였다. 1938년 손양원은 신 학교 졸업반 재학당시 제27회 9월총회는 신사참배는 국민의 례라고 가결하고 교직자들이 앞장서서 신궁으로 몰려가 참배 를 했다. 이 참담한 광경을 보면서 손양원은 눈물을 흘렸다. 손양원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여수에 있는 나 병환자 애양원교회로 부임하여 신사참배 반대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외쳤다. 1940년 9월 일경은 부정선인으로 그를 체포했고, 그는 행방되기까지 6년동안을 광주, 서대문, 청주형무소로 이감을 계속했다. 이렇게 신앙 앞에선 어떤 타협도 몰랐던 그였지만 재감중 1945년 4월 13 일 부친 손종일 장로가 별세했을 때 "나는 불효자라"면서 크 게 슬퍼했고, 주기철, 최봉석 목사와 박관준 장로가 순교했을 때 눈물을 흘렸다. 1945년 8월 17일, 손목사는 해방이 되면서 출옥했다. 그는 다시 애양원교회로 돌아갔다. 그러나 1948년 10월 20일 공산 도배들의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순천시내 정치요인, 정당관 계자, 생활이 넉넉한 부자들은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거리 는 시체로 무더기를 이루었고 통곡소리는 하늘에 사무쳤다. 손목사의 두아들 동인과 동신도 부르조아로 몰아 이렇게 총살되었다. "야, 이자식아! 이래도 예수사상 못 뽑아 버리겠느냐? 지금 이라도 예수사상, 예수정신 뽑아버리고 우리에게 협력할 수 있다면 용서할테니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나 동인이는 "내 목을 뽑을지언정 내 신앙을 뽑을 수 없다" "할 수 없다. 쏘아라. 하나, 둘, 셋" "아버지여, 내 영혼 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저들의 죄를..."
동인이는 총소리와 함께 벌떡 뛰더니 피바다와 함께 쓰러 졌다. 이 광경을 본 동신이는 사자처럼 잡혀 있던 사람의 손 을 뿌리치고 달려가서 선지피를 쏟고 쓰러져 있는 동인이를 끌어안고 "형님, 형님, 형님은 이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나 도 형님 뒤를 따라가겠습니다."하고 울부짖더니 반란군과 학 생들을 향하여 "왜 죄없는 자의 피를 흘리게 합니까? 그 죄 값을 어떻게 하렵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 요"하고 외치자, "저놈도 죽이자"하고 폭도들은 어린 동신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탕탕탕탕..." 헤아릴 수 없는 총성속 에 동인이는 그의 형 동인이의 곁에 쓰러졌다.
여순반란 사건은 이내 육해공 삼군 작전으로 진압되었고 그를 죽인 전재선이라는 청년은 체포되었다. 물론 즉결 재판 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할 것이었다. 그러나 손목사는 그를 석방케 했을 뿐 아니라 양아들로 삼았다. 두 아들의 영결예배에서 유족대표로서 인사한 말은 심금을 울린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 느낀 바 은혜받은 감사의 조건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나 같은 죄인의 가통에서 순교자가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성도중에서 이런 보배를 자식으로 주셨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셋째, 3남 3녀중에서 가장 귀한 장차자를 바치게 된 것 축 복 중의 축복입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두 아들의 순교제물로 바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 와석종신해도 복인대 전도하다 총맞아 죽게 되니 어찌 감사치 않으리요. 여섯째, 미국 유학가려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갔으니 안심하고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아들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을 마 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덟째, 두 아들 순교 열매로 많은 순교 자녀 태어나겠으 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역경 중에서도 여덟가지 감사 찾게하시니 감사하 옵고, 열째, 이 큰 영광은 먼저 가신 부모님이 이 아들위해 35~ 36년간 기도하고 교우 여러분이 23년간 기도해준 덕분으로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나서 교인들은 손목사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손목사는 "양무리를 두고 혼자 피난할 수 없다"고 교회를 지키다가 9월 13일 여수를 쳐 들어온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감금 당했다 가 그 달 28일 미평 과수원으로 끌어내어 총살시켜 버렸 다. 그는 공산군의 총을 맞고도 환하게 웃으며 스데반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아버지의 나라로 그 영혼이 옮겨 갔다.
●박상건(朴相建)목사는 1897년 1월 14 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부위렴선교사의 권 면으로 군사 개복동교회 전도사를 시작 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평양신학교에 입 학하여 1936년 제31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목사가 청주제일교회에 부임하 고부터 일제의 신사참배강요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2년후 총회적으로는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니 신사에 절하기로 한 다"고 가결해 버렸다. 총회의결의 파장은 전국교회를 휩쓸었 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하여 끝까지 고난을 참고 있던 진리파가 있었는데 총회는 그들에게 죄짓 는 길을 열어준 격이 되었다. 감리교회는 이미 한발 앞서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상태였다. "세상이 다 썩어도 같이 썩을 수 없다" 이것이 박상건 목 사의 강경한 지론이었다.
그 신념은 그로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였고, 죄목은 천황모독죄, 천황불경죄였다. 박상건 목사는 청주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다. 그는 섬기던 교회 청주제일교회로 돌아가 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친일파 교인들을 시켜 그의 교회 복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내 앞길을 막으니 내 어 찌 청주도성을 지키겠느냐, 나는 만주땅으로 가서 외지선교 에 힘 쓸 것이니 부디 너는 직장생활 잘하며 예수 잘 믿도록 하라"고 은행에 취직해 있는 아들 영회에게 당부를 했다. 박목사는 1939년 4월 봉천노회소속 할빈교회로 부임했다. 당시 한발과 기근으로 먹고 살기가 힘이들자 만주땅에 나가 사는 동포를 구원시키기 위해 만주 주요도시는 물론 몽고지 방에까지 전도인을 파송하고 있었다. 박목사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목회하는 것이 우선은 좋았 다.
그는 할빈교회에서 해방될 때까지 목회를 했다. 조국이 해방되면서 서울로 돌아온 박목사는 교회로 돌아가 지 않고 공무원 시험을 쳐서 서대문 형무소 교무과장으로 재 직했다. 그는 주일이면 대강당의 수형자들에게 복음을 전했 다. 그는 만주땅 하얼빈에서 공산비적들의 만행을 체험했기 에 자연히 공산당의 만행을 질책했고 반공교육에 힘썼다. 당시 수형자중에는 공산주의자 사상범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박목사가 곱게 보일리 없었다. 그런데 1950년 6 월 25일 남침을 감행한 공산군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가장 먼 저 시작한 일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좌익사상범들 을 석방시키는 일이었다. 이렇게 괴뢰군이 서대문형무소를 접수하면서 박목사는 그들에게 체포되어 감방에 수감되어 옥 살이를 시작했다. 북괴 내무서원들은 그의 아들 박영희장로 도 연행해 수감시킨 후 모진 고문을 계속했다. "지금이라도 좋다. 과거는 묻지 않겠다. 예수를 모른다고 하고 우리 사회주의 공산혁명에 합류하라" 두 부자에게 그 명령은 순교를 받아들이라는 협박이었다.
아버지 박상건 목사와 아들 박영희 장로는 당당히 맞서 싸 우다 9.28수복 당시 종교인 납치 북송계획에 따라 북으로 끌 려가 순교했다. 박목사는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가면서도 아들에게 유언처 럼 "정말 잘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 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호소하였다.
편저자 임명락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