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을 맞이하여 남원을 다녀왔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남원...
참 예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있어서 좋았다.
광한루를 걸어다니며 이야기속의 이도령과 성춘향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연못의 잉어들이 아주 사랑스럽게 헤엄치며 다닌다.
모든 것에 감사드린다.
** 동영상의 배경음악은 "안숙선 명창의 춘향가 중 쑥대머리, 사랑가" 이다.
*** 임방울(林芳蔚)
* 출생 : 1904, 전남 송정 |
* 사망 : 1961. 3. 10, 서울 |
* 국적 : 한국 |
< 요약 > 판소리 명창.
임방울(판소리 명창, 고창판소리박물관)
본명은 임승근(林承根), 임방울은 예명이다. 14세 때 광주에서 박재현에게 〈춘향가〉·〈흥보가〉를 배웠고, 후에 구례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적벽가〉를 6년간 배웠다. 25세에 상경하여 김창준·송만갑의 소개로 무대에 올라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불러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에서 취입한 음반 '쑥대머리'는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만주 등에서 100만 장이나 팔렸다고 하며 지금도 그가 취입한 레코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소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맑고 아름다운 성음에 성량이 풍부하여 막힌 데가 없는 통성이었다. 창극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창극운동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고 판소리의 전통을 지킨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판소리 5마당에 모두 정통하나 특히 〈춘향가〉 중 옥중가 대목의 '쑥대머리'와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이 장기이다. 단가 〈호남가〉를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소리는 박귀희·한애순·김용준 등이 이어받았다. 2000년 10월 20일 문화의 날을 맞아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 안숙선(安淑善)
* 출생 : 1949. 9. 15, 전북 남원 |
안숙선(安淑善),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 인간문화재이다.
안숙선은 예인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이 어머니의 사촌이며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이 그의 외삼촌, 태평무 인간문화재인 강선영이 그녀의 이모다. 이로 인해 안숙선은 어려서부터 전통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모인 강순금에게 가야금 풍류를 배우면서 국악에 입문한 뒤 주광덕·강도근과 같은 명창에게 판소리 여러 대목을, 또 강순금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우고 각종 공연에 참가해 남원에서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19세에 상경해 김소희에게 판소리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우면서 대명창 문하의 판소리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어 박봉술에게서 〈적벽가〉를, 정광수에게서 〈수궁가〉를 배웠으며 정권진·성우향에게 판소리 5마당을 이수하면서 그 뒤로 〈춘향가〉 5회, 〈수궁가〉·〈적벽가〉·〈흥보가〉 각 2회, 〈심청가〉 1회 등 숱한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거뜬히 치러낼 만큼 탄탄한 실력을 갖추어갔다. 안숙선이 일반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도 1986년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오정숙·박동진 등만이 해낸 판소리 5마당을 이때부터 차례로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타고난 좋은 성음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일약 창극 명인으로 자리잡았고 수많은 작품에서 주인공 역을 했다. 그녀는 판소리, 창극, 가야금 병창 외에도 가야금 산조, 구음시나위, 설장구 솜씨도 뛰어나다. 안숙선은 1997년 8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아닌 가야금 병창(자신의 가야금 반주에 판소리 한 대목 또는 단가를 얹어 부르는 것)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은 것이다.
안숙선은 이후에도 1999년 수궁가, 2000년 적벽가, 2001년 심청가, 2003년 흥보가, 2005년 적벽가 완창 무대를 가졌고, 창무극 〈춘하추동〉 연극 〈태〉등에도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녀는 국내 무대뿐만 아니라 아시아, 북남미, 유럽 등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면서 한국의 소리를 세계에 전파했다.
1997년 안숙선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98년 용인대학교, 2000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프랑스문화부 예술문화훈장(1998)·옥관문화훈장(1999)을 받았다.
** 신영희(申英姬)
신영희(申英姬)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태어나 11세부터 6년간 아버지 신치선에게서 〈춘향가〉와 〈심청가〉, 〈수궁가〉 등의 마디소리를 배웠다. 신치선은 담양 출신으로 판소리 명인이면서도 진도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던 판소리 선생으로 유명한데, 소리에 재능을 타고난 딸을 위해 신영희가 12세 때 당시 소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던 목포로 이사했다. 신치선은 신영희가 17세 때 작고했다.
14세 때인 1955년 안기선의 문하에 들어가 3년 동안 〈적벽가〉와 〈춘향가〉의 마디소리를 배웠으며, 15세 때 최일환에게 가야금 병창과 판소리 〈안중근사기〉를 배우기도 했다. 또한 20세 무렵까지 장월중선과 강도근, 김성곤, 김상용 등에게 판소리 〈춘향가〉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등을 배웠다.
1963년 아세아민속예술제에 참가해 창악부 최우수상을 받고, 같은 해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서 신인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목포중앙극장에서 5시간 30분 동안 〈춘향가〉 전 바탕을 공연했는데, 이 공연이 계기가 되어 1975년 서울로 올라와 김소희에게 〈흥보가〉와 〈춘향가〉, 〈심청가〉 전 바탕을 공부했고,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김소희의 전수학생으로 선정되었다.
1976년 중앙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면서 다음 해 남원춘향제 명창부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홍콩아세아예술제에 참가했으며, 그 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가 되었다가 1992년 7월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었다.
1979년부터 판소리 공연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참여해 1986년 제22회 백상예술대상 연기 부문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동안 〈춘향가〉와 〈흥보가〉 등의 개인 완창 공연은 물론이고 유럽예술제, 일본 TOGA 페스티벌, 일본 연극페스티벌, 뉴욕 재즈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공연을 했으며, 일본·영국·소련·동남아시아 등 20여 개 나라를 순회공연하며 판소리를 해외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기교보다는 맑은 성음을 중요시하며 소리의 선이 굵고 남성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판소리 음반으로 〈진도 씻김굿〉·〈진도아리랑·만가〉·〈뱃노래〉(2000)와 〈홍보가〉·〈육자배기·흥타령〉(2003) 등을 취입했다.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1999년 〈이거이 참말 전라도 음식이여〉, 2001년 〈신영희의 전라도음식〉을 발간했다. 화관문화훈장(2005), 제2회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 대상' 전통문화부문 대상(2010)을 수상했다. 2003년 판소리를 전공하는 소리꾼들 사이에서 부전공처럼 취급되는 남도민요를 분리하여 민요 자체의 멋과 흥을 보급하고 전문화시키기 위해 사단법인 남도민요보존회를 창립했다. 2011년 현재 신영희 국악연구소 대표 및 (사)한국국악협회·(사)판소리보존회 이사, 웰컴투코리아 홍보위원으로 활동하며 용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국악과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 쑥대머리
-------------------------- 명창 안 숙 선
1.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에 생각 난것이 님뿐이라 2.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 양 낭군을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봤으니 3. 부모봉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연이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는가 4.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듯이 솟아서 비치고져 막왕 막래 막혔으니 앵무서를 내가 어이 보며 5. 전전반측 잠못 이루니 호접몽을 어이 꿀수 있나 손가락의 피를내어 사정으로 편지 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 볼까
6. 이화일지춘대우에 내 눈물을 뿌렸으니 야우문령단장성에 비만와도 님의 생각 추우오도 염락시에 잎만 떨어져도 님의 생각
9. 녹수부용의 연캐는 채련녀와 제룡망채에 뽕 따는 여인네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이라 날보다는 좋은 팔자 10.옥문 밖을 못 나가니 뽕을 따고 연캘거나 내가 만일에 님을 못보고 옥중 고혼이 되거드면 무덤 앞에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것이요 무덤 근처 섰는 나는 상사목이 될것이니
11. 생전사후 이 원통함을 알아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아고 답답 내일이야 이를 장차 어쩔거나 그저 퍼르고 울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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