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과 평촌
-옛 주인은 나가고 벌말에 새 주인들 들어와
‘새터’란 이름의 마을이 전국에 무척 많다. 한자로는 대개 신기(新基), 신대(新垈), 금대(金垈)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 마을들이다.
처음 한두 집씩 들어선 것이 나중에 마을 형태를 이루어 새로운 마을의 터가 되었다는 뜻으로 ‘새터’란 이름이 되곤 했다.
□ 오랜 옛날 온통 물바다였다는 달안이 일대
‘새터’ 마을은 대개 들 가운데에 있어 국토 개발에 따라 자주 변화의 바람을 타곤 했다. 그 가까운 어딘가에 큰 도시가 들어서면 이런 마을은 이내 그 도시의 확장 계획선 안에 포함돼 들어가고 만다. 이렇게 해서 또 다른 의미의 ‘새터말’로 변한다.
안양시 호계동의 ‘새터(新基)’ 마을이 평촌지구 개발 계획에 따라 또 다른 뜻의 ‘새터(새 아파트 단지)’가 된 것도 그 한 예가 된다.
이 지역은 본래 과천군 하서면 지역으로서 '범내'라고 했던 곳이다. 안양천 지류가 길게 뻗어 있어 원래 ‘벋내’였던 것이 ‘번내’로 되었다가 ‘범내’로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호계동의 '호계(虎溪)'는 '범내'를 의역해 나온 이름.
이 곳의 새터 북쪽은 10여 년 전만 해도 논만 있는 벌판이었다. 그 너른 벌판엔 ‘달안(達安)’이란 마을 하나만 있었을 뿐, 들 가운데서 일을 하다가 비를 만나도 이를 피할 움막 하나 없었다. 그래서 들일을 하다가 비가 오면 피할 도리가 없어, 들에 나가는 이들이 늘 삿갓을 갖고 다녀 ‘삿갓들’이란 들이름까지 나왔다고 한다.
원래 '달안동'이란 이름을 낳은 ‘달안’은 들의 안쪽이란 뜻의 순 우리말로, 이 땅이름은 ‘들 안쪽 마을’이란 뜻이었다.
이 곳은 지대가 낮아 물이 잘 안 빠져 땅이 너무 질었단다.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그래서, 외지 사람들도 들어와 살아 보려고 했다가 땅이 나무 질어 못 살겠다며 달아나듯이 나가 버린다고 해서 '달안이'라고 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한다.
지금은 온통 아파트촌으로 변모한 이 지역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비닐하우스가 군데군데 있었던 너른 벌이었다. 지대가 워낙 낮아 한번 비만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는 이 지역엔 믿기지 않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왔다.
□ 물바다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하나
오랜 옛날, 며칠을 두고 비가 퍼부어 이 일대가 온통 물바다였단다.
마을 사람들은 물을 피해 각자 그 근처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산들이 봉우리 끝부분들만 조금씩 남기고 모두 물에 잠겼었단다. 나중에 물이 빠져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피해 올라갔던 산 얘기를 하더란다. 그러나, 과장이 심했던지 물 밖에 나온 산봉우리가 겨우 관((冠)만큼이었다느니, 술잔만이었다느니, 모래만큼이었느니 하는 이야기였단다.
사람들은 그 때부터 그 산들에 이름을 붙였는데, 관만큼 나온 산은 '관악산'이라 했고, 술잔만큼 나온 산은 '수리산', 모래만큼 나온 산은 '모락산'이라 했다고 한다. 믿을 수는 없지만, 참으로 재미있는 땅이름 유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달안이벌에서 보면 북쪽 삼성산에서 뻗어내린 지맥은 들 쪽으로 완만한 비탈을 이으면서 학의천 앞에서 숨을 죽이는 모습이다. 그래서 늘어진 뫼의 뜻인 ‘늘뫼’를 얻고 이것이 ‘날뫼’로 변해 날아가는 산의 뜻의 한자말 비산(飛山=비산동)을 얻는다.
날미는 골짜기 안쪽의 ‘안날미’와 바깥쪽의 ‘밧날미’로 구분돼 있었으나, 지금은 아파트가 이어져 들어서서 한 마을처럼 되었다.
비산이 산쪽인데 반하여 평촌은 벌쪽에 해당한다. ‘들말’이란 뜻의 평촌(平村)은 완전히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호계동은 ‘새터’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 곳이 대단위 택지 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됐을 때 평촌-비산-호계-관양동의 650여 농민들은 농토를 내어주고 정부가 다른 곳에 마련한 대토(代土)를 찾아 떠났다.
그런데, 이 곳을 떠나는 이들의 섭섭함과 허전함을 땅이름이 미리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날미’의 ‘날’은 ‘나갈(出)’이고 그 근처 ‘갈미’의 ‘갈’은 ‘갈(行)’의 뜻을 담은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고장 농민들에게 있어서 ‘날미-갈미’는 좋은 의미의 땅이름은 아니었다.
‘날-갈’이 나간다는 뜻인데 반하여 ‘들’은 그것의 상대적 의미인 ‘들어옴’의 뜻이 된다. 평촌은 ‘들말’이니 이 뜻을 여기에 붙여 보면 ‘들어올 마을’의 뜻이 되어 새 주택 단지가 될 것을 미리 마련해 주었던 셈이다.
이 곳의 땅이름 ‘날미’, ‘갈미’, ‘들말’ 등은 결국 인구의 이동을 예고해 온 것이다. //
□ '안양'이란 이름 자체가 '번영' 불러와
달안, 비산, 호계 등의 지역을 안은 안양은 지금은 상당한 인구의 시가 되었지만, 6·25 직후까지만 해도 경기도 11시, 19군의 하나였을 뿐이다.
안양 일대는 옛날 과천군의 지역으로, 과천 읍내 서쪽이면서도 아래쪽이 되어 '하서면(下西面)'이라 하여 일동, 이동, 도양, 호계, 발사, 석장, 안양, 후두미, 장내의 9개 동리를 관할하였었다.
그런데, 일제 때인 1914년 4월 1일, 전국의 군면을 통폐합할 때에 상서면(上西面)의 일동, 이동, 내비산, 외비산을 병합하여 서이면(西二面)이라 해서 시흥군에 편입하여 일동, 이동, 비산, 호계, 안양의 5개리로 개편 관할했다. 즉, 당시엔 안양이 시흥군에 속한 하나의 리(里)에 불과했다.
그런데,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을 안양면으로 고치고, 그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인 1949년 8월 15일, 안양면은 읍으로 승격해 안양읍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안양시로 승격되었다. 한 개의 리였던 안양은 이처럼 면이 되고 읍이 된 후, 시까지 올라선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안양'이란 이름 자체가 애초부터 도시를 이룰 만한 기운을 품고 있었던 듯싶다.
'안양(安養)'이란 땅이름은 글자 그대로 '편안하게(安) 성장함(養)'의 뜻이기 때문일까? 어떻든 발전의 가능성을 가득 안은 이름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