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기
지방 대학 강의 때문에 월요일 아침마다 기차를 탄다. 지금도 설레는 마음을 차창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면 묘한 해방감과 함께 만감이 교차한다. 멀리도 끌고 온 세월의 조각들을 훌훌 털어버리면 유리창에 어리는 꿈 많던 소녀 시절.
시골 중학교 운동장에서 뛰놀던 우리들은 귀를 찢는 기적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괴물처럼 달리던 까만 동체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파란 하늘 한 자락 걷어내고 저 멀리 사라져가는 기차 꽁무니를 쫓으며, 나도 이다음 커서 저 기차를 타고 어디든지 가고 싶은 꿈에 부풀었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그 증기차 대신에 산뜻한 디젤 기차가 쾌적하게 미끄러지고 있다.
오늘 몇 시간 돈을 지불하고 얻은 나만의 공간, 홀가분한 열차의 혼자 여행은 독서와 사색에 최적이어서 책을 펴 읽으면 이상하리만치 머리에 잘 들어온다. 이따금 수상이 떠오르면 노트에 메모도 하고 졸음이 오면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창밖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사계절과, 아침과 저녁, 그리고 맑은 날과 흐린 날, 또 눈비 내리는 날 등 눈익은 자연 풍경은 계절 따라, 일기 따라, 시간 따라 창틀 액자 속에 수시로 다른 동양화를 그려준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는 차분한 겨울 풍경에 매료된다. 가진 것 다 털어주고 말없이 누워 있는 텅 빈 겨울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어진다. 겨울은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은 계절이다. 덕지덕지 껴입은 위선과 가식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나목처럼 서서 순수의 붓으로 자연을 그려본다.
화선지를 펴놓은 것 같은 넓은 하늘에 거무스름한 녹색의 상록수들이 멀어짐에 따라 암자색이 되는 그 미묘한 묵색의 변화는 묵화의 극치가 아닌가.
눈앞의 다묵색이 점점 청묵으로 번져나는 선염법(渲染法)도 오묘하다. 그 몽롱한 공간에 어우러진 마른 나뭇가지들을 갈필(渴筆)로 쳐보지만 오늘의 내 붓끝은 어찌 그리 둔할까. 빈 들에는 가을걷이 뒤에 떨어진 곡식, 이삭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환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직장을 잃고 하루벌이 일자리를 찾는 이 땅의 이삭 줍는 사람들이.
몇 해 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에서 감명 깊게 감상했던 장 프랑스와 밀레의 '이삭줍기'와 '만종'의 대형 그림이 그대로 창밖에 펼쳐진다. 땅에 엎드려 이삭을 줍는 세 농촌 여인의 힘들고 고단한 모습이.
경건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 밑에서 자란 밀레는 소박한 신앙을 나타내는 한때의 정경을 할머니의 추억을 되살리면서 화폭에 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없는 자에게 내리신 하나님 축복, 어려운 처지 가운데서도 피어오르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잘 묘사된 그림 속에는 따뜻한 기독교 사랑이 배어 있었다.
구약성경의 모세 율법에는 추수하는 자가 고아, 과부, 이방인, 나그네, 극빈자를 위해 이삭을 줍게 하고 곡식의 일부를 남겨 놓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룻기'에도 이삭 줍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매일 이삭을 주워 홀시어머니를 공경하는 착한 과부 룻을 가상히 여긴 땅 주인이 곡식단에서 일부러 조금씩 뽑아서 땅에 뿌려 그것을 줍게 했다는 것이다. 그 은혜로 룻은 식구들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흐뭇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땅의 이삭줍기 모습은 가슴 아픈 정경이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애타는 모습들. 우글거리는 노숙자들, 실업자들의 모습 속에 사업 실패로 실의에 빠진 조카와 일자리를 찾아 나선 동생 모습도 아른거린다.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지만 그들이 주울 지스러기가 얼마나 있는 걸까. 이 땅에 조금이라도 곡식을 떨어뜨려 놓은 가진 자의 온정이 있는가. 나만 있고 우리가 없는 사회, 서로 믿고 주는 나눔의 이웃 사랑이 메말라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은 아침과는 달리 소란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핸드폰의 통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더욱이 좌석이 없는 승객들이 통로를 메우고 있어 답답했다. 3시간 연속 강의를 하고 솜처럼 지친 몸을 창가에 기대니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애잔하게 가슴을 적신다.
옆에 구겨져 있는 신문을 들고 읽는다.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 각계각층의 온갖 비리와 만연된 도덕불감증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2백만 명이 넘는 실업자와 결식아동들의 증가, 이러한 경제 불황의 찬바람 속에서도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의 간격만을 넓힌 채 IMF 1년을 맞이하고 있다니, 이 어이없는 어두운 기사들로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어느덧 창밖은 어둠이 짙게 깔리고 거울이 된 차창에 비친 내 얼굴 뒤로 동생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 옛날 내 등에 업혀 곧잘 잠든 순한 얼굴이 이제는 업어줄 수도 없이 장성해버린 나보다 큰 동생 얼굴이.
어제도 찾아온 동생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먹이고 시린 등을 다독거려주는 일밖에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나 자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동회로, 구청으로 다니며 공공 근로사업에도 참여해 보지만 하루살이 이삭줍기 같은 임시직마저 금방 바닥이 나고 만다고. 그나마 그 일도 하루 일당을 벌어야만 끼니를 잇는 어려운 처지의 연장자에게 양보하게 된다면서 동생은 신문의 구직 광고란을 보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 암담한 현실이 어찌 동생 한 사람뿐이랴.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젊기 때문에 오늘도 땀 흘려 일할 기회를 찾아 나서고 있지 않는가. 언젠가는 그들이 줍는 한 알의 이삭에도 싹이 틀 날이 올 것이고 겨울 들판에서 분명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삭줍기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므로.
- 고임순 -
첫댓글 이삭줍기가 그 이삭줍기였음을....
스토리도 어쩜 그리 잘 엮어내는지 고림순님은!
늘 지루할 새 없이 읽곤합니다
글 잘쓰는 분들은 재능이 탁월한 분들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