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광장은 그리스 Agora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Forum, 중세도시의 Place로 계승되어 왔으며, 지금도 도시 공간의 핵심에 위치한다. 광장은 종교, 정치, 사법, 상업, 사교 등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시민들의 사회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시민의 편의에 의해서 특별하게 조성된 광장이 없었다. 단지 넓은 공터와 길이 광장의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도시에는 길은 있으되 광장은 없었다고 말해질 정도다. 하지만 형태와 기능은 달랐지만, 광장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광장은 청동기 시대 주거지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 광장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1%2F7%2F18%2F232%2F10px.jpg) 청동기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마을을 만들고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고인돌을 만드는 등 공동 작업을 함께 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마을 공동의 행사를 통해 서로간의 일체감과 소속감을 고취시키고, 내부 갈등과 이웃 간의 분쟁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행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간이 필요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주거 유적지인 부여 송국리 주거 유적지(기원전 8~7세기경)를 비롯해 울산 천상리, 울산 교동리 등 다수의 유적지에서 마을 광장을 볼 수 있다. 제주도 최대의 마을 유적지인 삼양동 선사유적지(기원전 1세기경)의 경우는 집회용 화덕시설을 중심으로 작은 광장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많은 움집들이 둥그렇게 들어서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집집마다 취사를 하기 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함께 모여 공동의 노동을 하고, 생산물을 분배하고, 의식(儀式)을 치르는 곳으로, 공동으로 이용하는 땅인 광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생활의 중심 공간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의 광장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1%2F7%2F18%2F232%2F10px.jpg) 신라의 제 3대 임금인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 24~57) 5년(서기 28년) 신라에서는 왕녀 2사람으로 하여금 6부의 여성을 둘로 나눈 뒤 편을 짜서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길쌈 짜기 경기를 주관하게 했다. 이때 여성들은 매일 아침 큰 부(部)의 마당(廣場)에 모여 밤 10시까지 공동으로 노동을 하며 길쌈을 짰다. 길쌈 짜기 경기가 끝난 후에는 함께 노동의 기쁨을 만끽하며 온갖 놀이를 즐기는 행사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추석(秋夕)의 기원이 되는 가배(嘉俳)였다.
삼한(三韓)의 각국은 5월 씨뿌리기를 시작으로 10월에 모든 농사일을 마친 후에는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때 떼를 지어 모여서 술을 마시고 밤낮으로 춤과 노래를 즐기며 놀았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면서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는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천(祭天)행사는 누구나 함께 참여하는 행사였다. 고구려의 제천행사 동맹(東盟)은 국중대회(國中大會) 즉 나라의 큰 모임이었다. 제천행사에는 왕과 귀족, 백성들이 모두 참석하여 신분에 관계 없이 함께 술을 마시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제천행사가 벌어지는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었다. 제천 행사가 끝나면, 전쟁, 외교, 왕위 계승 등 국가의 중대사가 이 자리에서 함께 의논되기도 했다.
이처럼 삼국시대 초기의 광장은 공동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즐기는 곳,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리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