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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시적인 영역과 상상력의 의미 담론
-이민숙 작품론
박철영(시인, 문학 평론가)
나라가 시끄러운 것은 잘되기 위한 진통일 것이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려는 예후라고 본다. 시작은 죄다 소란스럽지만, 나중에는 진정되어 조용해지곤 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탄생의 순간도 그렇고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서로가 다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불통 탓이다. 사회가 추구하는 공동선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혼란스러울 때도 있고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래도 간혹 시가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있어 다행이구나 싶을 때가 많다. 용케도 하고 싶은 말을 해야만 하는 시인들은 잠시도 쉴 새 없이 고뇌의 마음을 표출하곤 한다. 문학은 극단이 아닌 모서리진 경계이거나 허망하게 버려진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함하여 특별하게 영역을 나누지 않으니 인간적인 사유와 본성에 가까운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한 부분에서 왔으니 또 다른 세상을 인정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이민숙 시인은 그야말로 시가 인생이고 목표이고 희망이다. 그만큼 시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말해주는 시인이다. 산과 들을 찾아 돌고 섬과 섬을 찾아 답사하며 사람과 사람을 만나 혜안으로 시적 사물을 탐색하고 상상력을 시로 포착하여 실체화하곤 했다.
파도가 적시는 건
모래의 귓바퀴다
파도가 철썩이는 건 조개껍데기의 혀다
내 발가락에 키스했던 입술이 그립다 하다
파도가 밀고 밀며 그렸던 그림은 구름 한 조각
포르르 부서지는 내 어린 날의 눈물 한 방울
목포에서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들어가 살고 싶어 했던 무인도
잃어버린 야생이 사슴뿔을 세워서 노래로 홀리는 섬
-<파도가 적셔줄 웨딩드레스가 없다> 부분, 《사람의 깊이》27호
웨딩드레스는 아무 때나 입는 옷이 아니다. 남녀가 만나 성공한 사랑으로 결혼을 약속한 때에 입을 수 있는 옷이다. 화자는 섬을 둘러싸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형상을 보며 그들이 닿고자 한 순정한 마음을 따라 걷는다. 거침없이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의 하얀 포말들, 그들이 어루만지고 간 모래알갱이들과 그 어딘가에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말들을 새겨 들었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화자는 해변의 수많은 사연들을 품은 존재들에 다가가지만, 단지 “파도가 적시는 건/ 모래의 귓바퀴다/ 파도가 철썩이는 건 조깨겁데기의 혀다/ 내 발가락에 키스했던 입술이 그립다 하다”라며 감성적 감각으로 전유해 간다. 그 어떤 극단도 존재하지 않는 달콤한 밀어 같은 바다와 섬이 영원히 존재하는 이유를 꺠달아간다. 그것은 풍경의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알기 위해 본래의 순정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잠시의 소란이 영원을 새긴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듯이 “야생, 오늘 길을 잃고 나도 그대를 잃어버린다/ 모래밭을 아무리 걸어도 남길 수 없는 발자국, 원자原子의 길”에서 만난 실재한 존재들을 생각한다. 그 각각의 고유성으로 형성된 저 무한한 것들 속에 간직한 순진무구한 사랑을 생각한다. 그들이 최초로 누군가를 사랑하며 견뎌왔을 인고의 이타적인 본능을 생각한다. “모래의 원자는 짜다/ 포유류의 사랑이 천 년 동안 짜디짠 소금인 것처럼, 심지어!”라며 화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발심일 것이다. 가끔은 홀로 떠 있는 섬에 찾아들어 자연 그대로인 섬처럼 닮고 싶은 때가 있다. 섬만의 독특한 냄새는 무엇으로부터 연유할까?
비릿한 문어발 냄새의 꿈, 첫사랑 아니라도 첫사랑이다
저릿한 몸서리의 햇살, 마지막 사랑 아니라도 마지막 사랑이다
삶의 빛은 윤슬 파도가 아니라도 파도치며 하화도를 애태웠다
열정 그대, 하화도꿈의 파도 속으로 나를 훔쳐 달아난다
나도 달아난다 그대를 훔쳐
두 도둑의 꾼 꿈은 크레타*도 못 말릴 자유의 날개,
파도는 자유를 질투하며 하화도를 후려쳤다
자유는 밤새 보름달을 패대기쳤다
갈기갈기 파도 속에서 찢겨 울부짖던 보름달
눈물만큼씩 말라갔다
그 세월동안 그믐의 빛은 서러웠다
하화도꿈
어둠이다 그러나 달은 썩지 않는다
통발 속에서 몸서리치던 문어의 춤처럼 세속적이다 달빛!
-<하화도꿈> 부분, 《사람의 깊이》27호
바다에서 홀로 그 자리를 지키며 사철 그대로인 청정한 섬 하화도는 천지가 꽃밭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꽃으로 더해주는 하화도는 여수 백야 선착장에서 통통대는 여객선으로 오십여 분이 소요되는 바닷길에 있다. 먼 것 같지만, 그리 먼 것도 아니어서 여행하기 딱 좋은 거리다. 이민숙 시인의 하화도 사랑은 유별하다. 하화도에 관한 시편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한 번씩은 힘든 가슴을 출렁이는 파도에 맡기며 찾아가 가뭇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섬이기 때문이다. 그 하화도를 번번이 찾아갔지만, 깊은 약조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나 ‘첫사랑’이란 절대적인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 그 마음이란 것의 시작은 항상 첫 만남처럼 설렘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아닌 것처럼 언제나 진행형으로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랑의 매력에 빠져든다. “하화도 꿈/ 어둠이다 그러나 달은 썩지 않는다/ 통발 속에서 몸서리치던 문어의 춤처럼 세속적이다 달빛!” 이라는데 어둠 속 바다를 비추며 고아하게 떠 있는 하화도만의 달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떠한 역경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사랑처럼 섬의 이야기이면서 화자가 품어갈 삶의 화두였다. 그런 것을 삶의 일로 연연하지 않겠단 마음일 것이다.
난 열쇠가 없네 아니 있지만 잠그지 않는다네 욕망이라는 열쇠
저 푸르른 하늘의 무한 품이 나를 키웠네 슬픈 붉은 순간 영원으로
그대가 가슴을 잠그고 내게 열쇠를 주었더라도 난 열 수 없거나 열지 않았을 것이네
난 열쇠가 필요 없네
-<장미> 부분,《사람의 깊이》25호
장미는 피기 전부터 아름다웠다. 장미처럼 사람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그럴 때 타자에 의해 각인된 욕망이라는 사슬을 운명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 욕망을 굳이 차단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시시때때로 부딪치며 살아가겠다는 각오가 과하여 발현한 현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무엇도 거부할 이유가 없고 누군가 다가오고 싶어 한다거나 마음을 훔쳐본다면 있는 그대로를 맡기겠단 심사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에 의해 자신을 옥죄기 위해 만들어 놓은 ‘열쇠’가 있다는 것이다. 그 열쇠를 사용할 타자의 욕망은 자신과 무관하다. 만약에 열쇠로 은밀한 곳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장미’의 가시를 디밀어 찌르지 않겠다는 약속마저 해주었는데, 스스로 가시에 찔리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이다. 장미(화자)는 진정으로 이루고자 한 사랑의 유토피아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오직 당신을 위해 존재하므로 “열어줄 필요 없는 그곳에 그대 오시든지 말든지”라며 속내를 밝히는 것을 말미로 미뤄두었다. 생의 절정을 향기까지 품어 핀 장미꽃은 이미 기약된 아름다움의 실현인 것이다. 그 진정한 발현은 당신을 향하고 있음이려니 그래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에 열쇠 따윈 필요 없다는 자유투를 날리고 있다.
고마리 일곱 마리를 불에 구어서 고구마를 함께 구워서 먹는다 설움이 고소하게 웃는다
구절초 아홉 마리를 삶아서 배를 넣고 삶아서 먹는다 불면이 겨우 잠드는 새벽이다
마스크를 태워서 투구꽃을 함께 태워 먹는다 21세기 속을 차릴랑말랑 토사곽란이 멈추지 않는다
시 한편을 흩날리며 허수아비 세 마리를 쫓는다 새들은 날개 깃털을 잉크에 찍어주며 시인을 연민한다
나 잡아 봐라 나 먹어 봐라 사랑이 달아난다 언제나 짝사랑인 파도를 연탄불에 구울 수 없다면 가을은 꽝이다
-<고마리> 부분, 《사람의 깊이》25호
감히 이 세계의 생동하는 것들을 구워 먹겠단 생각을 한 화자다. 그것은 기존의 용인된 방법으로는 마음속의 불덩이처럼 치솟는 기운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궁구한 발상이다. 금관가야의 ‘구지가’에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에서처럼 단단한 결의를 행동으로 행하겠단 강제 의지의 표상이다. 조금은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나름 시적 상상력과 형상화가 맥락을 이끌고 있다. 먼저 ‘고마리’는 봄 물가에 자리 잡고 일찍이 때를 기다렸다 오종종한 꽃을 은은하게 피워낸다. 그 고마리 꽃 일곱을 꺾어다 구워 고구마와 같이 먹고 나니 설움이 가신다는 것으로 봐서 상상적인 사유를 문학으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 ‘구절초’는 색다르게 배와 같이 삶아 먹는 데 그 효과로 화자를 힘들게 한 심정적 불면을 부분적으로 해소시켜 준다. 그렇지만, 안락한 숙면에 들지 못한 화자는 새벽에 눈을 뜨고 만다. 하다 하다 이제 “마스크를 태워서 투구꽃을 함께 태워 먹는다 21세기가 속을 차릴랑말랑 토사곽란이 멈추지 않는다”라는 가혹한 세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와 꽃말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투구꽃의 속말처럼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의 또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이루고자 한 욕망을 다 성취한 것이 아니다. “시 한편을 흩날리며 허수아비 세 마리를 쫓는다 새들은 날개 깃털을 잉크에 찍어주며 시인을 연민한다”에서 완전한 시적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마치 요원한 사랑을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묘한 사람 마음 속에서 꿈틀거린 사랑은 도무지 기미를 종잡을 수가 없어 괴롭다. “나 잡아 봐라 나 먹어 봐라 사랑이 달아난다 언제나 짝사랑인 파도를 연탄불에 구울 수 없다면 가을은 꽝이다”라며 그것마저 훌훌 벗어던져야 할 때가 왔는지 모른다. 아무리 구워버린다고 겁박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인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을 간직한 대상은 당연히 사람으로 표상된 세계이니 깊은 속내를 알 길이 없다. 그 사람의 몸짓을 향한 시선을 몽골 초원이라고 해서 달라질 수 없다3.
길을 찾아 헤매기엔
몽골 천지 너무 넓어라
샤먼도 만날 텐데 원주민도 만날 텐데,
그들의 신은 미로를 헤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지는 오체로구나
징검징검 개울이나 건너보았던, 안내판 아스팔트나 질주할 줄 아는 우리에겐,
깊다는 건 거칠다는 것
오지의 길은 험하고 영롱한 사랑 너머
불꽃 피울 때 망각해버린 용기만이 필 수 점쾌!
-<차탕족을 찾아서-몽골 시편> 부분, 《사람의 깊이》24호
차탕족은 흡수골에서 한참 벗어난 외진 곳에서 순록을 키우며 사는 몽골의 여러 부족 중 하나다. 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끝없이 가야 하듯이/ 당도할 곳이야 들은 것 뿐 꿈결이었는지 까마득”한 그곳을 찾아 나서느라 바쁘다. 사람이 다닌 길이 따로 없는 몽골의 하늘 아래는 말과 양 떼가 길을 만들고 그 뒤를 따라 사람이 이동한다. 존재와 부재가 실재한 초원에서는 언제든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쌓여버린 눈에 길은 눈부시게 지워졌으므로” 말과 양 떼, 그리고 순록이 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찾아 궁리한 생명의 길이다. 순록이 찾아낸 길을 따라 사람은 덤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곧 생의 보장이기 때문이다. 먹어야 살 수 있는 것들을 얻는 것에는 거저란 것이 없어 몽골 초원에서는 부단히 걸어야만 취할 수 있다. 순록과 차탕족의 일생은 살기 위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을 해야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신과 소통하는 샤먼을 찾아가야 한다. 샤먼만이 볼 수 있는 신의 길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태곳적 비밀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몽골은 신비한 초원의 풍경들을 끝없이 펼쳐 보인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은 태초의 소리로 재현된다. 초원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이름 모를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천리 먼 길의 순록과 말과 양 떼를 불러 들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언제나 오지였다. 시간이 무한이 흘러서도 밤하늘의 별처럼 은은한 가슴을 툭툭 터트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은 묵묵히 초원을 건너온 바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눈 덮인 오란터거, 영하 40도 숲속,
뭔가를 먹어야 했다 먼먼 이방인끼리
텐트를 치고 불을 지폈다
꽁꽁 언 손으로 장작을 모아서 모아서
마음을 눈빛을 서로에게 닥칠 수도 있는 위험을
끌어안아서 불을 지폈다
불은 불이며 불이 아니며 불이 아닌 것이 아니다
잉걸불을 보면 맘을 놓았다 뜨거움으로 차오르는 기적
너무도 찬 설원의 숲 아래 더 깊은 하늘강 속에서 내려온
뜨거운 솥 걸터 놓여있다
오란터거 사랑하라 춤춰라 기도하라 인류의 보루
-<장작불-몽골시편4> 부분, 《사람의 깊이》24호
그 바람이 전한 대로 찾아간 몸과 마음은 몽골 초원의 오란터거(‘오란터거’는 몽골 산꼭대기의 분화구)에 있다. 낯선 초원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내는 몽골의 밤이기에 마음이 들떠 있을 테지만, 이국의 풍경을 즐기는 것보다 먼저 안전한 밤을 준비해야 한다. 함께 한 일행과 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을 준비하고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갈 즈음 이방인의 마음은 ‘나’가 아닌 ‘우리’라는 온기를 느끼게 된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몽골 초원에서 “꽁꽁 언 손으로 장작을 모아서 모아서// 마음을 눈빛을 서로에게 닥칠 수도 있는 위험을// 끌어안아서 불을지”펴야 한다. 오롯한 마음을 나눈 것보다 우선인 생존의 문제란 것을 깨달았다. 장작에 붙은 불덩이를 보며 가슴 한 편으로 분출하고 있는 분화구를 본다. 그 안에서 치솟는 불은 단순한 불덩이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갈 초원에서 생명을 지키는 수단이다. 자칫하면 영하 40도의 밤을 견딜 수 없어 영원할 것 같은 초원을 등질 수 있다. “오늘 할 일 하나, 식어버린 순정, 장작에 불을 붙이는 일”이라며 혼신을 다하고 있다.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불덩이가 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것, 가장 큰 설레임 생명은, 얼마나 실낱같은 씨앗의 꼼지락인가
세상사 실實한 것들은 실絲 잣는 엄마의 무릎에서 배시시 깨어난다
내 사랑 천둥 칠 때, 허공은 순간의 번개로 제 허위를 쩍 갈라버렸다
그 소리와 빛, 심연도 요동치게하는 실낱의 황홀이다
찰나라는 실낱, 삶이라는 낱낱, 배고픈 낟가리가 가을 들판에 누워있다
-<실낱같은> 부분, 《사람의 깊이》22호
화자가 찾아간 곳은 마음속 고향 같은 여수 푸른 바다를 품고 있는 하화도이다. “왕부추꽃에 일렁이는/ 청띠제비나비의 투명 날갯짓, 사이 잉걸불처럼,/ 깊은 열락이 실낱의 재료”란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삶이다. 짧은 생애를 잘 버티려고 치열함을 부끄럽지 않게 숨기고 살 뿐이다. 그 소중한 맹아의 시작은 작은 알갱이인 씨앗으로 빌미 된 것이다. 그것의 꿈들이 커져 자꾸만 자리를 넓혀간다. 세상의 일이란 것이 광폭으로 변화하여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 것도 가만 들여다보면 한 가닥의 ‘실낱’으로 기인한 것이다. 그 실낱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치환하여 순수했던 본성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 이상형의 하화도는 여수에서 멀지 않다. “하화도 밭넘 너머엔 별빛 윤슬이 노을의 어깨를 두른 그대 팔꿈치를” 붙잡으며 “하화도 구절초 막걸리 타령은 얼마나 영영 사라질 줄 모르는가, 등대가 실낱같이 반짝이는 것처럼”이라며 심연 속의 상상을 더하여 실재한 하화도를 재현하고 있다. 결국 섬이란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인간의 본성과 동일한 것으로 그 훼손된 심성을 회복해 가는 것이 화자가 말하고자 한 ‘실낱’의 진면임을 알 수 있다. 그 섬은 언제나 드나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길을 수시로 지워버리는 바다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하화도의 새벽은 충직한 머슴
컴컴하게 행궈버리는 새벽파래
도시 쓰레기장에서 히피족들 웃었다는 소문!
새벽 하화도, 새벽 구절초
흰 서러운 애간장을 꽃 피우고 있다
슬쩍 들려오는 햇살의 말발굽 소리
구절초 아홉 마디 꽃잎으로
바람바람 흔들린다
그대여 새벽사랑!
열이레 달의 머리카락에 붙어 흩날리는
절정의 문고리,
열까 말까 비밀일랑가 노랠랑가
어둑어둑 희끗희끗 새벽옹달샘처럼
차디차게 뼛속까지 감미로운,0
범부채 주홍 열일곱 새벽하화도!
-<하화도행 5> 부분, 《사람의 깊이》20호
쉽게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섬 하화도, 찾아가는 마음이 그토록 간절하다면 바다도 어쩔 수 없다. 순정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첫눈에 들었다면 그 순간부터 가슴앓이는 달고 살아야 한다. 그게 사랑이든 삶의 방식이든 모든 것은 그렇게 된 화자가 자초한 것이니 그것도 인생살이의 부분이다. 일찍 뜨는 배편을 알고 있기에 몸이 바빴을 것이다. 첫사랑 순정에 가슴이 달아올랐던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조바심이 눈에도 잡히는 데 그런 속셈을 익히 알고 있는 하화도 선착장 근처 할머니의 손이 바빠졌다. 곧 당도한다는 기별보다 앞서 “새벽뱃고동, 새벽안개 사이로 나그네 쳐들어와/ 도시의 추문을 흩뿌리지만”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어서 어지간한 것에 마음 쓸 일도 아니다. 저 흐리고 혼탁한 마음들의 이방인에게 철판에서 노릇노릇 잘 부쳐진 ‘부추전’에 하화도 막걸리를 담아 환하게 내밀면 그만이다. 사랑도 그런 것, 마음에다 눈 맞추다 보면 서로 오붓해져 가까워진다. 하화도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그대여 새벽사랑!/ 열이레 달의 머리카락에 묻어 흩날리는/ 절정의 문고리”를 여닫는 것은 그대의 눈썹 안으로 흘린 눈물 같은 사랑이다. 촉촉이 젖은 사랑도 애타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열이레 달’ 속에도 본디 보름달 같은 사랑이 가득했으니 더 무엇을 말해야 할까? 그 사랑을 안고 표류해야 할 지점은 우리의 삶 속이어야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다.
지금까지 이민숙의 시를 통해 현재 시점부터 과거를 거슬러 가며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결국은 시와 삶은 밀접하다는 것과 살아온 내력을 고스란히 말해준다는 것에서 몰입해 온 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이제 삼삼오오/ 신산한 공원 그 공원의 빈 의자거나/ 한쪽 빈 바윗돌에서 만나자/ 막걸리 몇 개 차고 와/ 달뜨는 것 바라보고 지옥 슬픔 얘기나 하자/ 쐬주 한잔 하며/ 봉긋 솟는 목련의 숭오리들 같은 것도/ 파헤쳐지는 강 같은/ 죽어가는 노동자의 뼈 같은/ 그 뼛까루처럼 날아오는 황사 같은/ 구제역 돼지 같은/ 그러면서 우리 사이 밀고 당기고/ 거품 내던 시간, 주워 흰 도화지에 담아보자” (<어느 시인의 제안>, 『사람의 깊이』 15집, 2012년)라는 시를 통해 이민숙 시가 지향하고 있는 지점을 되돌아보며 그 문학성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우리가 앓고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한 비평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을 실천하자는 담론이다. 그 당시의 마음이란 것도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정치와 사회가 더 열악해져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 앞서 변화되어야 할 전망들도 호의적이지 않다. 아직도 이민숙 시인이 추구하고 희망한 시간은 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슴 허허롭게 만나 그 가슴속 응어리를 풀고 어깨를 보듬고 환하게 웃을 그 날을 기약해 보지만, 쉽게 올 기미는 없다. 말귀를 닫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제는 더 정교해진 AI가 시인을 대신하여 글을 쓸 것이다. 그들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사랑도 알지 못한다. 다만, 고도한 데이터가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할 뿐이다. 그들은 감성적인 시인보다 더 거친 입으로 그들 만의 말(제품)을 거침없이 쏟아낼 준비를 이미 끝냈다. 그들은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절망’은 아예 없는 것이라며 상품화된 ‘희망’을 쇠뇌하려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문학적인 가치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 면에서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전언하고자 한 이민숙 시가 소중한 이유는 더 명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