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연기와 공주, '새터'에 새 도시가 생긴다
한반도의 허리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차령산줄기의 중간 허리 남쪽 평야 지대에 위치한 조치원은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로 알려진 곳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곳은 예부터 연기군 일대의 중심지였다.
생활권을 작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넓은 평야 지역을 이루어 행정구역의 변화가 그 어느 곳보다도 심했던 이 지역은 한때 청주 땅에 속하기도 했었고, 목천(木川. 지금의 천안시 목천면)의 감무(監務)가 다스리기도 했었다.
□ 연기군의 단 하나의 읍인 조치원
연기군은 본래 백제 '두잉지(豆仍只)'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연기(燕岐)'로 고쳐서 연산(戀山. 문의)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 9년(1018)에 청주에 붙였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목천(木川) 감무가 겸임하게 된다. 조선 태종 6년(1406)에 와서 각립(各立)되었던 이 지역은 그 14년에 전의(全義)현과 합쳐서 '전기(全岐)'현으로 했다가 그 16년(1416)에 와서 다시 갈라서 현감을 두었고, 숙종 6년(1680)에 문의현(文義縣. 지금의 청원군 문의면)에 들어갔다가 그 11년(1685)에 다시 현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 예에 따라 다시 군으로 되어 7면을 관할하다가 일제 때인 1914년에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지금과 거의 비슷한 행정구역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 연기군은 조치원읍과 금남면-동면-서면-남면-전동면-전의면 등 1읍 6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기군의 단 하나의 읍인 조치원읍은 본래 연기군의 북쪽 지역이어서 북일면(北一面)이라 했다가 뒤에 북면(北面)이 되었던 곳이다.
일제 때에 이 지역이 북면의 조치원리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발전하여 1917년 10월에 일부 지역을 서면에 넘겨 주고, 여기에 조치원면을 신설하여 관내를 여럿으로 나누어 따로 동리명(洞里名)으로 정해 두었다. 그 뒤로도 인구가 급속히 늘어난 이 조치원면은 면으로 승격된 지 불과 14년만인 1931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
연기읍내는 조선시대에도 교통의 요지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한양(서울)에서 전라-경상도로 이어지는 큰길이 수원-천안 등을 거쳐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이 연기읍내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은 길을 살펴보면 북으로는 천안으로 가는 길이, 남쪽으로는 금산 땅으로 가는 길이 뻗어 있고, 북동으로는 청주, 남동으로는 보은, 남서로는 공주로 가는 길이 뻗어 있어 5거리 지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곳이 옛날부터 중요 길목이었음은 '조치원'이라고 하는 '원(院)' 이름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교통 기관이 발달하여 전국이 1일 생활권 안에 들어서 길 중간에 하룻밤 묵어 갈 여관이나 호텔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여행객이나 공무(公務)로 일을 볼 사람이 지방을 갈 때 날이 저물면 묵어 갈 만한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길 중간중간에 '원(院)'이라는 것을 두어서 여행객의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
원은 조선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여관이었다. 역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에 흔히 역과 함께 사용되기도 해서 '역원(驛院)'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원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이 왕래하는 곳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보아 이 때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통 사정이 어려운 때에 원은 여행자를 도둑이나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사신 접대와 숙식을 제공하였고, 더러는 지방에서 살림이 어려워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실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조선 후기에는 원이 주막(酒幕) 또는 주점(酒店)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지금 전국에 많이 있는 주막거리라는 땅이름은 대개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원은 여행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므로, 원이 있던 곳은 그 어느 곳보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그 원의 이름이 그대로 땅이름으로 되기도 하였다. 서울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등이 바로 그것이다. //
□ 연기군의 중심지는 원래 남면의 연기리
원이 있었던 마을은 대개 '원터'나 '원골'로 되어 전국에는 이런 이름의 마을들이 무척 많다.
충남 연기군의 '조치원'도 원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그 원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이 어려운데, 지금의 조치원읍 서창리에 '원마루'라고 하는 마을이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 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호천(美湖川)의 한 갈림내에 위치한 조치원읍은 북쪽과 서쪽으로는 차령산맥이 둘려쳐져 있고, 남북으로 길게 시원한 벌판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농업이 크게 성했던 곳이다.
미호천은 충북 음성군 삼성면 마이산((馬耳山)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흘러 진천군과 청원군을 뚫고 나와 연기군 동면 합강리(合江里)에 이르러 금강(錦江)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내는 '미꾸지내'라는 토박이 땅이름에서 나온 이름이다. '미꾸지'에서 '미'는 '물'을 뜻하고, '꾸지'는 '구지'에서 나온 이름으로 충청도 사투리로 '물구덩이' 또는 '못'의 의미를 지닌다. 진천군의 초평면과 문백면 경계에 '우담(牛潭)'이라는 못이 있는데, 아마 이 못 때문에 나온 이름인 듯하다.
조치원읍에서 미호천을 따라 남쪽으로 5㎞ 내려간 곳에 있는 면이 남면(南面)이다. 이 곳이 바로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들어설 곳의 한 중심이다. 거리상으로 조치원읍과는 불과 10리 안팎 떨어진 지역으로, 이 곳 사람들은 일제 때부터 크게 발달한 조치원읍을 자주 왕래해 왔다. 장이나 학교가 모두 이 곳에 있었기 때문.
이 면의 보통리(洑通里)는 본래 연기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보(湺)(웅덩이)가 있는 내가 지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근처의 '잣디(月里=월리)'라는 마을과 봉암리라는 마을의 일부를 병합해서 보통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시킨 곳이다.
본래 연기군의 읍터는 지금의 조치원이 아니라 보통리 바로 남쪽의 남면 연기리(燕岐里)였다.
연기리에는 지금도 연기현 동헌의 터가 있는데,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남아 있어서 옛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 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조선 태종 16년(1416)에 창건하였다는 연기 향교(鄕校)가 남아 있으며, 이 곳에 '향굣말(校村=교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근처엔 또 연기현의 옥(獄)터가 있고, 객사(客舍)터도 있다. 이를 보아도 옛날 연기군의 중심지는 지금의 조치원이 아니라 남면의 보통리-연기리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 '새터'에 그 이름대로 새 도시의 터를 닦는다
일부 풍수학자들은 전월산과 원수산을 중심으로 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남면, 동면 지역은 풍수적으로 그리 좋은 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이 강하고 산이 약하며 기(氣)를 뿜어 줄 마땅한 산형(山形)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줄기 자체가 계룡산 자락이 대전으로 흘러가는 도중에 생긴 작은 지맥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 또, 공주-연기 지역의 자랑이라고 할 만한 금강이 도리어 전체 부지의 국세(局勢)를 파(破)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또, 금강과 미호천이 부지의 중심 지역에 등을 돌리며 가는 형세로, 풍수상 해롭고,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도 아니라는 점도 지적한다.
국사봉을 중심으로 한 공주시 장기면 일대도 외형상으로는 분지의 형태를 갖췄으나, 주약빈강(主弱賓强)의 형세로 굴종지형(屈從之形)이고, 또 주위의 산들이 사각팔산(四各八散)으로 기가 흩어지고 있어 일개 면(面) 소재지보다도 못한 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땅이름으로 보면, 이 지역이 새 도시를 부를 만한 충분한 요소는 갖추었다.
가장 눈여겨 볼 만한 곳이 연기군 남면 송원리의 '새터'.
이런 이름이야 전국에 무척 많지만, '새로운 터전'이란 뜻의 이 이름은 그 뜻으로는 분명히 이 곳에 무엇인가 들어설 것을 점쳐 놓고 있는 것이다. 근처 눌왕리의 '새터말' 또한 그렇고, 연기리의 신촌(新村) 또한 그렇다.
월산리에는 '큰 고을'의 뜻을 갖는 '한골'이 있다. 한자로 '대동(大洞)'이라고 한 이 곳에 이제 그 이름대로 큰 동네(도시)가 생길 것이다.
또 하나 기찬 것이 있다.
갈운리의 '개발터'라는 땅이름이다. 우리 조상들이 마치 이 곳이 크게 개발될 곳임을 예견한 것처럼 불려져 내려온 이름이다. 그래서, 현지의 토박이 어른들도 마을을 떠나면서 말한다. '개발'이란 이름이어서 언젠가 개발될 곳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새 도시로 개발되어서 우리가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고.
새 행정도시로 들어갈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의 '선돌'은 남성의 그것처럼 불쑥 내민 바위가 박혀 있어서 나온 이름. 마을 사람들도 저것(선돌)이 일어서면 결국 무슨 일을 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름대로 일을 내고 말았다는 말들을 한다. 한자 이름은 '입석(立石)'인데, 그 뜻처럼 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파트나 빌딩이 일어나게 됐다며 땅이름의 예언성을 들먹인다. 근처 금암리의 '불티나루'를 보면서는 이제 건설 망치가 이 나루 이름처럼 불티가 나도록 쇠기둥이나 쇠말뚝을 땅땅 때릴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행정중심 복합도시도 이름대로 되어 갈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