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마지막 편지](31) 조영남 - 58명 여친 중 한명에게
조영남 | 가수2012. 7. 17. 21:40
문제는 58, 쉰여덟이라는 숫자다. 그렇다. 58은 현재 내 여친(여자친구의 준말)의 숫자다. 너무 많아서 놀랄 일도 아니고 너무 적어서 흥분할 일도 아니다.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나는 평소 여친의 숫자나 헤아리고 앉아 있는 쫀쫀한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다. 나한텐 그만한 사연이 있다. 본 신문 칼럼 담당자가 몇주 전 '내인생 마지막 편지'를 주제로 한 원고 청탁을 해오는 바람에 '그거 재밌겠다' 하면서, 그럼 나는 누구한테 마지막 편지를 쓸 것인가 궁리하게 되었다. 이런 때 아내가 있었으면 딱 좋았으련만 아내 없이 살아온 지도 꽤나 오래됐고 그렇다면 장차 내 아내가 되어줄 사람한테 쓸까, 뭐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급기야 그럼 내 아내는 장치 누가 될 것이냐, 그렇다면 현재 내 여친 중 한 명이 되지 않을까에 이르렀고 자연스럽게 현재 여친은 누구누구지? 몇 명이지? 뭐 이런 식이 되었다.
바로 이때 나의 여친은 29명이라는 수치가 먼저 나온다. 무슨 소리냐. 2009년 내가 그 유명한 중국의 베이징 798지역 미술관으로부터 초대 전시를 요청받아놓고 무슨 그림으로 중국인들의 시선을 끌까 궁리하던 중 진시황의 그 유명한 병마용갱(자신이 죽었을 때 자신의 시신을 지키라는 뜻에서 수만명의 군대를 흙으로 빚어 놓은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고대 유적)이 떠올랐다. 하지만 진시황과 달리 나는 남자들이 내 시신을 지켜주는 건 별 의미가 없고 내 여자친구들이 내 시신을 영원히 보호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래서 내 여친 용갱이 되어 줄 여친들을 급거 모집하게 되었다. 거기에 응모한 내 여친의 숫자가 바로 29명이었다. 난 내 여친들의 얼굴 사진에 중국 군복을 덧칠해 베이징 전시를 펼쳤다. 그 작품은 지금도 남아 있다.
'29명의 여친용갱'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내가 직접 터득한 건 좀 거창한 느낌이 들지만 역사의 허망함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작품 때문에 역사적으로 '조영남은 말년에 29명의 여친을 두고 살았다'라는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웃기는 일이다. 내 여친이 어찌 29명뿐이겠는가. 그 후에도 오빠, 아저씨, 선생님, 왜 내 사진을 뺐어요? 나도 끼워주세요 뭐 이런 소리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래서 지금쯤 다시 여친용갱을 그린다면 어림잡아 29명은 더 추가되어 29+29=58쯤 되지 않을까. 그래서 생긴 수치가 58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행여 '백제 의자왕의 3천 궁녀'와 조영남의 '58명 여친'을 엄밀히 구분해 주시길 바란다. 의자왕은 과장이거나 뻥이지만 조영남의 경우는 백프로 리얼이다. 다만, 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왕의 궁녀들은 왕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조씨의 여친은 조씨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아이구, 어림도 없다, 단지 나는 지금 58명 여친 중 누군가 한명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자, 그럼 누구에게 이 중요한 나의 마지막 편지를 보낼 것이냐. 아! 서글프다. 내가 유난히 아꼈던 여친들, 가령 행복전도사 최윤희나 서강대 영문과 교수 장영희나 나와 함께 화투를 즐겨 그렸던 김점선 같은 여친들은 뭐가 급한 지 먼저 세상을 떠나갔고 내가 유난히 아껴왔던 여친들 몇명은 최근에 선을 봤네, 남자친구가 생겼네, 애인이 생겼네 하며 난리도 아니다. 그래도 묵묵한 건 몇몇 기혼녀 여친들이다.
이런 와중에 누가 나의 마지막 편지를 받게 될 여친이냐, 누가 과연 나의 수석 여친으로 남게 될 것이냐, 이것이 관건이지만 좀 딴 얘기지만 나는 몇차례 미리 써보는 유서도 작성해 봤다. 그 유서의 하이라이트는 내가 죽을 때 내 옆을 지켜준 여인이 내가 남긴 재산의 4분의 1을 갖는다는 대목이다. 물론 4분의 3은 세 명의 내 자식에게 공평하게 나눠 갖게 한다.
아! 또 서글퍼진다. 도대체 왜 내 평생 마지막 편지에 재산분배 얘기가 나오고 내 여친이 4분의 1의 재산 권리를 갖는다는 따위의 얘기를 언급해야 하는가. 도대체 왜 엄숙해야 할 마지막 편지에 꼭 돈 얘기를 꺼내놔야 하는가 말이다. 의자왕이 그랬을까. 나의 궁과 재산을 3000개로 쪼개어 궁녀 한 명에게 3000분의 1씩을 배당한다고.
믿지 않겠지만 나는 두 번씩이나 법적 헤어짐의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어본 경험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마지막 편지보다 훨씬 절박했다. 틀림없다. 남녀 사이도 막판에는 꼭 돈 문제로 아옹다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또다시 58명 중 단 한 명의 여친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자! 내 최후의 여친아! 너만은 나를 알아다오. 나는 너를 무진장 좋아하고 내 방식대로만 사랑했다. 내 방식대로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점 이해해다오. 여기까지다. 두서없는 편지는.
그리고 먼저 떠나간 내 여친들 윤희야. 영희야, 점선아. 내가 곧 너희들 만나러 가마. 기다려라.
< 조영남 | 가수 >
첫댓글 아직 생각해본 적없는 내 인생 마지막 편지, 누구에게 어떤 내용을 쓸까?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