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작 신인상 당선작
계간 {시작}은 이영옥과 박윤일 두 여성을 시단에 내보냈다.
그는 침침한 백열등 밑에서 저녁을 먹는다
굳어버린 혓바닥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밥상이 곤두박질 칠 때마다
늙은 아내는 깨진 것들을 천천히 쓸어 모았다
그를 지탱하는 의식들은
이빨 나간 그릇처럼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치욕은 아내의 손톱 밑에 파고든 양념찌꺼기 같았다
한바탕 울분 뒤에
몰아쳐 오는 적요는 언제나 쓸쓸하다
그는 잘 씹히지 않는 명태를 우물거리며
바다 속의 깊은 적막을 우려낸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명태 한 마리의 온전한 고독이 필요할 테지
― 이영옥,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전반부
총 27행 시의 앞 14행이니 거의 절반을 인용한 셈이다.
이 시의 특징은 묘사가 아니라 진술이다.
은유가 아니라 설명이다.
사색이 아니라 사건이다.
그래서 상황은 충분히 감지되지만 오랜 되새김질을 요하지 않는다.
일종의 이야기 시인데, 이야기 자체가 흥미를 유발하지 않으므로 이야기를 하다 만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사물을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은 산문정신이지 운문정신이 아니다.
'그'는 폭력을 일삼는 못난 가장인가? 그의 저녁식사가 어떻다는 것일까? 마른명태가 달리 뜻하는 바가 있을까? 일단 끝까지 읽어보자.
관자놀이의 힘줄이 불끈 일어선다
내 영혼은 얼마나 더 능멸당해야 잠들 수 있나
꿈에서조차 그는 말을 더듬는다
그는 마른명태처럼 딱딱해진 생각들을
탕탕 두들겨
북북 찢어놓고 싶었다
환멸에서 생 비린내가 났다
백양나무가 바람 든 뼈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누런 이파리들의 밭은기침에서 튀어나오는
죽음의 파편들
그는 온몸에 어둠을 퍼담고 고즈넉하게 저물어간다
처마 밑의 마른명태는
먼지를 한 겹 두른 후 하루 더 희망을 품기로 했다.
―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후반부
"내 영혼"의 '나'는 그인가 시적 화자인가.
내가 그와 동일인이 아니라면 왜 느닷없이 등장했으며, 왜 느닷없이 "내 영혼은 얼마나 더 능멸당해야 잠들 수 있나"고 한탄하고 있는 것인가.
글쎄, 명색이 등단작인데 나의 감상법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끝까지 읽어봐도 낯설기의 효과를 노린 시행이 보이지 않고 내용에 있어서도 뚜렷하게 감지되는 것이 없다.
어느 가난한 부부의 저녁 식탁 풍경인 것 같은데 내용 파악은 차치하고라도 풍경화 자체의 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남자는 달려오는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생일전야]와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괄약근의 신축성이 특별했던 그 집은/검은 순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어"란 문장으로 시작되는 [질긴 내장으로 만든 집]은 제일 앞에 내세운 작품보다는 낫지만 초반의 긴장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이야기 시'를 지향할 때 이야기의 진부함을 떨쳐버리게 하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인데 이영옥은 관찰력이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야간 응급실] 같은 작품은 그래도 가능성을 내비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한다. 장대비가 내리는 밤, 삼겹살 집의 풍경이 고호의 그림처럼 거친 톤으로, 그러나 선명하게 그려진다.
비 오는 저녁
허름한 삼겹살 집 구석자리에
두 부자가 고기를 먹고 있다
옆자리에는 지친 가방이 뭉개져 있고
아들은 두 볼이 미어터지게 씹고 있었지만
눈빛은 허공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
함석지붕 위로 탄환 같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자욱한 연기를 사이에 두고 부자는 말을 꿀꺽 삼킨다
(…)
좁은 바닥에 백열등 그림자가 탄피처럼 흩어진다
장대비는 밤새 몇 개의 황토 길을 토해낼 것이다
또다시 철창 같은 빗줄기로 포위되자
삼겹살 집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껴안고
야간 응급실처럼 잔뜩 긴장한다
― [야간 응급실] 부분
이 시의 장점은 실감나는 묘사이며 단점은 소설의 일부처럼 '보여주기'에 그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장점은 크게, 단점은 작게 여겨진다.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치밀한 묘사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야간 응급실]은 바로 이 점을 갖고 있어서 후속 작품에 대한 기대가 간다.
또 한 명의 등단자인 박윤일은 이름도 남자 같지만 시도 여성성을 지니는 대신 샤프하고 터프하다.
영등포 종착역에서 강화행 버스를 탄 화자가 빨간 고무대야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미꾸라지들을 보고 쓴 시가 있다.
나는 졸아든 물 속에서 반란처럼 허우적거리다가
더러는 거꾸로 뒤집힌 채 둥둥 떠올라 있는
녀석들의 창백한 뱃가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급하게 먹은 자장면 때문인지 자꾸만 헛구역질을 해대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뒤바뀌지 않는 생의 노선에
몇몇 녀석들은 아예 맞서 버티기를 포기한 듯
물위에 가만히 떠 있거나 때로는 튕겨져 나와
연옥처럼 뜨거워진 시멘트 블록 위에 나뒹굴고 있다
― [영등포 종점] 끝 2연
미꾸라지 그림이 구체적이어서 역동성이 느껴진다.
신인의 시에 레슬링 선수의 근육처럼 힘이 넘쳐난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문제는 사실적인 풍경화 속에 어떤 내용의 그림을 그려 넣는가 하는 것.
사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어떤 묘사에는 독자의 가슴을 찌르르 떨리게 하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번들거리는 근육 드러내놓고 달리기를 하는 사내들과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젊은 아낙의 아이들이 하나 둘 그를 비껴 나가지만 물통과 수건을 들고 그림자처럼 사내의 뒤를 따르는 여자의 두 볼은 한창 피어난 벚꽃 무더기처럼 환하다
― [그림자] 끝 연
이런 뒤집기는 참 좋다. 앞으로 박윤일 시인이 그리는 그림의 아름다움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박 시인이 달려야 할 앞길에는 냉정한 문학평론가들과 그들보다 더 냉정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인식이 없이는 곤란한데 앞에 예로 든 두 편 시도 그다지 새롭다고 할 수 없는 심상이다.
10월호 {현대시학}과 {현대시}도 각각 2명의 시인을 내보냈는데 원고가 넘쳐버려 언급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이번 가을에만 해도 시인의 관을 쓴 사람이 이렇게 많다.
중요 문예지를 다 찾아보지 않았음에도 10명이 넘는 신인이 등장한 것이다.
이분들의 등단작이 내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다.
적어도 2∼3년은 더 수련의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몇 계단 더 올라선 뒤에 등단했어야 하는데 조금은 일찍 등단을 하여 작품들이 무르익어 있지 않다. 야! 괜찮은 시인이 나타났구나, 하는 감탄사를 터뜨리게 하는 시인이 없다.
하지만 대가도 애송이 시절이 있는 법이다.
기왕 시인의 관을 썼으니 본격적인 습작기가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매서운' 시를 써주실 것을 당부한다.
한국 시의 미래는 그대 신인들의 새로운 목소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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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거울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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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경(金海卿)이 이상(李箱)을 필명으로 정한 유래
김해경(金海卿)과 화가 구본웅(具本雄) 은 신명학교(新明學校) 동기동창이자 학창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구본웅은 몸이 불편하여 정상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해경보다 4살이나 많았지만, 같은 학년 같은 반에 편성되었다. 구본웅은 몸도 불편하고 4살이나 나이가 많아서 같은 반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지만 해경은 구본웅에게 4년 선배로서의 예우를 갖추고 특별한 관심을 보이자 그 둘은 특별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동광학교 이후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김해경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했다. 구본웅은 김해경의 졸업과 대학입학을 축하하는 선물로 사생상(寫生箱 = 스케치박스)을 선물했다. 어릴적부터 유난히 그림을 좋아했던 해경은 사생상을 선물 받고 날아갈 듯 기뻐했다.
그때 그는 구본웅에게 고마운 나머지 자신의 필명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상(箱)자를 넣겠다고 말했다. 또한 김해경은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姓氏)를 따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구본웅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김해경)는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니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하나를 택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권(權), 박(朴), 송(宋), 양(楊), 양(梁), 유(柳), 이(李), 임(林), 주(朱) 등을 검토하다가, 김해경은 그 중에서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것이 이씨와 상자를 합친 '李箱'이라 생각했고 구본웅도 그 절묘한 배합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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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꽃나무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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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에서 남긴 이상의 친필 방명록>
이상의 작품 목록
< 소설 >
- 《십이월 십이일》1930.02~12 조선
- 《지도의 암실》1932.03 조선
- 《휴업과 사정》1932.04 조선
- 《지팽이 역사 : 희문》1934.08 월간매신
- 《지주회시》1936.06 중앙
- 《날개》1936.09 조광
- 《봉별기》 1936.12 여성
- 《동해》1937.02 조광
- 《황소와 도깨비 : 동화》1937.03 매일신보
- 《공포의 기록》1937.04~05 매일신보
- 《종생기》1937.05 조광
- 《환시기》1938.06 청색지
- 《실화》1939.03 문장
- 《단발》1939.04 조선문학
- 《김유정 :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1939.05 청색지
- 《불행한 계승》1976.07 문학사상
< 수필 > : 《권태》
< 시 >
- 《오감도》
- 《건축무한육면각체》
- 《거울》
- 《꽃나무》
- 《실화》
- 《개미》
- 《백화(白畵)》
- 《역단 (易斷)]》
- 《[위독 (危篤)]》
- 《[이상한 가역반응 (異常한 可逆反應)]》
- 《[삼차각설계도 (三次角設計圖) ]》
- 《이런 시 (이런 詩)》
- 《1933, 6, 1 (一九三三, 六, 一)》
- 《보통기념 (普通記念)》
- 《소영위제 (素榮爲題)》
- 《정식 (正式)》
- 《지비 (紙碑)》
- 《I WED A TOY BRIDE》
- 《파첩 (破帖)》
- 《청령》
- 《한개의 밤 (한個의 밤)》
- 《척각 (隻脚)》
- 《거리 (距離)》
- 《수인이만들은소정원 (囚人이만들은小庭園)》
- 《육친의장 (肉親의章)》
- 《내과 (內科)》
- 《골편에관한무제 (骨片에關한無題)》
- 《가구의추위 (街衢의추위)》
- 《아침》
- 《최후 (最後)》
- 《유고 (遺稿)》
- 《1931년 (一九三一年)》
- 《습작쇼오윈도우수점 (習作쇼오윈도우數點)》
- 《회한의 장 (悔恨의 章)》
- 《여전준일 (與田準一)》
- 《월원등일랑 (月原橙一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