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뉴스타임지 인문학 산책)/2024/08/19
노래와 시, 시와 대중 정서
-김민기, 윤동주, 한용운, 김남주의 노래들
이민숙(시인, 샘뿔인문학연구소장)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김민기 작사 작곡
저 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흘리리라 깨우치리라/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리
우리 만날 길 멀고 험해도/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 /김민기 작사 송창식 곡
그의 노래는 그의 노래가 아니다. 우리의 노래, 국민의 노래, 세상을 떠돌며 짠한 세상을 감싸는 노래다. 그냥 따스해서가 아니라 그냥 눈물 나는 노래가 아니라 어쩐지 가슴을 열어 함께 불러야 할 것처럼 뜨거운 기운을 던지며 마음의 가식을 벗어던지게 하는 노래다. 대중이란 참 묘한 정서를 키우기도 한다. 스스로가 아니라 저 먼 곳에서부터 한 마디 한 소절의 노래가 들려오면 불현듯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한 마디의 비밀스런 영혼을 훔치러 허겁지겁 발걸음을 딛는다. 허방처럼 떨어져 내리는 첫사랑의 그림자를 받아야 할 것처럼, 구름 마냥 아무런 무게도 없이 마음의 한 겹 멍석을 깔아놓으며 곁을 스치는 누군가를 끌고 오려 한다. 함께 금세 어깨동무를 하고 소리쳐 노래 한마디 하늘로 보낸다. 여기는 노래방도 아니고 각 가정의 안온한 거실도 아니다. 그냥 거친 한길 가, 광장의 한 귀퉁이, 아니 광장을 메운 대중의 한가운데, 때로는 노제를 지내려고 멍석을 까는 어느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 사 년(滿二十四年) 일 개월(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전문/윤동주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군말> 전문/한용운
빼앗긴 건 자유만이 아니다. 밥을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는 땅을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고 말(言語)을 빼앗겼다. 스스로를 쳐다볼 수 있는 마음의 선한 그리움, 사랑의 대상인 ‘님’ 거울 속의 한 눈동자와 슬픔을 나눌 대상인 ‘자아’를 찾을 수 없다. 참회록이란 얼마나 참담한 문장인가! 내 감성과 친구와의 대화도 감시 받는 학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겐 원망할 수도 없는 ‘역사’가 있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식민제국주의의 그림자가 태극기를 거꾸로 그려 다는 치욕스러운 사건. 참회록은 우리 전체의 몫이다. 시인 윤동주의 시적 진실 속에서 70년을 넘어서는 까마득한 비통이 살아나는 현대사의 아픈 현실이다. 자유란 얼마나 거창한 상징인가. 인간 존재가 살아가기 힘든 미친 상태를 경험했다면 과장인가?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노래> 전문/김남주
멀리서 가까이서 대중은 노래 부른다. 아침이슬을, 노래를, 상록수를, 임을 향한 행진곡을, 부를 수조차 없었던 억압과 광기의 역사가 있었으나 우리 혼의 피끓는 철조망을 끊어야 한다. 우리가 부르고자 하면 부를 수 있으리라. 함께 어깨를 부딪치는 희망의 연대를 위하여 새벽의 빛줄기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도 여전히 조여오는 거짓의 언어들을 파랗게 날려 보내야 한다. ‘청송녹죽의 죽창’으로 반란의 기억을 소리쳐야 한다. 녹두꽃이 피고 파랑새가 날아가는 하늘 끝으로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듬고 함께 날아가는 날이 ‘오늘’이기를 염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