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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3막 1장
62기 조아영
1.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사실 죽은 이는 사체만 남기지 않는다. 숨이 끊어진 곳, 식은 몸은 오동나무 관으로 먼 이사를 떠나도 거기에 부스러기가 남는다. 망자는 핏자국 위에 감정을 남긴다. 소리 없는 유언을 남긴다. 삼도천 건널 적 품에서 흘린 찌꺼기.
몇몇은 그 찌꺼기가 보인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경계를 들여다볼 줄 알았다. 앰뷸런스 떠난 자리 실체도 없는 유해, 비명, 미련을 본다. 나를 점지한 신은 어떤 성격 나쁜 새낀지 싫어도 그게 보였다. 나는, 그들은, 운 나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였다. 뒤의 뒤에서 일한다. 피할 수 없어 업으로 삼았다. 나는 장의사 뒤통수 그늘 뒤에서 일하는 인간이다. 부를 이름 없는 우리를 사람들은 흔히 청소부라고 한다. 나는 미련 청소부다.
1.1
그 생의 편린은 검은색 가루다.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흘러내린다. 죽음처럼 무겁다. 하지만 생 끝에 남은 흔적이라기에 초라하다. 쉽게 흩어진다. 나는 그 영혼의 찌꺼기에서 감정을 읽는다. 절명 순간의 희로애락을 듣고 보고 느꼈다. 어릴 때부터 당연했다. 청소부는 찌꺼기를 쓸어 담았다. 범인들이 수의 입고 화장돼 곱게 남은 백골을 껴안을 때 나는 실체도 없는 잿가루를 주워 담는다. 심장 뛰었을, 마지막 단말마로 내뱉은, 주마등 보며 떠올린 마지막 유언을 충분히 느꼈다. 그 감정을 유품마냥 유족에게 전한다. 그게 내 일이다.
사람들은 이 감정의 잔재를 가두면 고인이 성불할 수 없다 믿는다. 유골함마냥 담아 간직하면 병 속에 미련 남기고,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가두고, 썩게 만드는 행위라고. 언제부터 였는지 법으로 정해두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남지 않은 시간에 그걸 정리한다. 모두 떠나면 혼자 남아 고요한 바다에 뿌린다. 흰 가루 유족에게 남고, 검은 가루 바다에 남긴다. 청소부만 알고 기억한다. 나에게는 검은 감정만 남긴다. 원칙이었다. 그들은 보지도 못하는데도 그들이 정한 원칙.
1.2
찌꺼기를 치워서 청소부가 아니다. 나는 남겨진 이들에게 망자의 마지막을 전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서술한다. 무릎 꿇고 무너진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부채의 자유를, 혹은 벌을 준다. 사실 우리는 망자가 아니라 산 자의 미련을 치우는 것이다. 죽은 자가 원할지는 모르지만. 후회와 회한을 청소한다.
2.
그 애가 죽었다. 내 그 애가. 연인인지 친구인지 모를, 내 영혼을 나눈, 어떤 형태든 사랑이었던 그 애가 흙으로 돌아갔다. 그 애는 가족도 친척도 없다. 쓸쓸한 죽음이다.
그 애의 찌꺼기는 내가 치웠다. 오랜만에 장갑을 벗고 일했다. 손끝으로 느낀다. 뺨도 대어 본다. 거기에는 슬픔이 없다. 고통이 없다. 온도가 있을 리 없는데 그저 따스하다. 뚜렷한 사랑만 보인다. 애정이 심장으로 다가오고 고동 소리 들린다. 그 애는 떠나는 순간 사랑만 남겼다. 청소부인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나룻배였다. 운명을 저주한 내 마음에 띄운 인등이었다. 검은색인데 눈부시다. 머리칼까지 풍성한 애정으로 이루어진 그 애다웠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참을 수 없다.
나는 상주가 되었다. 피 한 방울, 서류 한 줄 이어지지 않은 그 애의 상주가. 찾는 이 적은 3일이었다. 절하는 사람보다 다 탄 향이 더 많은 장례. 텅 빈 죽음이다.
3.
상복 입고 담배피며 나는 걜 따라가기로 했다. 무슨 연유 있어서는 아니고, 아무 일 없어서 죽기로 했다. 나는 내 교만을 인정했다. 나는 죽은 자의 어머니가 내게 감사를 고할 때, 고개 숙일 때, 오열하는 아버지 앞에 건방진 선고를 내릴 때, 무슨 죽음의 신이라도 된 기분을 느끼고 살았다. 내가 뭐라도 된 듯 심취했다. 그들은 보지 못하는 가루를 손 안에 쏟으면 죽음을 손에 쥐었다 착각했다.
하지만 그 애는 죽었다. 장례식은 서늘했다. 청소부에게는 또 찌꺼기만 돌아왔다. 검은 가루에 열심히 글씨 써보아도 내가 바꾼 운명은 없다. 나는 그냥 개같은 눈을 타고 태어난 무지렁이인 것이다.
3.01
어릴 때는 나만 그걸 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나 선명하고 뚜렷한데. 이 축축한 감정을 강제로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게 부러웠다. 뒤진 원망이나 보고 토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 부러웠다. 나는 영정 밑에 누워 그 시절 어린애로 돌아갔다. 왜 나만 시체 기분 따위나 느껴야 하냐고 엉엉 울던 애로. 그 꼬마는 어른이 되면 죽는 게 꿈이었다. 내 손에 깍지껴줄 투박한 손 이제 없고 검은 가루만 남아서 이제 이룰 때가 됐다.
4.
비척비척 걸어서 다리를 올랐다. 귀 옆으로 차가 내달린다. 마침 지나가는 이 하나 없다. 날씨도 좋다. 햇살도 구름도 적당하다. 담배 한 대피고 생의 마침표 찍기 좋은 날이다. 사람 한명 떨어지면 적당히 관심 얻을 꽤 괜찮은 장소다. 난간 아래 내려다보아도 두렵지 않다. 편안한 기분이다.
“저기요. 혹시 당신도 지금 죽으려고요?”
그 때 당신이 말을 걸었다. 첫 만남이었다. 당신도 땀에 절은 검은 옷. 당신은 자기도 지금 죽으려 하는데 양보해달라고 했다. 다리에 사람 딱 두 명, 나란히 목이나 내밀다 만났다. 기막힌 우연이다. 운명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가 먼저 죽겠다고 실랑이했다. 너는 딴 데서 죽으라고. 얼떨결에 드레스 코드 맞춘 머리 떡진 사람들이 같이 떨어지면 데모라도 하는 줄 알테니까. 그러다 눈 마주치고 깔깔 웃는다. 파란 하늘 밑 양복 둘 실없이 낄낄거린다.
5.
일단 다이빙 쇼는 미루기로 했다. 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당신은 갈대밭에 털썩 앉는다. 검은 옷 입고 갈대밭이라니 끔찍하다. 머뭇거렸다. 당신은 빨래하고 죽을 거냐고 놀린다. 발끈해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아래서 보니 더 옆에서 뛰어야 즉사겠네요.”
당신은 범상치 않은 말을 잘도 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어야 하는 이유를 나눴다. 비밀스럽던 그 애 얘기가 술술 나온다. 놀랍게도. 당신은 동생을 잃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남은 유일한 가족. 나는 외로운 그 애가 생각나서 크게 몰입했다. 당신만 덤덤하다. 울상인 나를 보고 잠시 침묵하더니 말한다.
“근데 동생 제가 죽였어요.”
6.
이 근처에 제가 걜 밀었던 도로가 있어요. 걔는 트럭에 부딪혀서 죽었습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러면서 일어나 걷는 당신을 따라갔다. 나는 지금 살인범과 둘이 있다. 여기는 참 외지고, 이 사람이 날 찔러도 가려줄 갈대가 무성하다. 그래서 온순하게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식은 땀이 난다. 이런 걸 왜 말해주는 거지? 대답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패닉이 온다. 고개도 옆으로 돌릴 수가 없다. 나는 살아남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안 돌아가는 뇌로 최선의 방법을 강구했다. 죽으려고 했으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렵다.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다. 개죽음은 싫다. 웃기게도 나는 거창하고 우아한 죽음을 기대했던 것이다.
“내가 당신도 죽일까봐 겁납니까?”
헉 하고 숨이 멈췄다. 당신이 개구지게 웃는다. 농담이에요. 나는 그제야 한숨 쉬었다.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물론 내가 걜 죽인 건 맞는데요. 당신이 덧붙인다. 이왕 죽는 김에 놀러 갑시다. 신나게 내 팔을 잡아끈다. 죽음을 고대하고, 죽임을 고백한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발걸음이다. 지나치게 발랄한 살인범이다.
7.
동생분 찌꺼기 수습해드릴까요?
아뇨. 내버려 두세요. 복수라도 하러 오겠지.
수사하면 증거물이 될겁니다.
그거 참 좋은 일이네요. 그 전에 빨리 죽어야겠어요.
8.
우리는 정말로 놀았다. 너무 아무렇지 않고 너무 신나게 놀았다. 당신은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모두 뽑았다. 눈 튀어나오는 액수에 손사래 쳤다가 이제 필요 없는 돈이라기에 내버려뒀다. 동생 등록금이랬다.
당신은 나를 노래방으로 데려갔다. 만 원짜리를 주섬주섬 동전으로 바꿨다. 한참이나 동전 변환기를 독점했다. 짤랑짤랑 소리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당신은 어울리지 않게 랩을 잘했다. 선입견이지만 매우 의외다. 당신은 진짜 그런 거 안 듣게 생겼다. 나는 엄지 손가락 올리고 노래방 리모콘에서 ‘박수’ 기능을 눌러줬다. 제법이다. 그리고는 크림 스파게티를 먹었다. 이 음식점도 당신이 추천했다. 거의 끌고 들어왔다. 우리는 걸신들린 듯 우겨 넣었다. 육개장만 삼일을 처먹다 집어 넣은 느끼한 음식이다. 니글거렸다. 아마 당신도 그럴텐데 우리는 기꺼이 참는다.
이번에는 내가 다트장으로 당신을 이끈다.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포물선이 다 어그러진다. 죄다 과녁 밖에 나동그라진다. 겨우 가장자리에 몇 개 맞췄다. 끔찍한 점수였다. 아예 지폐를 늘어놓고 몇 번이나 다시 도전하는 나를 당신은 빤히 봤다.
“당신 취미가 아니군요?”
그래. 이건 그 애의 취미다. 그 애가 참 잘했다. 그 애가 좋아했다. 나는 이런 거 관심 없었고 좀 싫어했다. 그 애가 부탁해서 한번 해본 게 다였다. 가끔 같이 할 수도 있었는데, 겨우 한번이 다였다. 저 다트판은 내 죄책감이다. 고개 드는 슬픔이다. 그리움이다. 유쾌함으로 가려보려 했는데 잘 안됐다. 다트가 또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떨어진다. 저 바닥으로.
9.
당신은 내가 원하는 만큼 다트를 던지게 두었다. 한참 지나서야 나왔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펀치 기계를 봤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나는 으아아악 소리를 내지르기까지 했다. 길거리 이목이 몰린다. 한번 더 포효했다. 당신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부끄러움이 눈에 다 보인다. 필사적으로 날 모른 척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얄밉게 쏘아 붙였다.
“죽을 때도 남 신경 쓸겁니까?”
당신이 어이없어 웃는다. 결국 달려들어 으악 소리 지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폭풍같은 하루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다. 진짜로 내일이 없으니까. 숨 가빴다. 술 한 방울 안마시고 만취한 사람처럼 굴었다. 아직도 하늘에 햇살이 내린다.
10.
당신은 먹은 걸 다 게워냈다. 나는 괜찮은지 물어보지도, 등 두드려주지도 않는다. 그냥 멀리서 끝나길 기다린다. 나는 당신의 밑바닥 구렁텅이를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기름진 걸 먹어서일까? 속이 안 좋았을까?
당신은 최후의 만찬이 될 음식점을 추천했으면서 메뉴판 넘기는 방법도 몰랐다. 메뉴 이름도 잘 못 읽었다. 포크 질이 서툴렀다. 물 한잔 떠올 때도 허둥지둥했다.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가 사실 어떤 가수 노래인지 전혀 몰랐다. 제목을 몰라 귀 옆에 노래를 틀어두고 부른 노래도 많았다. 내 다트처럼.
“당신 취향이 아니었죠?”
돌아온 당신은 만신창이다. 이제야 보이는 당신은 창백하다. 눈이 발갛고 고통스럽다. 기억을 더듬으면 처음부터 당신은 이랬 다. 동생을 입에 올릴 때부터.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사무치는 그리움이, 눅눅한 비애가 보인다. 나는 저것들을 부르는 단어를 안다. 청소부는 매일 본다. 내게 고개 숙이던 사람들이 매일 보여줬다. 저것들의 이름은 애정이다. 사랑이다. 당신은 삼키지 못하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회한을 토하고 왔다. 아프게.
10.01
빗방울이 떨어진다. 당신은 가방 안에서 우산을 꺼낸다. 내게 기울인다. 비가 오면 가루를 쓸려 나가기 마련이다. 나는 가야한다. 다시 확인해야한다. 당신도 알아야한다.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이 비가 그치면, 그래서 다시 볼 수 없으면 처참하게 후회할거라고 내 본능이 그랬다. 내 평생 업이 가르쳐줬다. 당신의 손을 잡고 뛴다. 내달린다. 검은 정장 위 파란 우산 이리저리 흔들린다.
11.
나는 검은 가루를 파헤친다. 무례라는 걸 알고 있다. 사과는 죽고 나서 할 생각이다. 내 눈에서만 손이 온통 검다. 당신 눈에 난 비 젖은 허공을 파헤치는 정신병자. 나는 원망이 득실거리는 꺼풀을 벗긴다. “당신이 죽인 거 아니죠?” 다급한 내 의문에 당신은 꺼풀 아래 숨긴 이야기를 한다.
11.11
당신은 부모님의 재혼으로 갑자기 동생을 얻었다. ‘내’ 아빠는 어떻게 되냐는 물음에도 어머니는 침묵했다. 합의 하에 따로 살기로 했단다. 좋게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당신은 어렴풋이 어머니가 바람을 피운 걸 알 것도 같았다. 처음 만난 동생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당신의 새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걔랑 같은 처지다. 당신과 동생의 가족은 서로의 가족을 빼앗았다. 내 아버지를, 어머니를 빼앗은 놈의 자식을 죽도록 미워했다. 쌍방향이다. 정말 죽지 못해 같이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돌아가신다. 교통사고다. 당신과 동생을 학교로 데려다주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이제 당신과 동생은 남은 어머니 아버지마저 빼앗고, 빼앗긴 아이가 됐다. 쏟아낼 곳 없는 자책과 분노는 전부 증오의 연료가 됐다. 그런데도 당신과 동생은 같이 살았다. 매일 언성이 오갔음에도 누구도 외박하지 않는다. 당신과 동생은 어떤 죄책감과 상실을 공유했다. 피가 이어진 것도 아닌데 떨어질 수 없는 징그러운 인연이라고, 당신은 말했다.
“그 날도 당연하게 싸웠어요. 걔는 집을 뛰쳐나갔죠. 만취한 운전자가 탄 트럭이 인도를 덮쳤고, 불행하게도 걔가 거기에 있었어요. 내 동생은 꿈틀거려 보지도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심폐소생술 한번 못 받고요.”
“…사고일 뿐이에요.”
“내가 떠밀었어요. 제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더 이상 아니라 하지 못했다. 나도 저 상황에 내가 죽였다고 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성을 차릴 자신조차 없다. 여긴 벼랑 끝이다. 상자 속 이야기는 생각보다 날카롭다. 아프다. 상자 안에 당신이 난도질 당해있다. 열어본 나도 상처 입는다.
그래도 나는 청소부로써 당신을 나락에 두고 올 수 없다.
“이 밑에 뭐가 있는 줄 아세요? 걱정, 안타까움, 그리고 원망 밑에 애정도 숨겨뒀어요. 가장 선명한 연민이 보여요.”
이를 악물었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깨끗한, 혹은 검은 손을 틀어쥔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러다 당신이 바람 빠지게 웃었다.
“개같은 새끼….”
길에서 휴대폰 좀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끝까지 말 안 듣고… 쓸데 없이 착한 새끼가, 끝까지 원망해야 할 거 아냐. 당신은 듣는 이 없는 회한을 속삭였다. 당신이 말한 동생의 복수는 당신의 소망이다. 상주로써 3일간, 가족 하나 없는, 내가 식장 구석에서 어린 애로 돌아갔던 3일간, 간절하게 동생이 자신을 죽이길 바란 것이다. 단죄를 바랐다. 비가 그쳤다. 이상하게 비 오는 내내 하늘이 맑았다. 해가 비쳤다. 그래도 해는 비쳤다. 우산 쥔 손이 떨린다. 당신은 우산을 좀 더 눌러 쓴다. 나는 슬쩍 우산 안에 어깨를 들였다. 비가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았지만, 우리는 우산 쓰기로 한다. 우산 안에 비가 온다.
12.
고해한다. 그 애에게 사죄한다. 나는 그 애의 찌꺼기를 스스로 청소했다. 쓸어 담고 유리 병에 담았다. 그걸 내 집에 두었다. 평생 집에 두기로 했다. 원칙을 어겼다. 나 때문에 성불하지 못했다면 미안해.
나는 사실 그 애의 영혼이 떠나지 못했으면 바랐다. 내심 이 병 안에 묶였으면 바랐다. 그 애를 옭아매고 싶었다. 끔찍하게 이기적이다.
13.
땅거미 지는 걸 기다렸다. 호떡에 소주를 먹는다. 기괴한 조합이다. 호떡 파는 술집 찾느라 얼마나 애먹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바랐기 때문에 바쁘게 뛰었다. 꼭 먹어야 한다고 했다.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먹어야 한다고. 그 간절함을 안다. 빗속을 달리고 손이 부르트게 다트했던 것처럼.
“걔는 늘 소주 안주로 호떡을 먹었어요. 입맛도 지처럼 지랄 맞았죠.”
소주에 곁들인 호떡은 조금 역하긴 했다. 입 안에 단내가 가득하다. 밖이 깜깜하다. 완연한 밤이다. 내가 죽는 날의 밤이 왔다. 무사히 왔다. 이러다가 없는 내일도 올지 모른다. 갑자기 목구멍이 따갑다. 달아서 그런가. 손에 온통 검은 설탕물이 묻는다. 이건 당신도 볼 수 있는 검은색. 온 몸이 진득한 기분이다.
14.
나와 당신은 내 집으로 왔다. 우리는 더 불쌍한 놈의 집에 가기로 했다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시궁창이라 관뒀다. 그냥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게 나였다. 나는 그 애와 같이 살았다. 아직도 집에 그 애 물건이 남았다. 당신은 거실 한 가운데 놓인 병을 가리킨다.
“이게 그 검은 가루예요?”
“네. 그 애 거예요.”
“안에 진짜 아무 것도 없네.”
당연한거지만 아쉬운 표정이다. 당신은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빈 병일 텐데 안이 가득 찬 듯 굴었다. 당신은 뒷머리를 멋쩍게 긁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꽂는다. 수북하게 꽂는다. 나는 그 꼴을 가만히 보다 물었다. 뭐 하시는데요.
“제사 같은 거.” 불을 붙인다. 제사라더니 축하 케이크 비주얼이 됐다.
15.
우리는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졌다. 아까부터 온 몸이 진득한 느낌이다. 찝찝하다. 그러고 보니 장례식동안 거의 씻지 못했다. 창에 비친 당신 머리에서 기름이 흐른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시합하듯 욕실로 들어갔다. 좁아터진 타일 덩어리에서 같이 샤워했다. 시리게 차가운 물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주절거렸는데 샤워기 틀자마자 조용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다. 물소리만 난다. 나와 당신은 수건으로 닦지도 않고 거실로 나왔다. 담배연기가 매캐하다. 다리에서처럼 눈이 마주쳤다. 알몸인 나와 당신이. 둘 다 엉망이다. 머리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뭐가 웃긴지 배 잡고 웃는다.
나는 노래를 틀었다. 몸을 흐느적거린다.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인다. 당신도 싸구려 왈츠 스텝을 밟는다. 나와 당신은 손을 잡고, 나체로, 정체 모를 춤을 춘다. 빙글빙글 돌았다. 젖은 몸에서 물이 떨어진다. 바닥이 미끄럽다. 삐끗하고도 계속한다. 그 애와 같이 살던 집이 물로 흥건하다. 연기로 가득하다. 몸이 마르면 화장실로 뛰어가서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다시 몸을 흔든다.
15.99
그러다 발에 채인 유리병이 넘어간다. 가루가 몽땅 쏟아진다. 그 애가 쏟아진다. 발밑이 철퍽거린다. 늪, 진창, 수렁, 뭐 그런 소리가 난다. 이건 아마 의식이다.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인지, 산 사람을 위한 것인지 모를, 가장 날 것의 의례. 아니면 내일이 오면 죽어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나와 당신을 위한 제사일 수도 있다. 욕실 수도꼭지를 죄다 틀었다. 물이 발목까지 찬다. 수위가 높아진다. 우리는 문제에 직면해있다. 지옥 바로 앞까지 와있다. 내일 나와 당신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급하게 가느라 마감할 시간이 없어
2020년에 써두었던 글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