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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1일
청순한 5월이 왔다. 어린이 날부터 어버이 날 스승의 날과 부부의 날까지 가정의 달인 5월은 우리들 모두의 계절이다. 잠을 잘 자서 몸도 가벼운데 신록이 우거지고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싱그러운 이 계절을 활기차게 보낼 것이다. 아침 8시에 감자국으로 식사를 하고 이른 시간 일요일 수업을 나설 때 아들은 또 결석을 한다는 것인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일단 딸과 광화문 도서관으로 나섰고 산에 간다는 아내는 붉은 등산복으로 화사하게 채비를 갖추었다. 광화문을 달리며 바라보니 오늘 종로에서 어가행렬을 한다며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광장이 북적이고 빌딩 사이로는 하늘이 회색이다. 딸을 도서관에 내려주고 바로 논술교실로 돌아오니 이대부고 수강생 몇 명이 와 있고 예상한 대로 아들만 결석을 했다. 황사가 많은 날 낮에는 청계천 주변 3.1빌딩에서 재경 부량면 향우회를 개최한다며 참석을 종용하는 전화와 문자가 많이 왔다.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집으로 내려가자 이번에는 아내가 교실로 오르고 결석한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3시에 다시 교실로 올라가 수업을 하고 날이 어두어지면서 광화문으로 나갔다가 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닭백숙 저녁을 먹었다. 낮부터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직도 신촌에 있다고 하여 수업까지 빼먹고 온종일 돌아다니는 꼴이 한심하기만 했다.
2일
아들때문에 심난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가 새벽 2시에 깨었고 이후 뜬 눈으로 몇 시간을 보냈다.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하면서 새벽을 맞았는데 황사가 심하다보니 밝아온 하늘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 안산도 보이지 않는다. 이른 시간이라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다가 7시에 다시 거실로 나갔더니 아들은 식사도 거르고 꽁무니를 빼듯 현관을 나간다. 어제 아침부터 국어수업 결석을 하고 신촌에서 쏘다니다 늦은 밤에 와서 야단이나 훈계가 두려웠을 것이다. 오늘부터 동명여중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날이라 현관에서 딸을 배웅하며 최선을 다하라 격려하고 식탁에 앉았다. 오전에 1시간 잠을 자고 10시경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한 뒤 마지막으로 중간고사를 보는 수강생을 위해 튀김과 떡볶이를 사 들고 논술교실로 올랐다. 점심으로 함께 먹으며 5시까지 수업을 했고 이후 성북동 학원으로 출발하여 서류정리와 수업을 하면서 나머지 오후를 보냈다. 대학교 동창인 친구는 내일 인천에서 화장품가게를 개업한다며 전화를 했는데 시설이 미비하다며 고민을 하고 있다. 9시경 집으로 왔다가 동네에서 영어학원을 하는 링컨선생과 고은초등학교 골목에서 참치찌개 식사를 하며 술을 마셨다. 늦은 밤 거실에 들어서니 달빛이 환하게 나를 맞이하고 방에는 TV를 켜둔 채 아내가 잠이 들어 있다.
3일
어제 술을 마시고 잠이 든 탓에 늦게 일어나 9시경 호박된장국으로 식사를 했다. 오전에 운동을 가려다가 시험을 마친 수강생이 바로 온다기에 광화문과 대학로를 쏜살같이 달려가 국어시험을 대비하여 수업을 했다. 하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수강을 더 못한다니 아쉬움이 많았고 점심에는 밖으로 나가서 백반을 사 먹었다. 오후에 프린트 준비와 교재를 연구하다가 3시경 논술교실로 돌아왔고 수업을 마친 5시에 집으로 내려갔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은 시험공부를 한다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어제 영어는 잘 보았고 오늘 국어는 실망이라면서도 내일 수학과 한문에 최선을 다한다. 거실에서 바라본 안산의 봄 경치는 해가 기울었지만 아직 화려하고 대조적으로 어둑한 안방은 썰렁함과 적적함만 가득했다. 저녁에 체육관으로 나가 땀을 흘리며 보냈고 아내는 수업을 마치고 아들의 운동화를 수리한다며 불광동 킴스클럽에 나가 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하다가 저녁에는 아내가 구입해 온 삼겹살로 식사를 하면서 청하 몇 잔을 마셨더니 맛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식사 후 바로 과외를 시작했고 안방에서 TV를 보던 아내는 꾸벅꾸벅 졸고만 있어 보기에도 우스웠다.
4일
어제 일찍 잠이 들었는데 너무 많이 자도 나른한 것인지 8시가 지나도 일어나기 싫었다. 가까스로 식탁에 나와 콩나물 국으로 식사를 하는 중에는 동명여중 시험을 감독한다는 아내가 집을 나서고 이어 아들과 딸도 등교를 했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나가 어느 때보다 땀을 많이 흘렸더니 운동은 역시 신체는 물론 정신건강에 최고의 명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시경 집으로 오면서 아침에 가지고 나온 세탁물을 굿모닝마트 세탁소에 맡겼고 비용은 겨울옷 10개가 4만3천 원이다.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수령하고 집으로 돌아와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으면서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연휴의 계획을 세웠다. 잠시 후 중간고사를 마친 딸이 돌아왔고 먹던 밥을 멈춘 나는 현관까지 달려가 노력한 대가로 얼굴을 맞대며 안아 주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 처음 본 시험이라 성적도 당연 중요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모습이 더 대견했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에는 먼저 청주에 내려간다는 아내와 딸한테 전화가 왔고 나는 수업으로 일정을 미루었다. 내일 청주로 갔다가 모레 김제까지 들러 상경하는 것인데 아내는 그 사이에 고속버스를 탔다는 문자를 보냈다. 초저녁에 친구 집사한테서 오늘 부흥회에 참석하라는 전화가 왔고 집으로 들어간 밤에는 TV를 보던 아들이 슬그머니 외출을 한다. 결국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깊어가는 봄밤을 보냈지만 외출한 아들이 12시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5일
오늘은 하늘이 맑고 푸른 어린이 날이다. 아내와 만난 지 19년 째 되는 날로 대학교수가 자리를 만들어 청주 본정통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다. 단아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빠르게 흘러 지금은 50대의 삶으로 내가 서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지 화장실 쪽 옥상 소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8시에 일어나 아들과 모래네 설렁탕으로 가서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명지대학교 정문까지 차를 몰아 아들에게 학교를 소개했고 오면서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며 다니는 것에 대하여 지적을 했다. 한여름도 아닌데 반바지라니 어울리지 않아서 말을 했던 것이고 아무튼 아들은 집에 도착하여 긴바지를 입고 외출을 했다. 어제 청주에 내려간 아내는 용구네가 일찍 도착한다는 전화를 하여 나도 운동을 마치고 서둘러 고속터미널로 나갔다. 12시가 지나 버스는 청주로 출발했고 휴일날 맑은 하늘에 상쾌한 기분까지 오늘은 모처럼 마음의 여유가 넘쳤다. 3시경 처가에 들어서니 재규네는 외가가 있는 제천으로 아내와 딸을 포함하여 나머지 가족들은 장인어른을 제외하고 청남대 구경을 나선 상태다. 오후가 되어 모두 돌아왔지만 저녁을 먹은 후에 장모님께서 김치를 가지고 서울로 가자기에 무슨 영문인지 적지 않게 당황을 했다. 아마 장인어른이나 재규 아빠와 낮에 갈등이 있었던 모양인데 몇 시간 전에 들어선 나도 눈치만 보다가 함께 나왔다. 고속터미널에서 장모님과 아내 딸만 서울로 보내고 나대로 고향의 계획이 있어 열차를 타려고 시내버스로 조치원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 열차는 전라선뿐이라 할 수 없이 전주행 티켓을 구입하여 대전과 익산을 지나 도착하니 휘황찬란한 밤 11시가 지났다. 두리번거리다 전주역 광장 모퉁이에서 콩나물국을 사 먹었고 12시 지나 근처에 있는 사우나로 들어가 긴 시간 오늘을 보냈다.
6일
전주 풍남사우나에 들어가 밤을 보내는데 사람은 많지 않았어도 콧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다 깨다를 몇 번 했다. 아침이 되어도 몸이 나른하여 9시에 사우나에 있는 헬스장으로 내려가 달리기와 기구운동까지 1시간을 보냈다. 지방까지 내려와 사우나에서 운동을 한 것이 의외였지만 컨디션이 좋아졌고 전북대 근처에서 해장국 아침을 먹었다. 11시경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김제와 신태인을 거쳐 어머니 산소에 도착하니 봄이 온 여기도 신록이 우거져 있다. 산소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월이 흘러도 주검의 흔적은 제자리에 있을 뿐이고 나그네처럼 나만 지나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시내로 나와 시래기 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전주에 사는 친구를 보낸 후에 저녁에는 고향마을 동무들을 만났다. 마을에서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모인 계원들인데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가 술이 취한 채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어울리다가 유명하다는 한우에 식사와 술을 하고 이후 자리를 이동하여 노래를 부르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다. 서울에서 내려간 나는 회비에 찬조금까지 보탰고 늦은 밤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사우나에 들어가 어제처럼 하루를 보냈다.
7일
김제사우나는 어제 전주보다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 밤새 조용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설이 낡아 답답한 공간이었고 거기에 냄새까지 심하여 잠깐 자다가 새벽에 밖으로 나왔다. 잔뜩 흐린 날씨에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첫차를 타려고 택시를 이용하여 터미널로 향하는데 사람도 없는 거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몇 명의 승객을 태운 차는 이내 고향을 출발하여 호남선 도로에 들어섰고 2시간이 지나 천안을 통과하면서는 빗방울이 굵어졌다. 안성부터 출근길 차량으로 정체가 심했고 강남터미널에 도착해서는 지하철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을 밖에서 보냈더니 피곤이 극에 달하여 밥맛도 잃었는데 학교에서 일찍 온 아들은 라면을 먹는다고 정신이 없다. 안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늦은 오후에 학원으로 나가서 이틀이나 멈춘 일정과 서류를 점검했더니 금방 저녁이 되었다. 긴 연휴에 정체가 심한 고속도로와 달리 서울의 도로는 한가했지만 봄은 역시 나들이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철이다. 저녁에 아내는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만들어 두었고 친구한테서는 내일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라는 전화가 왔다. 주말임에도 아들은 어디를 다니는지 늦게 들어왔고 TV 속의 고속도로는 어버이 날을 앞두고 다시 정체가 시작되었다.
8일
새벽에 눈을 뜨니 아내가 자고 있고 새벽 예배에 참석한다는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한강을 건너 거의 1개월 만에 들어선 교회에서는 어버이 날이라고 카네이션을 달아주어 하늘의 축복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들과 딸이 아직 어리고 무심한 상태라 여기서라도 축하를 받으니 새삼 흐뭇했고 이후 시작한 1부 예배는 8시에 끝났다. 근처에서 해장국을 사 먹은 후 2부 성가대에 오르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고 곧바로 논술교실로 돌아왔다. 중간고사를 마친 시간에 연휴까지 겹치다보니 수업은 다른 때와 달리 산만해졌는데 나조차 긴장이 풀린 오늘이다. 오후 1시경 집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는 중에 아내가 도서관이 있는 독립문으로 나가고 그 사이 외출했던 아들이 들어왔다. 화창한 날씨의 어버이 날을 보내다보니 부모와 함께 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는데 잘하지 못한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오후에 다시 올라 수업을 하고 저녁에 내려왔더니 이번에는 아내가 교실로 오르고 낮에 보았던 아들은 흔적이 없다. 거실을 나서면서 자식을 잘못 키워 어버이 날 꽃 한 송이도 받지 못했다는 아내의 불평에 아직은 아들과 딸이 어려서 어쩔 수가 없다고 위로해 주었다. 밤에 수업을 마치고 내려오자 그 사이 딸이 꽃과 편지를 준비하여 내 놓았고 아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저만치 앉아만 있다. 나도 부모가 된 사람이지만 특별히 아내의 심정을 헤아려 아파트 건너편 고갯마루 분식점으로 함께 가서 어묵탕에 술을 마셨다. 꽤나 오래 시간을 보냈지만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 또한 자식에 대하여 부모로서의 역할 등 어버이 날이 성찰의 날이 된 밤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또렸하게 다가와 아내를 집으로 보내고 혼자 홍제역으로 걸었는데 사람도 없는 거리에 내 모습이 초라했다.
9일
홍제역에서 술을 더 마시다가 노래까지 부르고 새벽에 들어오니 조용한 거실에 아내의 콧소리만 요란하다. 아침까지 뒤척이면서 헤아려보니 내가 받는 고통이나 스트레스는 대부분 아들한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 누군들 자식한테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중요한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에 앞서 나를 이기는 인내심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늦은 아침까지 누워서 보냈는데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컴컴하고 1시경 점심을 먹고서는 운동을 하려고 체육관으로 나갔다. 어제 마음껏 노래를 하면서 술을 마셨기에 취함은 덜 했지만 오늘 운동까지 마치고 나니 오후의 컨디션이 한결 좋아졌다. 세탁소에서 옷을 찾아 집으로 돌아와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고 현대백화점에 다녀온 아내는 화장품과 간식거리를 사 왔다. 잠시 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을 두고 시내를 달려 학원으로 가는 중에는 앞으로 3일 동안 계속된다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에 대치동에서 수익금 일부가 입금되었고 평소 태도가 좋지 않았던 수강생한테서는 학원을 중단한다는 전화가 왔다. 가르치는 수업도 쉽지 않지만 수강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에 심기일전 다시 하리라 다짐했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딸이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고 저녁을 먹는 중에는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어린 껑충한 아들이 들어왔다.
10일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 날 어제에 이어 비는 계속 내린다. 성탄절과 함께 석가탄신일 오늘도 공휴일이지만 아들이 학교에 간다며 교복까지 입고 일찍 집을 나선다. 평상시는 잠바를 걸치고 다니더니 하필 비가 내리는 그것도 휴일에 교복을 입고 나가다니 청개구리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침 TV에서는 조계사 기념행사가 열리고 아내와 딸은 용구네가 살고 있는 퇴계원 근처로 나들이를 나섰다. 혼자 있으면서 특별한 일도 없었지만 오후에 수업이라 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일단 시내를 통과하여 학원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아 지인들에게 부처의 자비가 있으라는 석탄일 문자를 보냈더니 교회를 다닌다는 후배는 나의 분별 없음을 지적해 왔다. 내 입장에서는 인사치례 정도의 사교적인 내용으로 보면 될 것을 이분법적 종교색으로 알아듣는 후배가 오히려 단순해 보였다. 3시경 집으로 왔더니 아침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간 아들이 벌써 돌아와 컴퓨터 앞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다.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미래의 내 삶이 꽉 막힌 듯 답답했고 그것은 이내 불안과 우울함으로 바뀌었다. 초저녁에 수업을 하러 논술교실로 올랐는데 신설동 1층에서 계약이 만료되는 시기에 이사를 가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5시부터 시작한 수업을 4시간이나 연속으로 하고 밤에는 비가 오는 이유로 수강생들을 각자의 집까지 태워주고 돌아왔다. 10시경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딸은 안방에서 TV를 보고 아들은 나와 무관한 자세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다.
11일
새벽까지 비가 내리더니 아침이 밝아오면서 그쳤다. 아내가 늦잠을 자는 이유로 내가 식사를 준비했는데 등교시간이 늦었다는 아들은 식탁에 오지도 않고 현관을 나선다. 학교에 다녀온다는 말도 인사도 없는 아들이라 안타까웠지만 세상을 살다가 어른이 되면 지금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9시30분에 체육관으로 가서 2시간 가까이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더니 체증이 내려가듯 막혔던 심경이 밝아졌다. 12시경 밖으로 나와 산들 부는 바람과 맑은 햇볕을 맞이했고 그 사이 아내는 동학 엄마와 안산을 걷는 중이라며 문자를 보내왔다. 곧장 학원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고 오후에는 짬을 내어 지금의 나를 돌아보았는데 시련과 고뇌의 흔적이 적지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좌절하지 않을 것이며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신과 힘을 끊임없이 만들어 갈 것이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물레방아처럼 돌고 도는 것이기에 그 동안 칼같은 정신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더 당당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찬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을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렇게 하루를 맞을 것이다. 저녁에 논술교실 수업을 마치고 오리 훈제를 배달시켜 아들 딸과 먹는 중에 모임에 나갔던 아내가 11시경 들어왔다.
12일
어제까지 내린 비는 완전히 그쳤고 하지만 하늘은 아직도 흐리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30년대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박목월 선생의 아들 서울대 박동규 교수 TV 명사특강을 시청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아보는 시리즈로 오늘은 박목월 시인에 대한 서정성 짙은 아들의 회상이 중심이었다. 사회자나 방청객 모두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나에게도 뭉클함을 전한 것은 역시 자식에 대한 부모의 끝없는 사랑이었다.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한 뒤에 바로 학원으로 이동하여 라면으로 점심을 먹었고 오후에는 성동공고와 한양공고에 제출할 이력서를 작성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낮에만 특강으로 들어갈까 했는데 경력보다 나이를 우선하는 기준이라 신경이 쓰였다. 과거에는 나이가 어려서 강의에 불리하더니 이제는 나이가 많아져 오히려 걸림돌이니 어느 장단이 좋은지 구분할 수가 없다. 수업이 없는 오후에 신설동으로 가서 수도세를 정산하고 근처 빈대떡 집에서 대낮부터 파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엊그제부터 먹고 싶었던 것이라 불쑥 들어간 것인데 분위기나 맛도 그렇고 깨끗한 시설도 아니어서 금방 나왔다. 건물 주변을 돌아보고 신설동 개천가로 나갔더니 지저분했던 곳이 단장되었고 성북동과 청계천 한강까지 말끔하게 연결을 하였다.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아 나도 덩달아 성북동 방향으로 걷고 뛰다가 성신여대 주변에서 부대찌개를 사 먹었다. 빈대떡 집의 허접함을 채우려고 술도 몇 잔을 더 마셨고 이후 학원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 10시경 집으로 돌아왔다.
13일
어제 빈대떡에 막걸리 또 부대찌개에 소주를 마셨더니 아침에 환자처럼 눈에 초점이 없다.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지장이 없을 정도의 적당한 양을 준수해야 하는데 아직도 절제를 못 하는 내가 문제다. 오늘 이대부고 스승의 날 기념식과 운영위원회 모임이 있었지만 속이 편하지 않아 참석을 하지 않았고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하고 나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12시경 밖으로 나와 라면집에서 김밥을 구입하여 산행을 하려고 지하철로 불광동으로 이동했고 북한산 족두리봉을 향해 1시간 이상을 걸어 올랐다. 정상에서 바라본 신록이 우거진 북한산은 시력조차 맑게 하였는데 서울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경관까지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혼탁한 머리를 씻어내고 산 아래로 내려오니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바로 학원으로 들어가서는 다음에 할 수업을 준비했다. 저녁에 마트에서 홍보한 마늘을 구입하러 롯데마트 서울역으로 갔더니 이미 품절이 된 상태라 초밥과 삼겹살만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저녁은 딸과 함께 맛있게 먹었고 논술교실 수업을 마친 아내는 엊그제처럼 외출을 하더니 11시에 아들과 함께 들어왔다.
14일
어제 금요일 산행을 했더니 오늘이 마치 일요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토요일 아침에 아내가 바쁘게 움직이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늦장을 부리는 우리와 달리 안산까지 다녀왔다. 11시부터 수업이라 일찍 산행을 했다지만 건강과 맑은 정신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고 아들은 반대로 일찍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날씨가 화창하여 북한산에 오르려고 도시락을 준비했고 정릉에 12시경 도착하니 주말이라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누룽지탕과 청하를 사 들고 보국문 방향으로 오르다 중간에서 가파른 칼바위로 방향을 틀었는데 힘도 들고 땀까지 많이 흘린 산행이었다. 1시간 이상을 걷다가 칼바위 정상에 앉았고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5월의 푸르름이 상쾌한 마음을 만들었다. 북한산에 오를 때마다 자주 찾는 곳이지만 오늘도 바위에 기대어 청하 1잔을 마셨더니 내가 허공에 떠 있는 신선으로 변해 있다. 30분 후 왔던 길로 하산을 하여 3시가 지나 학원으로 들어가 내일 수업할 교재와 프린트를 준비하고 6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논술교실 올랐더니 내일 스승의 날이라고 학부모가 홍삼음료수를 보내왔고 수업을 마친 10시에는 수강생들을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15일
아내의 콧소리를 이겨보자고 딸이 사용하는 귀마개를 하고 잤는데 이것도 무용지물이다. 어제 마신 캔맥주의 영향인지 속이 불편하여 잠을 설쳤더니 아침에 피곤함이 극에 달았다. 오전부터 수업이 있어 콩나물국으로 식사를 마친 뒤 논술교실에 가면서 바라본 하늘은 역시 계절의 왕답게 눈이 부신 5월이었다. 교실에는 미리 온 수강생들이 있었는데 장난만 치는 줄 알았더니 오늘은 스승의 날이라고 케익을 준비해 두어 고마웠다. 즐겁게 수업을 하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1시30분 집으로 내려오니 중등부 수업을 한다는 아내가 딸과 거실을 나선다. 떡국으로 식사를 하고 2시간을 쉬다가 3시에 다시 올라 오후반 수업을 시작했고 마치는 7시에는 또 수업을 한다는 아내가 왔다. 번갈아 가면서 교실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아내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는 내가 모른다. 집에 들어오니 식탁에는 닭백숙이 준비되어 있고 식사를 하는 중에는 아들이 알바를 하는지 지난 주와 같은 시간에 외출을 한다. 10시에 수업을 하고 돌아온 아내는 컴퓨터 앞에서 딸의 과제를 만들고 나는 안방에서 TV를 시청하며 밤을 보냈다. 11시경 아들이 들어오고 아내와 딸은 12시가 지나서까지 거실에서 함께 하는데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힘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