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반(榧子盤) / 김상남
시댁에는 비자반이 있었다. 남편의 삼형제는 모이기만 하면 이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내놓고 바둑을 자주 두었다. 그럴 때면 시아버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이 비자반을 나락 몇 섬하고 바꾼지 아냐? 너희 중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에게 이것을 주겠다.”
나는 값보다 특별한 비자만의 성질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매력 중 하나는 바둑을 몇 판 두고 나면 바둑알이 놓였던 자리를 따라 반면(盤面)에 올록볼록한 굴곡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상태로 돌아와 반반해져 있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자식들의 바둑 대국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손수 두꺼운 종이로 만든 덮개를 꼭 씌워 놓았다. 이 덮개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새로운 종이로 깨끗하게 치장이 되는데, 그때 옆에 있던 내게 아버님은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비자반은 만약 조금 갈라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대로 잘 싸두기만 하면 다시 원래의 상태가 된단다. 검은 실금 정도의 흔적이 반면(盤面)에 남긴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비자반의 가격을 높여 준다는구나.”
놀라웠다. 비자반에 더욱 흥미가 느껴졌다.
“세상에! 다시 붙다니…. 게다가 값이 더 오르다니….”
그럼 그대로 두지 뭣 때문에 이렇게 싸두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아버님은 작은 욕심을 부리다가 이 귀한 물건이 못 쓰게 되어버리면 어쩌겠냐며 다리 하나를 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이 비자반을 소유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버님은 무엇보다도 물건의 내력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수필은 어쩌면 반면에 나타난 ‘검은 실금’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필을 정의해서 ‘붓 가는 대로 쓰는 문학’ 이라 했다. 물론 이 ‘붓 가는 대로’ 라는 말에 수필을 쓸 때의 필요한 모든 배경이 다 들어있겠지만, 내용면에서는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 문학적 정서 등이 반드시 내포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이리라.
문학적 정서, 미적 정서란 작가의 마음속에 용해되어 취사선택되고 정화된 정서일 것이다. 흔히 수필을 체험의 문학이라 하는데 이는 경험이 쌓이고 그것이 삭아서 기억의 저편에 앙금처럼 남아 있다가 취사선택에 의해 다시 되살아남을 말하는 터이고, 정화된 정서란 여과 없이 표현된 것은 문학적 정서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 본능적 감정을 느끼며 산다. 그 속에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는 취사선택의 행위를 끊임없이 하면서 살아가지, 본능적 감정만으로 살아진 않는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옳은지 그른지, 단순히 개인의 취향에서만 온 것인지 혹시 공공의 이익은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생각하게 된다. 이때 취사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각자의 인생관 내지는 가치관이겠는데, 이것에 의해서 정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새로 정화되어진 젓에 의해서 이것이 바뀌기도 하지 않을까.
물론 취사선택은 아픔이 따른다. 애국지사들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직장을 위해 혹은 가정이나 인간관계를 위해 정신적 물질적 손실을 감당해야 한다면 거기에는 아픔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아픔이란 나와 상대가 하나가 되는 데 따르는 고통이다.
수필은 ‘나’를 쓴 것이므로 나의 정서를 쓴다는 말인데, 어쩌면 살아오면서 내가 온몸으로 견뎌온 거부와 수용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홈이 생겨 조금 갈라진 비자반이 다시 하나가 될 때도 저희들 내부에서는 충돌과 화해 혹은 거부와 수용의 과정이 치열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흔적을 남겼으리라. 그 아픔이 성숙되고 정화되어 하나의 검정 실금으로 탄생되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격이 높아졌으니, 값이 올라감은 당연한 귀결이라 싶어진다.
지금 그 비자반은 가장 바둑실력이 좋은 막내 시동생 집에 있다. 가끔 비자반을 내놓고 자녀들에게 인생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어찌 바둑의 수만을 가리킬까. 아마 비자나무의 유연함도 닮아가도록 함께 가르친다는 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