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사기열전(史記列傳)
황 의순 소장 유당(幽堂)(서울 법대 68학번)
한국이 선진(先進)강국이 된 기적!. (우리의 60, 70, 80대가 살아온 삶 자체가 기적(奇蹟)). 후손(後孫)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
조금 길지만 한국인이라면 꼭 끝까지 한번 읽어 보시고 대한민국의 저력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1950년부터 3년간의 전쟁이 한반도에 남긴 것은 거의 없었다.
건물은 무너졌고, 다리는 끊어졌으며,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 1953년 10월!. 영국 가디언지의 특파원 제임스 카메론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가 본 광경을 기사로 썼다.
거리마다 무너진 건물들 뿐이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게 거의 없다. 사람들은 판잣집과 천막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맨발로 돌아다닌다.
겨울이 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어 죽을지 상상조차 끔찍하다.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다.
서울 인구 100만명 중 60만명이 판자집에서 태어났다.
상수도가 없었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 1953년 11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한국은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이건 그냥 폐허다.
원조로 연명하는 거대한 난민촌일 뿐이다.
숫자로 보면 더 충격적이었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 였다. 당시 세계 최 빈국으로 꼽혔다.
에티오피아가 70달러 였다. 한국이 에티오피아보다 가난했던 것이다.
산업시설은 거의 다 파괴됐다. 전쟁 전에 있던 공장 600개 중 500개가 폭격으로 망가졌다.
남은 공장도 돌아갈 전기가 없었고, 전기가 있어도 돌릴 기술자가 없었다.
◆ 1954년 3월, 미국 타임지(Times)가 한국 특집 기사를 냈다. 제목이 충격적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파괴된 나라.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전쟁 전 남한 인구는 약 2천만 명이었는데 북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까지 합치니 2,500만 명이 넘었다.
좁은 땅에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만 넘쳐났다.
◆ 1955년 1월, 세계은행(世界銀行)이 한국에 조사단을 보냈다. 6개월간의 조사를 마쳤다.
마치고 그들이 낸 보고서의 결론은 냉정했다.
이 나라가 자립경제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 30년 간은 지속적인 국제 원조가 필요하며 그마저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30년간 원조를 받아도 성공을 장담 못 한다는 것이다. 당시 국제사회의 시각은 명확했다. 한국은 영구적인 원조 대상국이 될 거라는 것이다.
◆ 1957년 4월, 일본의 한 경제학자(經濟學者)가 도쿄대학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이 일본 수준의 경제를 이루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 조차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 이었으니까.
먹을 것도 없고, 일할 곳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절망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계가 주목하지 않은 곳에서,...
1955년 9월, 한국 정부가 이상한 결정을 하나 내린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나라에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학교부터 짓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1960년 사이 한국에 세워진 학교 수가 무려 3,247개였다. 하루에 2개씩 학교가 생긴 셈이다.
판자집 마을에도 학교가 들어섰고, 산골 마을에도 학교가 세워졌다.
1957년 8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이 경기도 한 시골 학교를 방문했다.
그가 쓴 기사가 흥미로웠다.
한국 정부는 우선 순위를 잘못 잡은것 같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빵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를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맞는 말처럼 들렸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교육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멈추지 않았다.
◆ 1958년, 서울 청계천 판자집 마을에 야학이 생겼다. 낮에 일하느라 학교에 못 간 어른들을 위한 학교였다.
공장 노동자들이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야학에 모였다.
뉴욕타임스 특파원이 1958년 11월에 이 야학을 취재했다.
그가 본 광경은 이랬다.
40대 노동자가 10대 학생 옆에 앉아 한글을 배운다. 전구 하나 아래서 30명이 공책에 글씨를 쓴다. 이들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배우려 했을까?.
당시 사람들은 알았던 것이다. 배워야 먹고 산다는 걸,...
글을 읽어야 기술을 배울 수 있고, 기술을 배워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 1959년, 놀라운 통계가 나왔다.
한국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진 것이다. 불과 6년 만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4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교육 현황을 조사 했다.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한국만큼 짧은 시간에 문맹률을 낮춘 나라는 전례가 없다. 국민의 교육열이 경제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경제 수준을 초과하는 교육열은 정확한 표현이었다.
가난했지만 배우는 건 멈추지 않았다. 굶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1960년 3월 한국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6%를 돌파했다.
같은 시기 인도는 61%, 필리핀은 72%였다.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이었는데도 취학률은 한국이 더 높았던 것이다.
◆ 하지만 1960년 국제 언론의 평가는 여전히 냉정했다.
1960년 1월 뉴욕 타임스 헤드라인이다.
한국 7년째 원조 의존!. 자립 경제는 여전히 어렵다.
설계는 여전히 한국을 끝난 나라로 보고 있었다.
학교를 아무리 많이 지어봤자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은 몰랐다. 195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196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갈 거라는걸,...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완전히 바꿔 놓을 거라는 걸,...
1960년이 끝날 무렵 한국은 여전히 가난했다.
여전히 원조에 의존했고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교육이라는 씨앗이,...
그리고 바로 다음에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할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 1961년 1월 1일, 한국의 수출액(輸出額)은 3,290만 달러였다. 수입액은 3억 4,300만 달러였고,... 10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한국이 수출하던 것들은 뭐였는지 아세요?. 텅스텐 원석, 생선, 김, 그리고 가발이었습니다.
1961년 1월 13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해 7월 충격적인 선언이 나왔다.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 하겠단다.
계산기를 두드려 볼까?. 3,29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면 30배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 1961년 9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소식을 듣고 기사를 썼다.
비현실적인 목표!. 한국 정부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원조 없이는 생존도 어려운 나라가 수출 강국이 된다는 건 환상이다.
냉정한 평가였다. 실제로 불가능 해 보였으니까,...
한국에는 팔만한 게 없었다. 공장도 별로 없었고 기술도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시작했다.
◆ 1962년 1월, 울산의 첫 공업단지(工業團地)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어촌 마을이었다. 그냥 바다와 모래사장 뿐이었다.
1962년 5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이 울산을 방문했다.
그가 쓴 기사다.
황량한 해변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인프라도 없고 숙련 노동자도 없다. 대체 무엇을 만들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맞았다. 당시 한국 사람들도 잘 몰랐다. 뭘 만들어 팔아야 할지를?,...
그냥 일단 공장부터 짓고 있었던 것이다.
◆ 1963년 11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한국인 123명이 내렸다. 광부들이었다.
탄광에서 일하러 온 젊은이들 이었다.
1964년 12월에는 간호사 130명이 독일로 떠났다. 독일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 였다.
그들이 버는 돈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송금됐다.
◆ 1965년 1월, 독일 쇼피겔지가 한국인 광부들을 취재했다.
기사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지하 1,000 m 갱도에서 일한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는다.
모두 조국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땅밑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었습니다. 독일사람들도 꺼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청년들은 그 일을 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
1964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가 7,936명 간호사가 1만 1,057명이었다.
그들이 보낸 돈이 1억 달러가 넘었다. 그 돈으로 공장 설립에 투자했다.
◆ 1965년 6월 22일, 한일 국교 정상화 조약이 체결됐다.
이게 얼마나 논란 이었는지 아시는가?. 서울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왜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냐?. 식민지 시절에 당했던 나라지 않느냐?.
그런데 또 일본과 손을 잡는다는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밀어 붙였다.
1965년 8월, 뉴욕 타임스가 이렇게 썼다.
한국은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감정보다 경제를 택한 것이다. 과연 국민들이 이를 받아 들일까?.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에서 기술과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 기술자들이 일본 공장으로 연수를 갔다. 몇 달씩 기술을 배워왔다.
◆ 1966년 3월, 일본 니케이신문이 한국 연구생들을 취재했다.
한국인들은 메모를 엄청나게 한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퇴근 후에도 숙소에서 공부한다. 이런 열정은 전후 일본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배우려는 열망이 대단했던 것이다. 일본 기술자들도 놀랄 정도였다.
◆ 1965년 10월, 베트남에 한국군이 파병됐다. 이것도 엄청난 논란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겨우 12년 만에 또 전쟁터로 가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 대가로 받은 달러가 또 한국으로 들어왔다. 군인들 월급 군수 물자 조달 건설 프로젝트까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이 10억 달러가 넘었다.
◆ 1966년 8월, 미국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가 느낀 분위기가 독특했다.
한국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일한다. 공장은 밤낮 없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일한다.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근무 시간은 주 60시간이 넘었다.
하루 12시간씩 일주일 내내 일했다.
◆ 1967년 4월1일, 포항에 제철소 건설이 시작됐다.
세계은행이 이 프로젝트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시는가?.
한국에는 철광석도 없고 석탄도 없다. 제철소를 지어봤자 경쟁력이 없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투자하지 않는 것을 권고한다.
세계은행이 반대한 것이다. 경제성이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했냐고요?.
일본에서 돈을 빌렸다. 그리고 그냥 지었다.
◆ 1968년 2월1일, 경부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km. 당시로서는 엄청난 프로젝트 였다.
1968년 3월, 영국 로이터 통신이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은 자동차도 별로 없는데 왜 고속도로를 만드는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맞는 말이었다.
1968년 한국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2만 7천 대였다.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이 넘는데 자동차는 겨우 2만 대다.
그런데도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자동차가 없으니까 고속도로를 안 만드는게 아니라 고속도로가 있어야 자동차가 늘어난다는 논리였다.
1968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 차이퉁 기자가 경부 고속도로 공사장을 찾았다.
그가 본 광경이다.
수천 명의 인구가 삽과 곡괭이로 산을 깎는다. 대형 장비가 부족해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공사 속도가 놀랍다.
1970년 7월 7일, 경부 고속도로가 완공 되었다. 세계 건설사에서도 기록적인 속도였다.
1969년 들어서면서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출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 1969년 1월, 한국의 수출액이 5천만 달러를 돌파했다. 섬유, 가발, 전자제품들이 미국으로 쏟아져 나갔다.
1969년 11월 30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정확히는 10억 240만 달러였다. 1961년에 세운 목표 기억 하시죠?.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 정확히 8년 만에 달성했다.
1969년 12월 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일면에 큰 기사를 실었다.
우리가 틀렸다. 비 현실적이라고 했던 그 목표를 8년 만에 달성했다. 이것은 경제의 기적이다.
비 현실적이라고 했던 그 신문이 틀렸다고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한국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1970년 1월 1일, 새로운 목표가 발표됐다.
1980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 달성, 또 10배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외신들이 뭐라고 했을까?.
놀랍게도 조용했다.
왜냐하면 1960년대를 지켜본 그들은 알아 버렸거든,...
한국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걸 진짜로 해낸다는 걸,...
◆ 1970년 12월, 미국 뉴욕 타임스가 한국 특집기사를 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더 이상 원조 대상이 아니라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올라!!.
10년 전만 해도 자립 불가능하던 나라가 이제 신흥 공업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196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이제 공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글을 읽을 줄 알고 계산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
그들이 1970년대 한국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 1971년 3월, 울산 이포만의 모레사장에서 기공식이 열렸다. 현대 조선소 건설 기공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 회사가 조선소를 짓겠다고 나선 것이다.
조선소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설계도도 없었다. 그냥 모래 사장만 있었다.
1971년 내년 6월, 영국로이드 선급 협회 조사단이 울산을 방문했다.
로이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선박 인증기관이다. 그들이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만들려고 한다.
도면도 제대로 없다. 경험 있는 기술자도 거의 없다. 이건 미친 짓이다.
로이드 조사단의 보고서에 실린 내용이다.
실제로 미친 짓처럼 보였다. 보통은 조선소를 먼저 완성하고 그 다음에 배를 만들었다.
현대는 두 가지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2년 3월, 현대 조선소에 유럽에서 기술자들이 왔다. 스코틀랜드 조선 엔지니어들 이었다. 한국 기술자들을 교육하러 온 것이었다.
1972년 6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패럴드지가 이 엔지니어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다.
한국인들은 하루 16시간씩 일한다.
주말도 없다.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10가지를 물어본다. 배우려는 열망이 무섭다.
당시 현대 조선소 기술자들은 정말 잠을 안잤다.
낮에는 외국 엔지니어한테 배우고 밤에는 설계도를 그렸다.
새벽까지 토론하고 아침이면 다시 현장으로 나갔다.
1973년 6월 28일, 현대 조선소에서 첫 배가 진수됐다. 26만톤급 유조선 애틀랜틱베로노였다. 발주한 건 그리스 선주였다.
그런데 이 배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였다.
용접이 안 맞아서 수백 번을 다시 했다. 철판이 휘어져서 밤새워 수리했다.
외국 엔지니어들이 불가능 하다고 한 부분을 한국 기술자들이 밤새 연구해서 해결했다.
1973년 7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현대 조선소를 취재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들!. 매뉴얼에 없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 매뉴얼을 만든다. 이들에게 불가능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일 뿐이다.
정확한 관찰 이었다. 한국 조선 기술자들은 문제를 만나면 포기하지 않았다.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책을 찾아냈다.
1974년 들어서면서 한국 조선업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 했다. 납기를 지킨다는 소문이었다.
다른 나라 조선소 들은 배 건조가 자주 지연 됐거든요. 6개월 1년씩 늦어지는게 흔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약속한 날짜에 배를 인도했다. 심지어 조금 일찍 인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1975년 3월, 일본 NHK신문이 한국 조선업을 분석한 특집기사를 냈다.
한국 조선소의 비밀은 완벽주의다. 작은 부품 하나에도 불량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이게 바로 한국식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빠르지만 정확하고 싸지만 품질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이,...
◆ 1975년 7월, 포항 제철소가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1968년에 착공해서 7년 만이었다.
세계은행이 반대했던 그 프로젝트 기억하시죠?.
1975년 9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포항제철을 취재했다.
설계 은행이 틀렸다. 포항 제철은 가동 첫 해부터 흑자를 냈다. 철광석도 석탄도 없는 나라에서 만든 철강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비결은 역시 완벽주의였다.
포항제철 노동자들은 불량률을 0에 가깝게 만들려고 했다. 조그만 흠집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 1976년 1월, 한국산 전자제품이 미국 시장에 동시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다. 또 하나의 싸구려 아시아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산 제품의 고장률이 일본산보다 낮았던 것이다.
1978년 11월, 미국 소비자 리포트가 TV의 신뢰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한국산 TV가 일본산보다 고장이 적었던 것이다.
1978년 12월, 뉴욕 타임스가 한국 전자제품 공장을 취재하러 왔다.
그들이 발견한 건 드라마였다.
완벽한 제품을 만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일본 도요타의 시스템과 비슷했다.
하지만 한국은 거기에 뭔가를 더했다. 바로 속도였다.
문제를 발견하면 멈추지만 해결은 더 빨리 했다.
◆ 1977년 12월, 한국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1970년에 세운 목표가 1980년까지 100억 달러였다. 3년 일찍 달성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수출 품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가발, 생선, 김, 같은게 주력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에는 배, 자동차, 전자제품, 철강이 주력이 됐다.
◆ 1978년 6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 기사를 냈다.
한국은 더 이상 저임금 국가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기술국가다. 품질에서 일본을 추격하고 있다.
20년 만에 일이었다. 1950년대에 희망 없다던 나라가 1970년대에 기술국가가 된 것이다.
◆ 1979년 3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의 차이통이 한국 공장들을 취재했다.
기자가 가장 놀란게 뭐였는지 아시는가?.
현장 노동자들이 설계도를 읽을 줄 안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다. 이건 단순 노동자가 아니라 기술자 수준이다.
1950년대에 미친 듯이 지었던 그 학교들 기억나시죠?.
그 학교를 나온 젊은이들이 197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계산을 할 줄 알았다. 매뉴얼을 이해했고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다.
1979년 여름, 현대 자동차가 캐나다 수출을 시작했다. 포니라는 모델이었다.
한국이 독자 개발한 첫 자동차였다.
1979년 8월, 캐나다 글로브 앤 메일지가 포니를 시승한 후 기사를 썼다.
놀랍다. 한국차가 이 정도 품질일 줄 몰랐다. 일본차 모델보다 완성도가 높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역시 완벽주의였다.
현대 자동차 연구원들은 수천 번의 테스트를 반복했다. 고장 나는 부분을 찾아내서 계산했다. 완벽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1979년 10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700달러를 돌파했다. 1953년 67 달러였던게 26년 만에 25배가 된 것이다.
같은 달 프랑스 파이낸셜타임스가 특집을 실었다.
한국의 비밀은 교육받은 노동력과 완벽주의의 결합이다. 이들은 단순히 눈이 빠른게 아니라 정확하다.
하지만 1979년 말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2차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다.
석유 가격이 3배로 뛰었다. 전 세계가 경제 위기에 빠졌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석유를 전부 수입에 의존했으니까,...
◆ 1979년 12월, 월스트리트 저널이 한국 경제를 걱정하는 기사를 냈다.
한국 경제 오일 쇼크로 위기 성장둔화 불가피!.
실제로 1980년 한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경제가 후퇴한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세계는 다시 한번 한국을 지켜봤다. 이번에는 진짜 끝인가?. 20년간의 기적이,...
그런데 한국은 또 다시 놀라운 선택을 한다. 위기 속에서 더 과감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1980년대를 만들게 된다.
1980년 한국은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경제는 마이너스 5.2% 성장, 오일쇼크로 물가는 치솟고 실업자는 늘어났다. 거기에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 1980년 5월, 광주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많은 외신들이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다.
1980년 6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특집을 냈다.
한국의 고속 성장은 끝났다. 정치 불안과 경제위기가 겹쳤다. 이제 장기 침체가 시작될 것이다.
현실적인 전망이었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20년간 달려온 경제가 멈춰 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1981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경제가 다시 6.4%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비밀은 중동에 있었다.
◆ 1981년, 한국 건설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따내기 시작한다.
1981년 3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취재했다.
사막 한가운데서 한국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있다. 5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공사는 계속된다.
중동 발주처들이 한국 건설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납기를 지키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배와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쌓은 건설 기술이 1980년대 중동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그 돈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1984년 한 해에만 중동에서 벌어들인 돈이 137억 달러였다.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그 돈을 소비하는게 아니라 또 투자했다.
◆ 뭐에 투자했을까?. 바로 반도체였다.
1983년 2월 삼성이 64KDRAM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현대 전자가 설립됐다.
두 회사 모두 반도체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은 일본과 미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의 NEC, 도시바, 히타치, 미국의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이들이 시장을 나눠 가졌다.
한국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어 보였다.
1983년 9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이렇게 썼다.
삼성과 현대의 반도체 도전은 무모하다.
일본과 미국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한국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냉정한 평가였다. 실제로 말이 안 되는 도전처럼 보였다. 반도체는 기술 집약 산업이라서,...
막대한 연구 개발비가 필요하고 수율을 높이는데만 몇 년이 걸린다.
그런데 한국은 특이한 전략을 썼다. 일본보다 더 빠르게 더 대량으로 생산한 것이다. 속도 경쟁이었다.
1984년 11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익스플로러스 기자가 본 것이다.
연구원들이 공장에서 산다. 24시 3교대가 아니라 연구원 상당수가 아예 공장에 상주한다.
문제가 생기면 밤을 새워 해결한다.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원들은 일주일에 80시간 넘게 일했다. 주말도 없었다.
1986년 삼성이 256KDRAM에서 일본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1987년 DRAM에서는 거의 동시에 개발에 성공했다.
1987년 3월, 일본 NEC의 한 임원이 도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무섭다?. 우리가 새 제품을 내 놓으면 6개월 뒤에 똑같은 걸 만들어 낸다. 그것도 더 싼 가격에,...
일본이 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조선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이 반도체에서도 맹추격을 시작한 것이다.
◆ 1985년 2월, 한국 정부가 특이한 정책을 발표했다. 전자 전기 공학과 정원을 2배로 늘린다는 것이다. 대학마다 반도체 연구소를 만들라고 지원금을 뿌렸다.
1985년 9월, 미국 뉴욕 뉴욕타임스가 한국 대학들을 취재했다.
한국 대학생들이 반도체 공학에 몰린다.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전자 공학과를 선택한다.
10년 후 이들이 산업 현장에 나오면 엄청난 기술 인력이 쏟아질 것이다.
정확한 예측이었다.
1985년에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1990년대 초반에 삼성 현대 LG 반도체 연구소로 들어갔다.
1986년 들어서면서 세계 반도체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D RAM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1985년 256K D RAM 1986년에는 30%까지 떨어졌다.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줄줄이 적자를 냈다. 미국 반도체 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인텔은 아예 D RAM 사업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가격이 떨어져도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공장을 더 지었다.
1986년 11월, 독일이 쇼킹한 내용의 한국 반도체 산업을 분석한 조사를 했다.
그런데도 한국 반도체 회사들은 투자를 했다. 미친 전략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계산이 있다. 불경기가 끝나면 생산 능력을 가진 회사가 시장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1970년대 오일쇼크 때와 똑같은 전략이었다. 지금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1987년, 반도체 시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D RAM 가격이 다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반도체 회사들의 정책이 빛을 발했다.
1987년 11월, 삼성전자가 4차 D RAMS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일본도 미국도 아닌 한국이 처음으로 개발한 것이다.
◆ 1987년 12월 2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일면 헤드라인이었다.
한국 삼성전자 D RAM 세계 최초 개발 반도체 강국으로 부상!!.
불과 4년 전만 해도 무모하다고 했던 도전이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1988년 2월, 일본 NHK 신문이 긴급 특집을 냈다.
한국에 추월 당했다. 반도체 기술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서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은 추격자가 아니라 선두 주자다.
한국 반도체의 비결이 뭐였을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1988년 3월에 분석 기사를 냈다.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평균 근무 시간은 주 72시간이다.
일본 엔지니어들이 퇴근할 시간에 한국 엔지니어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속도전에서 한국을 따라잡을 나라가 없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다. 품질이었다.
1987년 11월, 미국 IBM이 한국산 반도체 품질 테스트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산 D RAM의 불량률이 일본산보다 낮았던 것이다. 빠르기만 한게 아니라 정확하게까지 했다.
1970년대,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에서 만들어진 완벽주의 문화가 반도체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1988년 7월,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이 20억 달러를 돌파했다. 5년 전만 해도 0에 가까웠던게 이제 주력 수출 품목이 된 것이다.
◆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전 세계가 한국을 봤다. 그리고 놀랐다.
1988년 10월1일, 미국 뉴욕타임즈가 올림픽 특집 기사를 냈다.
이게 30년전 페허였던 나라가 맞나?. 서울은 도쿄나 파리 못지 않은 현대 도시다. 전자채점 시스템, 대형 스크린, 완벽한 중개 시스템,...
올림픽 자체가 한국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다.
올림픽 기간 내내 단 한 건의 대형 사고도 없었다. 교통도 막히지 않았고 시설도 고장나지 않았다.
1988년 10월 3일, BBC가 서울 올림픽 폐막식 생 중계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서울 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완벽하게 운영된 대회다. 한국인들의 조직력과 완벽주의가 빛났다.
올림픽이 끝난 뒤 한국에 대한 세계의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개발 도상국이 아니었다. 선진국 문턱에 있는 나라였다.
1989년,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5,432달러를 넘었다. 1953년 67 달러였던게 36년 만에 81배가 된것이다.
같은 해 11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 기사를 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한국이 선두로 나서다. 홍콩 싱가포르 타이완 그리고 한국이 네 나라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한국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였다.
1980년대가 끝날 무렵 한국은 더 이상 가난을 극복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제 기술 강국이 됐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전자제품에서 세계 시장을 위협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는 한국에게 전혀 다른 도전을 던지게 된다. 이번에는 진짜 위기가 찾아올 거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국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선진국 문턱에 섰다는 생각이었다.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크게 변했다. 냉전이 끝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게 한국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이제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할 수 있게된 거였으니까,...
1992년 8월, 삼성전자가 런던의 디자인 센터를 열었다. 도쿄에도 뉴욕에도 센터를 만들었다.
더 이상 값싼 제품을 만들어 파는게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1993년 6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삼성 런던 디자인센터를 취재했다.
삼성 연구소에는 30개국에서 온 디자이너들이 일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이제 글로벌 인재를 채용한다.
한국이 세계로 나간게 아니라 세계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 1993년 12월, 현대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엑센트라는 모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다. 또 하나의 싸구려 아시아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대는 놀라운 전략을 썼다. 10년 10만 마일 보증이었다.
이 차가 10년 안에 고장나면 우리가 다 책임진다는 것이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도 안 하던 걸 한국 회사가 한 것이다.
1994년 3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썼다.
현대 10년 보증은 도박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믿는다.
1970년대 일본차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차도 미국 시장을 잠식할 것이고,...
◆ 1995년 10월 12일, 한국이 경제협력 개발기구 OECD에 가입했다.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한국은 OECD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회원국이 된 케이스였다.
1950년대에 UN 원조를 받던 나라가 40년 만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것이다.
1995년 10월 13일, 영국 이코노미스트 헤드라인이었다.
한국 마침내 선진국 반열에 42년 만에 기적 완성 한국은 환호했다.
드디어 해 냈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선진국이 됐다고?.
하지만 바로 이 순간 한국 경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성장한 대가였을까?.
◆ 1996년 1월, 한보 철강이 부도위기에 몰렸다. 부채가 5조원이 넘었다.
그해 3월 한보철강이 결국 무너졌다. 그리고 연쇄반응이 시작됐다.
7월에 삼미그룹이 쓰러졌고, 11월에는 진로그룹이 무너졌다.
1997년 1월 한보사태 특검이 시작됐다.
정치권과 재벌의 유착이 드러났다. 외신들이 불안한 신호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1997년 3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기사를 냈다.
한국 기업들의 부채 비율이 위험 수준이다. 대 기업들이 무리하게 차익 경영을 하고 있다.
금융 시스템이 취약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다르다고 했다.
외환 보유고도 충분하고 경제 펀더멘털도 튼튼하다고 말했다.
1997년 7월 2일, 태국에서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태국 바트가 폭락했다.
그리고 그 위기가 아시아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7월 인도네시아가 흔들렸다. 8월 말레이시아가 위기에 빠졌다. 필리핀도 위험했다.
한국은 아직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다르다고 했다.
그런데 10월 들어서면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외국 자본이 한국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23일 기아 자동차가 부도 처리됐다. 대마불사라는 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997년 11월 들어서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17일 외환 보유고가 60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한 달 전만 해도 300억 달러가 넘었는데 말이다.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은행들도 위험했다.
달러가 없어서 수입 대금을 못내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1997년 11월 21일 저녁, 정부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총리가 나와서 발표했다. 국제 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 순간 한국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IMF 그건 망한 나라가 가는 곳이었다. 42년간 쌓아올린 모든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1997년 11월 22일, 미국 뉴욕 타임스 1면 헤드라인이었다.
한국의 기적이 끝나다. IMF 구제금융 신청한 같은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렇게 썼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중 가장 강했던 한국이 무너졌다. 이것은 단순한 금융 위기가 아니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실패다.
11월 말 IMF 조사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국경제를 샅샅이 조사했다. 그리고 12월 3일 구제금융 조건을 발표했다.
총 550억 달러 지원 그대신 강력한 구조 조정을 요구했다.
금리인상, 긴축재정, 기업 구조조정, 금융 개혁,...
◆ 1997년 12월 18일, 한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IMF 위기 한가운데서 치러진 선거였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됐다.
19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IMF와 최종 합의문에 서명했다.
조건은 가혹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98년 1월 상황은 끔찍했다. 기업들이 대량 해고를 시작했다. 하루에 수천 명씩 일자리를 잃었다. 1월 한 달 동안만 30만 명이 실직했다.
거리마다 명예퇴직 안내문이 붙었다. 40대 가장들이 짐을싸서 회사를 나왔다.
1998년 2월, 영국 한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을 냈다.
한국은 최소 10년은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됐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1998년 3월 실업률이 7%를 넘어 섰다. 실업자가 150만 명을 돌파했다.
1년 전만 해도 2%대였던 실업률이 3배 이상 뛴 것이다.
거리에는 노숙자가 늘어났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자는 사람들이 생겼다. IMF 극복캠페인 현수막이 곳곳에 붙었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1998년 4월, 독일 기자가 서울을 취재했다.
한국인들의 눈빛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42년간의 기적이 2년 만에 무너졌다.
이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세계는 한국이 끝났다고 봤다. 10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어떤 전문가들은 20년도 후도 모자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국 국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세계를 또 다시 놀라게 만들게 된다.
◆ 1998년 1월 5일, 이상한 광경이 서울 곳곳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금을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집에 있던 금반지 금목걸이 금돼지 저금통까지 모두 들고 나와서 나라에 기부했다. 우리가 모은 금으로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다.
1998년, 그가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서울거리 곳곳에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금을 기부하기 위해 줄을 선 것이다.
할머니가 결혼반지를 내 놓는다. 학생들이 돼지 저금통을 깨서 가져온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다.
금 모으기 운동!. 이건 정부가 시키지 않았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방송국에서 처음 제안했고 시민들이 호응한 것이다.
3개월 만에 모인 금이 227톤이었다. 350만 명이 참여했다.
돈으로 환산하면 22억 달러였다.
◆ 1998년 4월,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이 현상을 분석한 특집 기사를 냈다.
한국인들은 국가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받아들인다. 이런 국민적 단합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들다. 이것이 한국의 진짜 저력이다.
금 모으기만이 아니었다.
기업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8년 2월부터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삼성은 자동차사업을 포기했다. 그 대신 반도체와 휴대폰에 모든 걸 걸었다.
현대는 기아를 인수했다. 두 회사를 합쳐서 규모를 키운 것이다.
LG는 석유화학 부문을 정리하고 전자와 통신에 집중했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략이었다.
◆ 1998년 6월, 일본 미케이신문이 한국 기업들을 취재했다.
한국기업들이 스스로를 해체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른다. 이런 과감함은 일본기업에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1998년 한 해 동안 3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률이 8.6%까지 치솟았다.
가족을 부양하던 가장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40대, 50대가 거리로 내 몰렸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었다.
◆ 1998년 9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서울을 취재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이 벤치에서 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회사원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 개혁을 밀어 붙였다.
1998년 7월, 금융 구조법이 통과됐고 부실 은행을 정리하고 금융 시스템을 투명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5개 은행이 문을 닫았다. 10개 은행이 합병됐다. 은행원 1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 1998년 12월, 놀라운 신호가 나타 나기 시작했다. 수출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반도체 수출이 회복됐고 자동차 수출도 증가했다.
외환 보유고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1999년 1월, 한국 경제가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전년 같은 기간 대비 5.4% 성장이었다.
외신들이 놀라기 시작했다.
10년은 걸린다던 회복이 1년 만에 신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6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 특집을 냈다.
믿을 수 없는 회복 속도다. 1년 전만 해도 한국은 끝났다고 봤다. 그런데 이미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비결은 역시 국민들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었다.
1999년 말, 인터넷 벤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IMF로 실직한 젊은이들이 창업에 나섰다.
네이버가 1999년에 시작됐고, 다음도 같은 해에 출범했다.
NC소프트 넥슨 같은 게임 회사들도 이때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 3월 코스닥지수가 폭발적으로 올랐다. 벤처 열풍이었다.
20대 청년들이 100만 장자가 됐다.
2000년 6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의 벤처 붐을 취재했다.
한국이 실리콘밸리를 만들고 있다. IMF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젊은 인재들이 대기업 대신 창업을 선택한다.
2001년 8월 23일, 역사적인 날이 왔다.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한 것이다.
원래 2004년까지 갚기로 했던 빚을 2001년에 다 갚아 버린 것이다.
3년 9개월 만이었다.
세계가 10년은 걸린다고 했던 회복을 3년 만에 완료한 것이다.
2001년 8월 2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일면 헤드라인이었다.
불사조 한국 IMF 초기 상황 세계 경제사에서 가장 빠른 회복,
같은 날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의 차이통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법을 안다. 이것이 한국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IMF 위기는 한국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2002년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는 완전히 회복됐다. 실업률이 3%대로 떨어졌고 성장률은 7%를 넘어섰다.
그런데 2002년에 한국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한 일 월드컵이었다.
2002년 5월 31일 월드컵이 개막했다. 한국 대표팀은 16강 진출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폴란드를 이기고, 포르투갈을 이기고, 이탈리아를 이겼다.
스페인까지 꺾고 4강에 올랐다.
광화문에 100만 명이 모였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 응원을 했다. 대한민국 함성이 서울을 뒤덮었다.
2002년 6월 26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의 거리 응원을 일면에 실었다.
이것은 단순한 음원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다. 100만 명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단 한건의 사고도 없다. 한국인들의 조직력이 놀랍다.
월드컵이 끝난 뒤 세계는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IMF위기를 극복한 나라. 그리고 이제 축구에서도 4강에 오른 나라.
◆ 2003년,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겨울연가였다.
일본 중년 여성들이 배 용준에게 열광했다. 2004년 중국에서 한국 가수 보아가 인기를 끌었다. 한류라는 단어가 국제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 2004년 9월, 영국 BBC가 한류 현상을 다룬 특집을 방송했다.
일본과 중국에서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 한국 드라마 한국음악 한국 음식 아시아 젊은이들이 한국 문화에 열광한다.
2005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부문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인텔을 제치고 1위가 된 거였다.
2006년, 현대 자동차 판매량이 400만 대를 돌파했다. 세계 5위 자동차 회사가 됐다.
2007년,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섰다. 1953년 67 달러였던게 54년 만에 300배가 된 것이다.
2007년 10월,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 특집을 냈다.
한국은 두 번 기적을 만들었다.
첫 번째는 1960 - 1990년대 경제 성장이었고, 두 번째는 1998 - 2007년 IMF 극복이었다. 이제 한국은 명실 상부한 선진국이다.
IMF 위기 10년 만에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돼 있었다. 더 강해졌고 더 경쟁력 있는 나라가 됐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도약할 준비가 돼 있었다.
바로 문화였다.
◆ 2008년 9월, 세계 경제가 다시 흔들렸다.
미국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 2008년 금융위기였다. 전 세계가 공항에 빠졌다.
미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유럽도 위기에 빠졌다.
10년 전 IMF악몽이 떠올랐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2009년 한국경제는 0.8% 성장을 기록했다. 플러스였다.
OECD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한 나라였다.
2009년 4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분석 기사를 냈다.
한국은 10년 전과 다르다. IMF 위기를 겪으며 체질을 완전히 바꿨다. 이제 한국은 위기에 강한 나라가 됐다.
그리고 2009년 한국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문화 수출입이 본격화된 것이다.
◆ 2009년 9월, 아이돌 그룹들이 YouTube에서 조회수를 쌓기 시작했다.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원더걸스, 이들의 뮤직비디오가 수백만 조에서 콘서트를 찍었다.
당시는 스마트폰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YouTube를 볼 수 있게 됐다.
2010년 3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한국은 인터넷으로 문화를 수출한다. 영화관이나 TV가 아니라 YouTube로 직접 전 세계에 음악을 판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소프트파워다.
2010년 스마트폰이 전세계로 퍼졌다. YouTube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한국 아이돌 그룹들의 영상이 수천만 조회 수를 찍기 시작했다.
2011년 7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문화산업 특집을 냈다.
한국의 문화 콘텐츠 수출액이 42억 달러를 넘었다. 드라마 음악 게임 영화를 합친 금액이다. 이제 문화가 한국의 새로운 수출 엔진이다.
그런데 외신들은 궁금했다. 한국 문화가 왜 인기 있는거지?. 처음에는 그냥 일시적 유행이라고 생각했다.
◆ 2011년 11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SM 엔터테인먼트를 취재했다.
그들이 발견한 건 놀라웠다.
한국은 문화를 산업으로 만들었다.
아이돌그룹을 만드는 과정이 마치 반도체를 만드는 것처럼 체계적이다.
연습생을 선발해서 5년씩 훈련시킨다. 노래 춤 외국어 연기까지 가르친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완벽한 퍼포먼스를 목표로 했다.
1970년대 제조업에서 만들어진 완벽주의 문화가 엔터테인먼트에도 적용된 것이다.
그리고 2012년 7월, 진짜 게임 체인저가 등장했다. 바로 사이의 강남 스타일이었다.
2012년 7월 15일, YouTube에 올라간 이 뮤직 비디오는 전 세계를 뒤집어 놨다.
말춤이 전 세계로 퍼졌다.
2012년 10월 조회수 1억 돌파. 11월 5억 돌파, 12월 21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YouTube 조회수 10억을 넘었다.
미국 대통령이 말춤을 추었다. 유엔 사무총장이 따라 추었다. 영국 총리도 춤을 췄다.
2012년 12월 미국 타임지가 사이를 표지 인물로 선정했다.
세계를 춤추게 한 남자. 강남 스타일은 YouTube 시대에 첫 글로벌 히트다. 그런데 외신들이 주목한 건 사이 개인이 아니었다.
2012년 12월 30일, 미국 뉴욕 타임스가 분석 기사를 냈다.
강남 스타일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이 20년간 준비해온 문화 산업의 결과다.
1990년대부터 정부가 지원하고 기업들이 시스템을 만들었다. 2010년대에 그 결실이 터져 나온 것이다.
정확한 분석 이었다.
한국은 1990년대부터 문화 콘텐츠에 투자해 왔다.
그리고 2010년도에 스마트폰과 YouTube라는 완벽한 플랫폼을 만난 것이다.
2013년 6월 13일, 방탄 소년단이 데뷔 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작은 기획사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YouTube와 트위터로 전 세계 팬들과 직접 소통했다. 한국어로 노래했지만 메시지는 보편적이었다.
2014년부터 방탄 소년단의 팬덤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남미에도, 유럽에도, 중동에도 팬들이 생겼다.
2015년 11월, 영국 BBC가 방탄 소년단 현상을 취재했다.
이들은 언어 장벽을 뛰어 넘는다. 한국어를 모르는 팬들이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른다. SNS로 직접 소통하며 전 세계의 팬덤을 만들었다.
2017년 5월, 방탄 소년단이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다. 한국 가수로는 처음이었다.
2018년 5월, 방탄 소년단의 앨범이 빌보드 200차트 1위에 올랐다. 비 영어권 가수로는 12년 만이었다.
2018년 10월 10일, 미국 뉴욕 타임스 1면에 방탄 소년단이 실렸다.
방탄 소년단은 비틀스 이후 가장 성공적인 보이 그룹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어로 노래한다. 이것은 문화 권력의 이동을 의미한다.
같은 시기 한국 영화도 세계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9년 5월 25일, 봉 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 최초였다!.
2019년 5월 26일, 프랑스 르몽드가 1면에 실었다.
한국 영화가 칸을 정복했습니다. 봉 준호는 사회 불평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한국적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2020년 2월 9일 역사가 만들어졌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것이다. 비 영어권 영화로는 최초였다.
그것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2020년 2월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헤드라인 이었다.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를 이겼다. 이것은 문화 권력의 이동이다. 더 이상 영어가 세계 영화의 언어가 아니다.
오스카 시상식에서 봉 준호 감독이 한 말이 인상적 이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리고 2021년 9월 또 하나의 폭탄이 터졌다.
Neflix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었다. 2021년 9월 17일 공개된 이드라마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11개국에서 1위를 했다. Netflix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2021년 10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분석 기사를 냈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 콘텐츠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제작비 연출 연기 스토리 모든 면에서 할리우드 수준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할리우드를 넘어섰다.
2019년 방탄소년단 빌보드 1위. 2020년 기생충 아카데미 4관왕. 2021년 오징어 게임 전 세계 1위. 3년 연속 한국 문화가 세계를 장악한 것이다.
2021년 12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을 냈다.
한국은 어떻게 문화 강국이 되었나?.
70년 전 먹을 것도 없던 나라가 이제 전세계 사람들에게 문화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비결이 뭐였을까?.
역시 완벽주의 였다.
K-POP 아이돌들은 수천번 연습을 한다. 한 동작 한 음정도 완벽할 때까지 반복한다. 드라마 제작진은 디테일에 집착한다.
영화 감독들은 타협하지 않는다. 1970년대 제조업에서 만들어진 완벽주의 문화가 2010년대 문화 콘텐츠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교육이 있었다.
1950년대에 학교를 지었던 그 선택이,... 글을 읽고 생각하고 창의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문화 콘텐츠를 만든 것이다.
2019년이 끝날 무렵 한국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제조업 강국이면서 동시에 문화 강국이 된 것이다.
세계가 한국 자동차를 타고 한국 스마트폰을 쓰면서 동시에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음악을 듣는 시대가 온 것이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이상한 폐렴이 보고됐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코로나 19 팬데믹 이었다.
2020년 3월 전 세계가 봉쇄됐다. 이탈리아가 멈췄고 스페인이 멈췄다. 미국도 뉴욕이 폐쇄됐다.
경제가 완전히 얼어 붙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봉쇄하지 않았다.
대신 검사, 추적, 격리라는 삼티 전략을 썼다.
드라이브스루 검사소가 등장했다. 차에 탄 채로 10분 만에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하루 검사능력이 2만 명을 넘었다.
2020년 3월 중순 미국 뉴욕 타임스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1면에 실었다.
한국은 봉새 없이 코로나를 통제하고 있다. 대규모 검사와 디지털 추적 시스템이 핵심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효과적 방역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2020년 4월, 영국 BBC가 한국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한국의 코로나 대응은 2015년 메르스 실패에서 배운 교훈이다. 실패를 분석하고 시스템을 완전히 바꿨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한국의 DNA가 또 다시 작동했다.
정확한 분석 이었다.
한국은 2015년 메르스 때 38명이 사망하는 실패를 겪었다. 그 후 감염병 대응 시스템을 완전히 재설계 했다.
2020년 5월, 세계 보건기구 WHO가 한국을 모범 사례로 지정했다.
각국 정부가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배우러 왔다. 그런데 코로나 와중에도 한국 경제는 멈추지 않았다.
◆ 2020년, 삼성 전자가 오직 통신 장비 수출을 늘렸다.
전 세계가 재택 근무를 하면서 통신 인프라 수요가 폭발 했거든요.
LG화학과 삼성 SDI는 전기차 배터리 공급을 늘렸다.
유럽 자동차 회사들이 전기차로 전환하면서 한국산 배터리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2020년, 한국 경제는 마이너스 0.9% 성장을 기록했다. 마이너스이긴 하지만 OECD 국가 중 가장 선방한 나라였다.
미국은 마이너스 2.8%, 유럽은 마이너스 6% 였으니까,...
2021년 들어서면서 한국은 완전히 회복 했다. 7.1% 성장을 기록 했다.
그리고 2021년 한국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 왔다. 반도체 슈퍼사이클 이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노트북 태블릿 수요가 폭발했다. 데이터 센터가 급증했고 AI 연산수요도 늘어났다.
2021년, 삼성 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수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AI용 고대 역폭 메모리 HBM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 했다.
2021년 10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SK하이닉스 특집을 실었다.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승자다. 엔비디아 GPU에 들어가는 HBM의 80%를 공급한다. 삼성도 따라잡지 못하는 기술력이다.
2022년, 또 다른 한국 기업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현대 자동차였다?.
2022년 현대차 글로벌 판매량이 680만대를 넘었다. 세계 3위로 올라선 것이다.
특히 전기차 아이오니고가 유럽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2022년 5월, 독일 쇼피겔지가 아이오니고를 시승한 후 기사를 썼다.
현대차가 테슬라를 위협한다. 디자인, 성능, 가격 모든 면에서 경쟁력이 있다. 독일 자동차 회사들이 긴장해야 할 상대다.
◆ 2023년 들어 서면서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꼈다. 미국 금리 인상으로 경기침체 우려가 커졌다. 그런데 한국은 또 다시 선택을 했다. 위기일 때 투자 하는 것이었다.
2023년 3월, 삼성 전자가 용인에 반도체 메가클러스터 건설을 발표했다. 300조 원 투자 계획이었다.
2023년 7월, SK하이닉스도 용인 클러스터에 120조원 투자를 선언했다.
2023년 8월, 미국 뉴욕 타임스가 이렇게 분석했다.
한국은 경기 침체기에 투자한다. 1980년대 오일쇼크 때도 1997년 IMF 때도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위기 때 투자해서 회복기의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이다.
◆ 2023년 11월, ChatGPT 열풍이 불면서 AI 반도체 수요가 폭발했다. 엔비디아 HBU에 SK하이닉스 HBM 3각 들어갔다.
2024년 1월, SK하이닉스 주가가 사상최고가를 경신했다. 시가 총액이 120조 원을 넘어섰다.
2024년 3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SK하이닉스 특집을 냈다.
SK하이닉스는 AI 시대에 숨은 감자다. 엔비디아가 주목받지만 진짜 핵심 기술은 한국에 있다. HBM 없이는 AI혁명도 없다.
2024년 상반기 한국의 반도체 수출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50% 증가했다.
그리고 2024년 7월 역사적인 순간이 왔다.
한국이 1인당 국민 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1953년 67달러에서 2024년 4만달러, 71년 만에 597배 증가한 것이다.
2024년 8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경제 70년을 분석한 대형 기획 기사를 냈다.
한국은 어떻게 세계 12 경제 대국이 되었는가?.
이것은 기적이 아니다.
명확한 전략이 있었다. 기사는 한국 성공의 6 가지 요소를 정리 했다.
첫 번째, 교육이었다.
1950년대 배고플 때도 학교부터 지었던 그 선택,... 인적 자원이 곧 천연자원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속도였다.
한국은 항상 남들보다 빨랐다. 계획을 세우면 즉시 실행했고 문제가 생기면 밤을 새워 해결했다.
세 번째, 완벽주의였다.
작은 부품 하나 드라마 한 장면 안무 한 동작도 완벽하게 만들려고 했다. 대충이라는 게 없었다.
네 번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 이었다.
1950년대 전쟁 1970년대 오일쇼크 1997년 IMF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5번의 위기를 5번 다 기회로 만들었다.
다섯 번째, 국민적 단합 이었다.
1998년 금 모으기 운동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 2020년 코로나 방역 위기 때마다 국민이 하나가 됐다.
여섯 번째, 절대 만족하지 않는 자세 였다.
반도체 1위를 해도 다음 세대를 준비했다. K-팝이 성공해도 다음 그룹을 키웠다.
1위를 지키는게 1위가 되는 것보다 어렵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2024년 10월, 프랑스 르몽드가 한국 특집 시리즈를 냈다.
제목이 인상적이다.
기적이 아닌 전략 한국은 어떻게 성공 방정식을 만들었나?.
기적이 아니라 전략!. 정확한 표현 이었다.
◆ 2024년 11월, 현재 한국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수소 에너지, 바이오, 헬스케어, 차세대 산업에서도 한국은 선두 그룹에 있다.
K-POP은 여전히 세계를 열광시키고 한국 드라마는 Netflix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 영화는 계속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있다.
2024년 12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2025년 전망 특집에서 한국을 다뤘다.
한국은 다음 산업 혁명에서도 선두에 설 것인가?.
그들의 과거 기록을 보면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법을 아는 나라다.
1953년 한 외국 기자가 서울 거리를 보며 말했다.
이 나라는 100년이 지나도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틀렸다.
한국은 100년이 아니라 50년 만에 일어섰다. 그리고 70년 만에 세계 12 경제 대국이 됐다.
세계에 증명했다.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천연 자원이 없어도, 땅이 좁아도, 전쟁으로 모든게 파괴돼도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필요한 건 교육, 속도, 완벽주의, 위기극복 능력, 국민적 변화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 정신!.
이 6가지만 있으면 어떤 나라든, 어떤 개인이든 어떤 조직이든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1953년부터 2024년까지 71년의 기록으로 국제 언론이 지켜본 대한민국의 이야기였습니다.
기억하세요. 기적은 없습니다. 전략과 실행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 황 의순 서울대 법대 68학번
= 옮겨온 글 =
漢陽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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