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6~9세기에 동안 기온이 차츰 올라가면서 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늘고, 생산량도 증가했다. 고구려 시대에는 벼농사를 짓지 못했던 두만강 북쪽 노성(盧城) 지역에서 발해(渤海: 698~926)시대에는 벼농사가 이루어질 만큼 기온이 상승했던 것이다. 또한 6~7세기 약(藥) 관련 업무 실무자인 약아(藥兒)에게 쌀을 지급한 기록인 ‘지약아식미기(支藥兒食米記)’라 불리는 백제 목간(木簡)이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2002년에 발견된 바 있다. 여기에는 약초를 담당하는 채약사(採藥師) 관리에게 급료로 쌀을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임진강변에 위치한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무등리2보루(無等里二堡壘)에서는 6~7세기경 고구려군대의 군량창고에서 조와 쌀이 반반 정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 시기에 고구려 남부 지역에서 주식이 조와 쌀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군인들이 조와 쌀을 먹었다면, 고구려 귀족들은 쌀을 주식처럼 먹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삼국시대 후기에는 쌀 생산과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 통일신라 사람들의 주식은 이제 쌀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발해의 경우는 쌀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지리적 여건상 쌀이 주식의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벼농사에 매진한 고려와 조선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주식으로 자리 잡은 쌀은 고려시대에 더욱 일반화되었다. 고려는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경지면적을 확대하기 위해 산에 논과 밭을 만들기도 했고, 저습지와 간척지 개발도 활발했다. 고려시대에는 쌀이 화폐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조선 역시 농본(農本)정책을 내세워 쌀의 증산을 위해 노력했다. 1429년 세종의 명을 받들어 정초(鄭招) 등이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設)]은 가장 오래된 농서(農書)로, 논밭 갈이법, 벼의 재배법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1492년 강희맹(姜希孟)이 출간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은 벼농사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1655년 신속(申洬)이 지은 [농가집성(農歌集成)]은 모내기 보급에 큰 공헌을 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조선 초-중기에 발행된 농서들이 벼농사를 강조한 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주식이 쌀이었음을 말해준다.
곡물의 가격과 주식
 쌀은 다른 잡곡에 비해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매우 높은 편이다. 또 맛이 좋으므로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곡물이다. 하지만 모든 농민들이 벼를 재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논이 만들어져 한다. 밭벼는 논벼에 비해 생산량이 크게 적다. 따라서 논에서 벼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력을 많이 투여하여 논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벼농사의 특성상 관개(灌漑)시설이 부족한 곳에서는 벼농사를 짓기가 곤란하다. 게다가 가뭄이 들면 다른 작물에 비해 벼농사의 타격이 가장 크다. 따라서 적은 노동력을 투입해 수확할 수 있는 잡곡류에 비해 쌀은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부자들에게 쌀은 주식이었지만, 가난한 농민들은 비싼 쌀을 생산해놓고도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쌀을 세금으로 나라에 내야만 했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비싼 쌀을 팔아 값싸고 양이 많은 잡곡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값비싼 먹거리인 흰쌀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는 것이 가난한 자들의 소원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쌀은 1년 내내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리를 수확한 5월부터 가을걷이를 하는 9월까지는 쌀이나 조 대신에 보리를 주식으로 삼는 농민들이 많았다. 계절뿐만 아니라, 지리적 조건에 따라 사람들의 주식이 다르기도 했다. 쌀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작물이다. 지구의 연평균 기온이 올라갈 때에는 북부 지역에도 벼농사가 가능했지만, 16~17세기 전 세계적으로 추위가 닥쳤을 때에는 남부 지역에서나 벼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었다. 벼농사에 불리한 북부지역에서는 조(粟)농사가 많이 지어졌다. 때문에 북부 지역 사람들은 쌀밥보다 조밥을 즐겨먹었다.
주식의 변화
 20세기 들어 한국의 식생활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일제시기 일본은 자국민의 식량 소비를 위해 한반도에서 쌀을 마구 수탈해 가져가고, 만주에서 콩, 옥수수 등의 잡곡을 들여와 우리 겨레에게 먹였다. 강압에 의해 식생활에 변화가 생긴 셈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소득증대와 서구식 식생활의 영향으로 밀가루와 육류의 소비가 차츰 늘어났다. 1970년 한국인 1인당 연간 곡물 소비량은 쌀 121.8㎏, 보리 36.8㎏, 밀 13,8㎏ 이었으나, 2010년에는 쌀 72.8㎏, 보리 1.3㎏, 밀 33.7㎏로 크게 변했다. 밀은 국내 자급률(自給率)이 1% 미만이지만, 외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해오면서 한국인이 두 번째로 많이 소비하는 곡물이 되었다. 반면 쌀과 함께 1년 2모작을 지을 수 있는 보리는 급격하게 소비가 줄어들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곡물 소비량 전체가 감소한 것이다. 반면 육류 소비량은 1970년 5.2㎏에서 2010년 40㎏로 크게 증가했다. 또 1961년 불과 1인당 연간 45g만 소비하던 귀한 식품이던 우유는 2010년에는 무려 64.7㎏로 무려 1,400배 이상이나 소비가 급증했다. 한때 서민들의 음식으로 냉대를 받았던 잡곡은 이제는 건강식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잡곡의 소비량이 줄자, 생산량도 줄었다. 그 결과 잡곡의 가격이 쌀보다 비싸졌고, 잡곡이 도리어 부자들의 음식이 되고 있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우리 겨레의 주식이었던 쌀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앞으로 쌀이 아닌 다른 식품이 우리의 주식으로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참고문헌: 정연식, <조선시대 식생활과 음식문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2005;오영찬, <도토리밥에서 쌀밥까지>,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8;이준정, <작물섭취량변화를 통해 본 농경의 전개과정>, [한국상고사학보] 73집, 2011;한경선, <곡물의 소비변화에 따른 한국의 주식 유형>,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10-4,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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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용만 선생님 좋은글 잘봤습니다. 헌데 혹시 담시 문집 글 가지고 계신지요? 갖고계시다면 내용좀 올려주셨으면 합니다..ㅠㅠ
담시 문집은 있다는 말만 들었고, 보지는 못했습니다.저도 구하고 싶습니다.
소나무 껍질을 먹는다는 것, 의외로 동아시아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저는 최소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헝거 게임> 이라는, 최근에 영화로도 개봉한 영미계 소설에 대해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이 소설 안에 소나무 껍질을 먹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I’m hungry, too, but I don’t dare break into my precious store of crackers and beef yet. Instead, I take my knife and go to work on a pine tree, cutting away the outer bark and scraping off a large handful of the softer inner bark. I slowly chew the stuff as I walk along. After a week of the finest food in the world, it’s a little hard to choke down. But I’ve eaten plenty of pine in my life. I’ll adjust quickly.
(pdf 파일로 가지고 있어서 정확한 페이지는 모르겠는데, 파일에 153~154페이지라고 적힌 부분의 내용입니다)
(1권에서 74회 헝거게임이 시작된 직후에 캣니스가 배낭 하나를 챙겨서 숲 속으로 도망친 직후의 일입니다. 번역이 잘 되어 있으므로 번역본의 번역을 따 옵니다.) 배는 고프지만 아직은 소중한 크래커와 육포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칼을 꺼내 소나무 겉껍질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안쪽 껍질을 한 움큼 큼직하게 베어낸다. 일주일 동안 세계 최고의 음식만 먹고 살았더니 삼키기가 조금 힘들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먹고 살았던 소나무가 얼만데, 금방 적응하겠지.
=> 소나무 껍질이라는 게 겉껍질 안쪽의 부드러운 속껍질이라는 것이라든가 크게 베어내어 먹는 부분도 우리가 아는 소나무 껍질을 먹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익히지 않고 생으로' 먹은 것만 다르지만, 이건 소설 상황상 불을 피울거나 시간 여유를 충분히 갖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리 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아는 방식과 거의 비슷하게 '목피'(소나무 껍질)를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죠. 서양 쪽에도 소나무 껍질을 구황작물처럼 먹는 문화가 있었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