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 : 신라 진평왕 때 장군. 관등은 소판(蘇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伊飡)
임영리(任永里), 대장군 용춘(龍春)•백룡(白龍)•서현(舒玄), 중당당주(中幢幢主)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백룡 (白龍: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귀족. 629년(진평왕 51) 8월 왕명을 받아 파진찬(波珍飡)으로서,
이찬(伊飡) 임영리(任永里), 파진찬 용춘(龍春), 소판(蘇判) 대인(大因) 및 서현(舒玄)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 함락시켰다.
칠숙 (柒宿: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대신.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631년(진평왕 53) 5월
아찬(阿飡)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9족(族)도 함께 처형당하였다
변품 (邊品: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장수. 611년(진평왕 33) 백제가 가잠성(枷岑城)을 침입하였을 때,
가잠성 성주인 찬덕(贊德)은 죽음으로써 싸웠으나 끝내 성을 백제에 빼앗기고 말았다. 618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인 변품은 단잠성의 회복을 위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변품이 이끈 신라군이 단잠성을 공격해서 성을 빼앗자 이 소식을 들은 백제가 병력을 내어
쫓아 왔으므로 양군이 서로 교전하게 되었다. 이때 변품을 따라 종군한 찬덕의 아들
해론(奚論)이 아버지의 원한을 갚는다 하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으니,
변품이 이끈 신라군이 이때를 타서 공격을 가하여 백제군을 물리치고 단잠성을 신라영역으로
하였다.
수품 (水品:金氏?)
열전 : 신라 선덕여왕 때의 관리.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으며, 그로 인하여 진골출신임을
알 수 있다. 635년(선덕여왕 4) 10월에 선덕여왕의 명을 받아 김춘추(金春秋)의 아버지
김용수(金龍樹:龍春이라고도 함.)와 더불어 파견되어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였다. 636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는데 아마 645년 11월까지 9년10개월 동안 재임한듯하다.
필탄 (弼呑:金氏?)
열전 : 신라 선덕여왕 때의 장군. 관등은 각간(角干)이었다. 선덕왕 5년(636)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는데 선덕여왕이 이를보고 말하길 ‘두꺼비는
성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서남쪽 변경에 이름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니 혹시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명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갑자기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사진 (思眞:金氏?)
열전 : 이찬. 선덕왕 6년(637) 봄 정월에 이찬 사진(思眞)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았다.
* 서불한(舒弗邯), 서벌한(舒伐邯)은 신라시대 첫째 관등인 각간(角干)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수승 (守勝:金氏?)
열전 : 신라 진덕여왕 때의 지방관. 진골출신으로 관등은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647년(진덕여왕 1) 2월에 우두주(牛頭州:지금의 춘천)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천효 (天曉:金氏?)
열전 : 신라 진덕여왕 때의 관리. 신라는 법흥왕 때에 율령(律令)을 제정하고 율령국가로
체제를 확립하여 나갔다. 그 과정의 하나로서 651년(진덕여왕 5)에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제정하는 관부인 좌이방부(左理方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장관으로 영(令)2인을 두었다.
좌이방부가 설치된 이듬해인 정월에 천효는 파진찬(波珍飡)의 관등으로서 좌이방부령에
임명되었다.
양수 (良首:金氏?)
열전 : 혹은 양수(良守).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관료. 태종무열왕원년(654)
이방부령(理方府令)으로써 왕명에 따라서 율령을 자세히 연구, 이방부격 60예조를 수정했다.
일원 (日原:金氏?)
열전 : 660년(태종무열왕 7) 9월 3일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참전하였다.
사찬(沙飡)의 관등으로서 왕자 인태(仁泰) 등과 함께 병사 7, 000명을 거느리고, 병사 1만명을
이끌고 사비성(泗沘城)을 진수(鎭守)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보좌하였다.
667년(문무왕 7) 당나라 왕이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하여 요동(遼東)의
역(役)에 나가게 하고, 당시에는 관등이 사찬에서 대아찬(大阿飡)으로 올라있던 일원을
운마(휘)장군(雲摩(麾?)將軍)을 삼으니 왕이 궁정에서 그 칙령을 받았다.
* 소설 ‘요하’에서는 아찬의 관등으로 일원(日元)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흥원(興元)과
계금당 총관으로 고구려 원정에 참가한 것으로 보아 동일인물의 잘못된 한자표기인 듯 보인다.
용문 (龍文: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때의 진골귀족. 668년(문무왕 8) 3월 새로 설치된
비열홀주(比列忽州:지금의 안변)의 총관(摠管)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의 관등은 제4위인
파진찬(波珍飡)이었다. 변경의 신설행정구역에 이처럼 고급관료를 임명하는 것은, 당시
신라가 총력전을 펼치던 고구려 공략에 비열홀주가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문훈 (文訓: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장군. 신라는 668년(문무왕 8)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를 원정하였는데, 그는 잡찬(雜飡)으로서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출전,
많은 전과를 올렸다.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는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당나라와의 전쟁을 수행해야 하였다. 675년 당나라는 숙위학생(宿衛學生) 김풍훈(金風訓)의
아버지 진주(眞珠)가 복주(伏誅)된 것을 구실로 침략하였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김풍훈을 향도로 하여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옴에 따라 문훈은 이와 대적하여 1천4백여명을
살해하고 군함 40척과 기마 1천여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해 9월 29일
매초성(買肖城:지금의 양주)에 주둔한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공격하여
전마 3만380필과 수많은 병기구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어 대 당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하였다.
문충 (文忠:金氏?)
열전 : 신라 태종 무열왕•문무왕 때의 중시(中侍)•장군. 655년(태종무열왕 2) 1월
파진찬(波珍飡)으로서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인 중시에 임명되었으며, 3년 뒤인 658년 1월
이찬(伊飡)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중시의 직책으로부터 물러났다. 이것은 집사부의 창설 당시는
중시가 이찬으로서는 임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뒤 661년 2월
상주장군(上州將軍)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는 백제유민을 격퇴하였다. 또한,
668년(문무왕 8) 신라가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토벌할 때,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흠순(欽純)•천존(天存)과 잡찬(#잡19飡) 진복(眞福), 파진찬 지경(智鏡),
대아찬(大阿飡) 양도(良圖)•개원(愷元)•흠돌(欽突)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출전하였다.
또한, 문충은 670년 7월 품일(品日)•중신(衆臣)•의관(義官) 등과 함께 백제부흥군을 토벌하여
63개의 성을 빼앗고 그 백성을 신라로 옮겼다.
문품 (文品:金氏?)
열전 :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장군. 661년(태종무열왕 8)2월 백제유민들이
사비성(泗沘城:지금의 부여)을 공격하였을 때,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 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 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 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익선(益宣:金氏?)
신라 진평왕 때의 관리. 효소왕 때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이는 득오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시점은 잘못 파악한 착오이다. 《삼국유사》에는
득오의 부역 사실이 효소왕 때의 일인 듯 기록하였으나, 이는 진평왕 때의 사실을 효소왕 때에
회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니 익선도 진평왕 때 인물이다.
모량리(牟梁里)출신. 아간(阿干)으로서 당전(幢典)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죽지랑(竹旨郎)의
낭도인 득오(得烏)를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차출하여갔다. 죽지랑이 낭도를 거느리고
득오를 면회갔을 때 마침 득오는 익선의 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죽지랑은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하고 득오의 휴가를 요청하였으나, 익선은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사리(使吏)인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에서 도세를 거두어서 돌아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자기 몫인
30석을 익선에게 주었는데도, 익선이 끝내 허락하지 않자 자기의 안장까지 주었다. 이 일이
조정의 화주(花主)에게 알려져서 익선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자, 익선은 달아나서 숨어버리고
그 맏아들이 대신 처벌을 받고 죽었다. 국왕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모량리 출신의 관리를
축출하여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못 붙이게 하였으며, 또한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하였다.
단, 이미 승려가 된 자라도 주요사찰에의 출입은 금지하였다. 그 결과 원측(圓測)은
모량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하였다.
금순 (金純:金氏?)
열전 : 무열왕 8년(661) 신라군이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싸워 패하여
물러났다. 왕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금순(金純), 진흠(眞欽),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종정 (宗貞:金氏?)
열전 :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지방관. 신라가 중국의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태종무열왕 7)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 5월에 압독주(押督州)를 신라와 백제간의 쟁탈지였던
대야(大耶:지금의 경상남도 합천)로 옮길 때, 아찬(阿飡)의 관등으로서 압독주의 장관인
도독(都督)에 임명되었다.
효천 (曉川: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장군. 관등은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나당전쟁 중이던
672년 당나라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이 각각 거느린 당군은 7월 평양에 주둔하더니
8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이어 백수성(白水城) 부근까지
진격하여 오매 신라군은 고구려 부흥군의 도움을 받아 당군 수천명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고
석문(石門)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적에 대한 방심으로 기습을 받아 대패할 때, 사찬(沙飡)
의문(義文)•산세(山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의복 (義服:金氏?)
열전 :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장수. 관등은 아찬(阿飡)이었다.
백제유민이 661년(무열왕 8) 봄 2월에 사비성을 공격해왔다. 무열왕은 이찬(伊飡)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임명하고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에 임명하는 등
수십명의 장수로 하여금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의복은 하주장군(下州將軍)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신라군은 백제군을 제대로 공격도 하지 못하다가, 4월 19일에는 퇴각하게 되었다.
대당군과 서당군(誓幢軍)이 먼저 떠나고, 하주군이 뒤에 떨어져 빈골양(賓骨壤:지금의 고부 동쪽)에 다다랐을 때, 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패퇴하였다. 죽은 자는 비록 적었으나 수레와
무기를 많이 잃었으므로 논죄의 대상이 되었다.
조주(助州:金氏?)
열전 : 대아찬(大阿飡). 668년 6월의 고구려정벌군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평양성 함락
직후인 9월에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두 아들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 등을 포로로 하고 귀환할 때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大阿飡) 조주(助州) 등이
함께 입당(入唐)하자 이들을 수행하였다.
수세 (藪世:金氏?)
열전: 고구려 멸망 전후에 활약한 장군으로 고구려정벌에 참여하였으며, 당나라에 들어가
외교활동을 하였다. 661년(문무왕 1) 7월에 조직된 고구려정벌군에 김군관(金軍官)•고순(高純)과
함께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으로 김유신(金庾信)을 따라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백제잔민의 진압이 시급하였고, 또 당군의 군량 보급을 주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의 고구려정벌군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평양성 함락 직후인
9월에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두 아들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 등을 포로로 하고 귀환할 때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大阿飡) 조주(助州) 등이
함께 입당(入唐)하자 이들을 수행하였다. 이때 그는 왕자 인태(仁泰)를 비롯하여 의복(義福)•
천광(天光)•흥원(興元) 등과 같이 숙위(宿衛)김인문을 따라간 전첩보고사(戰捷報告使)였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하여 670년에 한성주총관(漢城州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그뒤 정부의 입장과는 다른 내용 미상의 어떤 사건을 일으켜 도망가려다가 발각되어
대아찬 김진주(金眞珠)에게 피살되었다. 이때의 김진주는 풍훈(風訓)의 아버지로서 백제정벌에
무공을 세운 김진주와는 동명이인이다.
술실 (述實:金氏?)
열전: 신라 문무왕 때의 군관. 661년(문무왕 1) 7월 17일에 신라는 당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대를 출동하였다. 이때 술실은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에 임명되어, 8월에는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
달관 (達官:金氏?)
열전: 신라 문무왕대의 장군. 661년(문무왕 1) 당나라에서 숙위(宿衛)하던 김인문(金仁問)과
유돈(儒敦)이 돌아와, 이미 출병한 소정방(蘇定方)의 수륙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정벌군을
일으키기를 전하였다. 그리하여 문무왕은 7월 17일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 김인문 등을
대당장군(大幢將軍), 천존(天存) 등을 귀당총관(貴幢摠管) 등으로 하는 대군을 일으킬 때,
달관은 술실(述實)•문영(文穎)과 함께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이 되어 출정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부흥군의 공격으로 먼저 이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전개하여, 문무왕의 지휘하에
9월 25일 옹산성(甕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9월 27일 대책(大柵)을 불태워버리고 수천인을
죽이고 항복받았다. 문무왕은 이 공로를 치하하여 각간(角干)•이찬(伊飡)으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칼을 하사하고, 잡찬(曼飡)•파진찬(波珍飡)•대아찬(大阿飡)으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창을 하사함에 달관은 창을 하사받았다. 그뒤 670년 백제의 부흥군이 신라를 엿보자 7월에
달관은 장군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천관(天官) 등과 함께 출전하여 75성을 공취하고
9천인을 죽이고 백제유민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그러나 문무왕은 개선 후 중신•의관(義官)•
원흥(元興)과 함께 달관이 전투중 후퇴하였다 하여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용서받아
면직에 그쳤다.
의광 (義光:金氏?)
열전: 신라 삼국통일기의 장수. 661년(무열왕 8) 2월 백제 유민이 사비성(泗沘城)을 침공하므로
신라 무열왕이 이찬(伊飡)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서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의광은 낭당장군(郎幢將軍)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3월 5일에 품일이 휘하의 군대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城)남쪽에서 진을
칠 곳을 살펴볼 때, 백제 사람들이 신라군의 진영이 정비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급히 공격하니
신라의 군사들은 놀라 무너졌다. 3월 12일에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밖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을 진공 하였지만 한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4월 19일에 부득이 군사를
돌려서 빈골양(賓骨讓)으로 돌아오다가 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패하였다. 오직 의광과
상주장군(上州將軍) 문충(文忠)만이 백제군을 각산(角山)에서 격파하고나서 백제군의 진 안으로
들어가 2, 000여명을 목베었다. 같은해(문무왕 1) 7월 17일에 낭당총관(郎幢摠管)에 임명되어,
8월에 문무왕이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 이때 백제의 유민들이
옹산성(甕山城: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면 계족산성)을 차지하고 길을 막자 25일에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27일에 항복받았다. 이 전투에서의 공으로, 뒤에 논공행상을 할 때
관등이 일품(一品)오르고 창〔戟〕을 하사받았다.
대당 (大幢: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일모산군(一牟山郡: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태수.
신라가 661년(문무왕 1) 당나라의 요청으로 고구려에 출정하던 중 백제부흥군이 각지에서
일어나 길을 막았다. 이때 대당은 상주총관(上州摠管) 품일(品日)과 사시산군(沙尸山郡)태수
철천(哲川) 등과 함께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백제부흥군을 크게 깨뜨렸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백제군 천여명을 죽이니, 백제의 달솔(達率) 조복(助服)과 은솔(恩率) 파가(波伽)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철천 (哲川: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지방관리. 사호산군태수(沙戶山郡太守)였다.
661년(문무왕 1) 9월 상주총관(上州摠管) 품일(品日), 일모산군(一牟山郡)태수 대당(大幢)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백제인 1, 000명을 사살하고, 달솔(達率)
조복(助服)과 은솔(恩率) 파가(波伽) 등의 무리로부터 항복받아 내었다.
인선 (仁仙: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군관. 문무왕 2년(662) 2월 6일에 양오(楊隩)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良圖)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는데,
소정방에게는 은 5천7백 푼[分],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두발(頭髮) 30량(兩)과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춘장 (春長: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대신•장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나당전쟁이 일어났는데, 672년(문무왕 12) 8월 당군이 말갈과 함께 쳐들어와
석문(石門:지금의 황해도 서흥?)들에 진을 쳤을 때, 장군으로서 의복(義福)과 함께 왕의 명을
받아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대방(帶方:지금의 황해도 평산?)에 진을 치고
전투를 치렀다. 678년 3월에 대아찬(大阿飡)의 관등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679년 1월 병으로 면직되었다.
진복 (眞福:金氏?)
열전 : 신라 중대의 장군•대신. 혹명은 진복(眞服). 661년(문무왕 1) 6월에 중국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신라에 군대를 파견하여 도울 것을 청하매 신라가 7월 17일에 군대를
발동하였을 때, 서당총관(誓幢摠管)에 임명되어 출정하였다. 도중에 신라군의 진군을 가로막던
백제의 유민을 소탕한 공으로 9월 27일에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뒤 고구려의 평양 근처에
와 있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식량이 떨어져 도움을 청하자, 12월 10일에
부장군(副將軍)으로서 인문(仁問)•양도(良圖) 등 9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양곡을 싣고 가
662년 1월 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서 겨우 구근(仇近) 등 장사의 노력으로 전해주고
돌아와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665년 2월에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668년
3월까지 3년 1개월간 재임하였다. 그리고 6월 21일에는 잡찬(#잡19飡)으로
대당총관(大幢摠管)에 임명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관등 1급을 더하였다.
681년(신문왕 1) 8월에 서불한(舒弗邯)의 관등으로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어,
694년(효소왕 3)까지 약 12년 동안 재임한듯하다. 관등과 관직으로 볼 때 진골출신이었던
것 같다.
천품 (天品: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장군. 661년(문무왕 1)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고, 또 신라는 당의 요청에 의하여 같은해 7월 17일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한 군대를 출병할 때, 천존(天存)•죽지(竹旨) 등과 더불어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당군을 돕기 위하여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군이 철수하자 신라군도 고구려 정복에
실패하고 철병하였다. 그뒤 668년 6월 21일 대고구려전을 위한 나당연합군의 편성 때,
대아찬(大阿飡)의 관등으로서 많은 장군들과 더불어 귀당총관으로 출전하였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투항하여 전쟁이 끝나자 당과 연합하여 전투에
참가한 일부 신라의 지휘관들은 당군과 함께 당나라까지 갔으나, 천품은 바로 신라로
귀국하였다.
도유 (都儒: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 군관. 대아찬. 고구려 원정에 참가하여 잡찬 군관, 아찬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공략하였다.
용장 (龍長: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 진골귀족. 668년(문무왕 8) 6월 고구려 정벌시 아찬(阿飡)으로 있으면서,
잡찬(曼飡)군관 및 대아찬(大阿飡) 도유(都儒)와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참가하였다. 그 공으로 10월 22일에는 대아찬으로 승진하였으며, 10월 25일에는
국원경(國原京:지금의 충주) 사신(仕臣)으로서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한 문무왕 일행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숭신 (崇信: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군관. 관등은 잡찬(曼飡). 668년(문무왕 8) 6월에 문무왕은
38총관(摠管)에게 군사를 주어 당병(唐兵)과 평양에 모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숭신은 대아찬 문영(文潁), 아찬 복세(福世) 등과 함께 비열성주 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공략하였다.
복세 (福世: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군관. 관등은 아찬(阿飡). 문무왕이 668년(문무왕 8) 6월에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 김유신(金庾信) 등 38인의 총관과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당나라의
군사와 함께 평양에 모였을 때, 복세는 숭신(崇信)•문영(文穎)과 함께
비열주총관(卑列州摠管)으로 출전하였다. 이때 나당연합군은 9월에 이르러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신문왕 5년(685) 봄에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居列州)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여 비로소 9주(九州)가 갖추어졌는데,
대아찬 복세(福世)를 총관으로 삼았다.
선광 (宣光: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장수.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종군하여 활약했으며,
관등은 파진찬(波珍飡)에까지 올랐다. 특히, 그는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
아찬(阿飡) 장순(長順)•순장(純長)과 더불어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에 임명되어
고구려 원정에 출정하였다.
장순 (長順: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장군. 668년(문무왕 8) 아찬(阿飡)으로서 순장(純長) 및 파진찬(波珍飡)
선광(宣光)과 함께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다. 관직으로 보아
진골(眞骨)신분으로 생각된다.
순장 (純長: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때의 군관(軍官). 관등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668년(문무왕 8) 6월에
신라군은 고구려정벌을 위하여 38총관(摠管)에게 군사를 주어 당군(唐軍)과 신라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이때 그는 파진찬(波珍飡)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과 함께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춘장(春長)과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는 인물이다.
의복 (宜福:金氏?)
열전 : 파진찬. 아찬 천광(天光)과 서당 총관으로 고구려 원정에 참가했다.
* 문무왕 8년(668) 같은 년도에 의복(義福)의 이름도 다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물은
아닌 듯하다.
천광 (天光: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대신•장수. 668년(문무왕 8) 6월 신라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때, 아찬(阿飡)으로서 서당총관(誓幢摠管)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진공하였다.
같은해 9월 신라군이 당군과 더불어 평양성을 포위하여 고구려가 항복하자, 당나라
영공(英公: 李勣)이 고구려 보장왕과 왕자•대신 등 20여만명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천광은 인태(仁泰)•의복(義福) 등과 당군을 수행하여 당나라로 갔다. 그뒤 돌아와 673년 8월
파진찬(波珍飡)의 관등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678년 3월까지 4년7개월 동안
재임한듯하다.
천관(天官: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장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를 직할하기 위하여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중심으로 그 밑에 7주(州) 52현(縣)을 두어
직접 경영에 나섰다. 이에 신라는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나당전쟁을 벌였다.
그러자 670년(문무왕 10) 당은 백제유민과 결탁하여 신라에 대한 반항을 전개하였다.
이때 천관은 문무왕의 명을 받아서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의관(義官) 등 여러 장군과함께 백제의 63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성에 있던 사람들을 신라의 내지로 옮겼다
철천 (徹川: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인물. 관등은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뒤에도 당군은 평양에 주둔하면서 때때로 남침하여 신라를 괴롭히자, 신라는 당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673년(문무왕 13) 9월 왕명을 받고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당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서해를 진수(鎭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674년까지는 당군의 소규모 공격이 있었을 뿐 대규모 공세가 저지되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놓였다.
오기 (吳起:金氏?)
열전 : 대아찬. 문무왕 18년(678) 봄 정월에 선부령(船府令) 1인을 두어 선박에 관한 일을
맡게 하고 좌•우리방부(左右理方府)에 경(卿)을 각 1인씩을 더 두었다.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고 대아찬 오기(吳起)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천훈 (天訓: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의 지방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 땅에 무진주(武珍州)를
설치하였는데, 678년(문무왕 18) 4월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무진주의 장관인 도독(都督)에
임명되었다.
순지 (順知: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의 중시(中侍). 신문왕 3년(683) 봄 2월에 순지(順知)를 중시로 삼았다.
지상 (智常: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의 관리. 대아찬. 신문왕의 첫째 비는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이었는데, 681년(신문왕 1) 8월 8일에 김흠돌이 모반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왕비도 죄를 입고
궁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신문왕 3년(683) 신문왕이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먼저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대상 (大常:金氏?)
열전 : 신문왕 3년(683) 5월 7일에 이찬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그 집에 보내 책봉하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卯時)에 파진찬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부(梁部) 및 사량부(沙梁部) 두 부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게 하였다.
손문 (孫文: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의 귀족. 683년(신문왕 3) 5월 왕이 김흠운(金欽運)의 소녀(少女)를 맞아
부인(夫人)을 삼을 때 손문은 파진찬(波珍飡)으로서 파진찬 대상(大常)과 아찬(阿飡) 좌야(坐耶)
및 길숙(吉叔) 등과 함께 부인을 맞이하는 일을 맡았다.
용원 (龍元: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의 지방관. 신문왕 5년(685) 봄에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居列州)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여 비로소 9주(九州)가 갖추어졌는데,
대아찬 복세(福世)를 총관으로 삼았다.
원사 (元師: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의 중시(中侍). 688년(신문왕 8) 1월 중시 대장(大莊)이 죽자, 후임으로
이찬(伊飡)인 그가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신문왕의 왕권강화정치에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즉, 같은해 2월 선부(船府)에 장관 경(卿)1인을 더 두어 2인으로 하였고, 이듬해 1월 녹읍을
폐지하고 녹봉제를 실시하였다. 또, 달구벌(達句伐:지금의 대구)로 천도하려고 계획하였다.
690년 2월 병으로 2년 1개월 만에 시직을 물러나자, 아찬(阿飡) 선원(仙元)이 그의 후임이
되었다.
선원 (仙元: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의 진골귀족. 690년(신문왕 10) 2월 아찬으로서 원사(元師)의 뒤를 이어
집사부의 중시(中侍)가 되었다. 퇴임한 이유는 불분명하나 692년(효소왕 1) 8월까지
2년 6개월간 재임한듯하다.
원선 (元宣:金氏?)
열전 : 신라 효소왕 때의 중시(中侍). 692년(효소왕 1) 효소왕이 즉위하자, 대아찬(大阿飡)원선이
집사성(執事省) 중시에 아찬 선원(仙元)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695년 10월 늙어서 물러날
때까지 3년 2개월간 재임하였다. 후임에는 이찬(伊飡) 당원(幢元)이 임명되었다.
당원 (幢元:金氏?)
열전 : 신라 효소왕 때 중시(中侍). 이찬(伊飡)으로 696년(효소왕 5) 1월부터 698년 2월까지
2년 1개월간 중시로서 재임하였다. 그의 취임 무렵 신라는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설치되어
이미 설치된 동시(東市)와 함께 신라 수도의 3대시를 이루었는데, 신라 중대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재임기간중 상서로운 곡물인 가화(嘉禾)가 진상되는 등
대체로 평안을 유지하였으나, 698년 2월 수도인 경주에 지진이 일어나고 대풍(大風)으로
나무가 꺾이는 변고가 일어나자 늙음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체원 (體元:金氏?)
열전 : 신라 효소왕 때의 지방관.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효소왕 7년(698) 봄 정월에
우두주(牛頭州)의 총관이 되었다.
경영 (慶永:金氏?)
열전 : 혹명은 경현(慶玄). 효소왕 9년(700) 여름 5월에 이찬 경영(慶永)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금강 (金剛:金氏?)
열전 : 신라 태종무열왕 때 상대등(上大等). 655년(태종무열왕 2) 정월에 이찬(伊飡)의
관등으로 상대등이 되었다. 마지막 활동을 한 시기는 태종무열왕의 초기로 상대등의 관직을
차지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신라 중대에 들어와 왕권이 강화되면서 상대등은 상징적 관직이
되었는데, 이러한 시기에 상대등의 관직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이 의미를 더하여 준다.
더욱이 660년에 그가 죽자 그 후임에 김유신(金庾信)이 또한 이찬의 관등으로 상대등이
된 사실이라든지, 653년에 왕자 김인문(金仁問)이 군주(軍主)의 자리에 오른 것과, 655년에
왕자 문왕(文王)이 중시(中侍)의 벼슬에 오른 사실 등은 이 시기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염종 (廉宗:金氏?)
열전 : 신라 선덕여왕 때의 반란자. 647년(선덕여왕 16) 1월에 비담(毗曇)과 함께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고 왕을 폐위시키고자 하여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에 월성에 주둔한 관군과 10여일 동안 공방전을 벌이며
잘 버티었으나, 결국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였다. 염종 등은 살해되고
또 9족(族)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에 연좌되어 살해된 자가 30명이었다.
* 김씨(金氏)일수도 있지만 파주염씨(坡州廉氏)와 관련된 염씨(廉氏)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염장 (廉長:金氏?)
열전 : 신라 진덕여왕 때의 진골귀족.《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유신공(庾信公) 등과 더불어
사영지(四靈地)의 하나인 남산의 오지암(于知巖)에 모여서 국사를 의논하는
화백회의(和白會議)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는 진골출신으로서
대등(大等)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화랑세기》 ‘풍월주 17세 염장편’ 에 의하면 염장은 천주의 아들이다.
그 어머니는 지도태후이다. 그러므로 용춘과는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아우가 된다.
염장은 보종보다 여섯살이나 어렸으나 빼어난 재주가 엇비슷하였다. 보종과 염장은 서로 어떤
말을 하든지간에 듣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 애정은 마치 부부와 같았다고 한다.
염장은 매우 검약했다.
* 김씨(金氏)일수도 있지만 파주염씨(坡州廉氏)와 관련된 염씨(廉氏)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염거 (廉居:金氏?)
열전 : 진덕여왕때 육공(六公)중의 한사람으로 김유신(金庾信), 염장(廉長)과 함께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 김씨(金氏)일수도 있지만 파주염씨(坡州廉氏)와 관련된 염씨(廉氏)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리부 (弩里夫: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정치가•재상. 579년 8월 이찬(伊飡)으로 상대등이 되었다.
진평왕 때 위화부(位和部)•선부서(船府署)•대감(大監)•제감(弟監)•조부령(調部令)•승부령(乘部令)•
예부령(禮部令) 등의 관부를 설치하여 정치제도를 완비하는 데 기여하였다.
후직 (后稷:金氏?)
열전 : 이찬. 진평왕 2년(580) 봄 2월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으로 삼았다
수을부 (首乙夫:金氏?)
열전 : 이찬. 진평왕 10년(588) 겨울 12월에 상대등 노리부(弩里夫)가 죽었으므로
이찬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임영리 (任永里: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관료. 관등은 이찬(伊飡)이었다.
629년(진평왕 51) 신라는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진평왕 본기에
따르면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서현(舒玄), 부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고구려 낭비성을
침략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같은 책 김유신열전에는 629년 8월에 왕은 이찬 임영리와
파진찬(波珍飡)용춘•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 등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신라는 고구려군 5, 000명을 죽이고 1, 000명을 사로잡자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항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라측에서는 17관계의 제2관등인 이찬을 비롯하여
중요 인물이 장군으로서 참가한 전투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의 낭비성에 대한 공격이
상당히 중요한 전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임영리가 이 전투에서 가장 대표격이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건품 (乾品: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장군. 파진간(波珍干). 602년(진평왕 19)8월에 백제의 무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아모성(阿莫城:지금의 南原郡 雲峰面)을 포위하였다. 그때 신라에서는
파진찬(波珍飡)건품을 필두로 하여 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물리치게 하였는데, 그 휘하에는 원광(圓光)으로부터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귀산(貴山)과 추항(#추42項)도 소감직(少監職)을
맡아 함께 출전하였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위치 미상)서쪽 못가에 복병하고 있다가
추격하는 신라군을 기습하였으나, 신라는 무은•귀산 등의 분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무리굴 (武梨屈:金氏?)
열전 : 신라의 장군. 진골출신. 파진간(波珍干). 백제 무왕이 602년(진평왕 24) 8월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아막성(阿莫城:지금의 남원 운봉)을 공격하자, 신라 진평왕은 장군을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는데, 그는 파진찬(波珍飡)으로서 그때 파견된 장군 중의 한 사람이다.
그밖에 파견된 장군으로는 파진찬 건품(乾品)•이리벌(伊梨伐)과 급찬(級飡) 무은(武殷)과
비리야(比梨耶) 등이 있었다. 특히, 소감(少監)의 직책으로 출전한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은
선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리벌 (伊梨伐:金氏?)
열전 : 파진간(波珍干). 진평왕(眞平王) 19년 (602) 8월에 백제군이 침입해서 신라의
아막성(阿莫城; 지금의 雲峰)을 포위하자 파진찬 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과
급간(級干) 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에 반격 하였다.
이 싸움에 귀산과 추항에게도 소감(少監)으로 출전하여 싸웠다.
재량 (才良:金氏?)
생몰년 : *(580?)~*(640?)
열전 : 신라의 진골출신 귀족. 사간(沙干). 부인은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딸 김씨(金氏)이다.
신라의 명승 3형제 국교대덕(國敎大德), 의안대덕(義安大德), 명랑법사(明朗法師)의 아버지이다.
다미 (多美:金氏?)
열전 : 혹명 다미공 (多美公). 당이 백제를 점령후 신라를 치려하자 신라백성을
백제 백성으로 가장시켜 반란을 일으키고 이때 당을 치는 계책을 개진. 왕도 처음에는
꺼려 하였으나 유신도 권하자 이 계책을 받아들였다.
석품(石品: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모반자. 아찬(阿飡). 진평왕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에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장춘 (長春:金氏?)
열전 : 일명 장춘랑(長春郞).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무열왕 6년(659) 겨울 10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 신은 비록 백골[枯骨]이 되었으나 아직도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어
어제 당나라에 갔었는데,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치러 오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처럼 너무 애태우며 기다리시기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립니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파 (罷:金氏?)
열전 : 일명 파랑(罷郞/波浪).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무열왕 6년(659) 겨울 10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 신은 비록 백골[枯骨]이 되었으나 아직도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어
어제 당나라에 갔었는데,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치러 오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처럼 너무 애태우며 기다리시기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립니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진왕 (眞王:金氏?)
열전 : 신라의 장수•지방관. 아찬. 무열왕 8년(661)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 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 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 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원천 (原川:金氏?)
열전 :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 급찬. 문무왕이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소탕하는 전쟁중에 백제의 옛 땅을 지키던 당나라 군대를 신라군이 격파한 사실을 해명하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신라는 무력으로 당나라 군대를 싸워서 격퇴,
소탕하면서, 한편 외교상으로는 당나라에 번방(藩邦)의 신사지례(臣事之禮)를 다하는
양면정책을 시행하였다. 672년(문무왕 12)에 신라는 만부득이 백제의 잔당과 당군을 격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을 간곡히 개진하고 사죄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외교사절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정사에 급찬(級飡)원천, 부사에 내마(奈麻) 변산(邊山)이 포로로 잡은 병선낭장(兵船郎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내주사마(萊州司馬) 왕예(王藝), 본열주장사(本烈州長史) 왕익(王益),
웅천도독(熊川都督) 사마 예군( 軍), 증산 사마(曾山司馬) 법총(法聰)과 군사 170명을 데리고
은 3만3500푼, 구리 3만3000푼, 바늘 400개, 우황(牛黃)120푼, 금 20푼, 40승포(升布)6필,
30승포 60필을 공물로 가지고 갔다.
대토 (大吐:金氏?)
열전 : 신라시대 반란자. 관등은 아찬(阿飡)이었다. 당시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의 죽음으로
민심은 극도로 혼란하였으며, 또한 당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673년(문무왕 13) 모반(謀叛)하여 당나라와 내통하려다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고
처자들은 천인(賤人)으로 되었다.
좌야 (坐耶: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의 관리. 관등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신문왕의 처음 왕비는
김흠돌(金欽突)의 딸이었으나, 681년(신문왕 1) 8월 김흠돌이 모반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왕비도
죄를 입고 궁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신문왕은 683년 2월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비로 삼고자 5월 7일에 먼저 이찬(伊飡)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김흠운의 집으로
보내 부인을 책봉하였다. 같은날 묘시(卯時)에 좌야•대상(大常)•손문(孫文)•길숙(吉叔) 등이
왕명을 받고 각기 처랑(妻娘)과 급량부(及梁部)•사량부(沙梁部)의 부인 각 30인을 데리고
부인을 궁 안으로 맞이해왔다.
길숙 (吉叔:金氏?)
열전 : 신라 신문왕 때 관리. 관등은 아찬(阿飡)이었다. 신문왕이 납비(納妃)할 때, 비를 궁내로
모셔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즉, 신문왕은 683년(신문왕 3)에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를 받아들였는데, 먼저 왕의 작은아버지인 이찬(伊飡)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흠운의 집으로
파견하여 부인으로 책위(冊爲)하였다. 같은날 묘시(卯時)에 길숙을 파진찬(波珍飡)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와 더불어 파견하였고, 각 처랑(妻娘) 및 양부(梁部)•
사량부(沙梁部)의 부녀자 30인씩으로 하여금 부인을 궁내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득오 (得烏:金氏?)
열전 : 신라 진평왕 때의 낭도. 일명 득오곡(得烏谷). 득곡(得谷)•급간(級干)이라고도 한다.
뒤에 관리가 되어 급벌찬(級伐飡)의 관등에 올랐다. 그는 진평왕 말기에 화랑 죽지랑(竹旨郎)의
낭도로 있을 때 모량부(牟梁部) 아찬(阿飡) 익선(益宣)에 의하여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차출되어 나갔다가, 강제로 그의 밭에서 부역하게 되었다. 이에 죽지랑이 낭도를 이끌고 그가
일하는 현장에 달려가 익선에게 휴가를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결국 죽지랑이
그에게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기마안구(騎馬鞍具)를 선물로 주어 득오의 휴가를 얻어냈다.
이 소식이 조정의 화주(花主)의 귀에 들어가 익선은 처벌을 받았고, 득오는 부역에서
면제되었다. 뒷날 700년(효소왕 9)에 죽지랑을 사모하는 신라 향가(鄕歌)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었다.
《삼국유사》에는 득오의 부역 사실이 효소왕 때의 일인 듯 기록하였으나, 이는 진평왕 때의
사실을 효소왕 때에 회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竹旨郞條)>에는 득오가
당전모량익선아간(幢典牟梁益宣阿干)에게 볼모로 붙잡혀가서 부산성(富山城)의 창(倉)지기로
고생할 때 죽지랑이 구해주었으므로, 득오가 그를 사모하여 만가(挽歌)인 《모죽지랑가》를
지어 불렀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방랑자님 질문에 대한 답변: 직접 제작은 지금 상황에서는 포기했습니다. 여러 사업체나 회사들과도 조인을 해봤는데 투자할 메리트를 못느낄뿐더러 사업상 돈만 낭비할 가능성 크다고 판단된다는 군요. 결국 저희로써는 돈만 날렸습니다만 제작 자체를 포기할수는 없어서 기획부분을 남겨두고는 정리할 생각입니다.
헛.... 뭐... 돈만날려? 역사를 복원하는 사업 중 하나일터인데.. 돈만 날린다라... 내가 사업가였으면. 망하던 말던간에 왕창 투자하였을텐데... 국민의 생각이 그러니 역사를 빼앗기는것이 아닌가!!! 아참.. 그리고 인물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글쓰기에.. ---'김용만 선생님께 질문'---이라고 제목 쓰신후에 이 글 올리시
첫댓글 저기 혹시 우리역사게임을 만드는 모임의 황수철PD님이 아니신가요???? 맞으시다면.. 게임개발은 어떻게 되가오 있는지요??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만..
인물 설명을 직접하셧는지;; 대단한 노력파시네요 신라관등이 진골-6품정도는 김씨아님 못하는걸로 알고 있는데 다 김씨 일듯;; 신라사람중 알려진사람들이 김씨(김유신,알천등)아님 설씨(원효스님,설총)밖에 못들어 봤어여;
방랑자님 질문에 대한 답변: 직접 제작은 지금 상황에서는 포기했습니다. 여러 사업체나 회사들과도 조인을 해봤는데 투자할 메리트를 못느낄뿐더러 사업상 돈만 낭비할 가능성 크다고 판단된다는 군요. 결국 저희로써는 돈만 날렸습니다만 제작 자체를 포기할수는 없어서 기획부분을 남겨두고는 정리할 생각입니다.
장춘랑이나 파랑의 경우 품계는 언급이 없고 그냥 백제전에서 전사한 화랑이라는데 이들도 김씨일까요? 그리고 그밖에 이유로 목록에 추가한 인물들도 다수 있어서... 일단 이상의 목록은 대나마아하급이나 지방 향의 관직자는 제외한 인물들입니다만...
누군가 명쾌한글을 리플식으로 달아주셨으면 하는 간큰 바램입니다. ㅠㅠ
헛.... 뭐... 돈만날려? 역사를 복원하는 사업 중 하나일터인데.. 돈만 날린다라... 내가 사업가였으면. 망하던 말던간에 왕창 투자하였을텐데... 국민의 생각이 그러니 역사를 빼앗기는것이 아닌가!!! 아참.. 그리고 인물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글쓰기에.. ---'김용만 선생님께 질문'---이라고 제목 쓰신후에 이 글 올리시
면.. 조속히 답변해 주실겁니다..
우리도 나중에는 중국꼴 나겠군... 삼국지를 일본에 빼앗긴 뙤놈꼴이 나겠어......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