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교수에 대하여
예순이 지나 그는 양평읍 어디쯤에 2층집을 지었다. 벽돌을 메고 계단을 올랐고 철근, 유리창이나 실내 장식, 전구다마 하나까지 인부의 품을 전혀 내지 않고 혼자 오르내리며 완성했으니 ‘천재 괴짜’가 맞다. 게다가 수백 개의 시를 외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브라우닝의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윤동주의 ‘참회록’ 등이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좔좔 쏟아지니, ‘기억력의 자존심 강 작가’도 섬찟 오그라든다.
그는 ‘1부터 100’까지의 제곱 숫자를 낱낱이 암송하는데 10분 남짓으로 해결한다. 2의 제곱은 4이고 12의 제곱은 144, 19의 제곱은 361, 35의 제곱은 1225이며 67의 제곱은 4489, 83의 제곱은 6889, 99의 제곱은 9801이라고 쳇바퀴 돌리듯 투투툭 터져나온다. 정년 퇴임 이후 이 수학의 증명에 매료되었던 벗 허정 교수가 불시의 화禍를 당했으니 무섭고 놀라운 사태이다. 수학적 추론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그러니까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의 ‘정수론’마지막 정리 ‘n이 2보다 큰 자연수일 때……’로 시작되는 수리적 증명에서 비롯된다. 디오판토스의 ‘산술’에서 페르마가 영감을 받은 것이다. 페르마는 ‘이 정리에 대한 놀라울 증명을 발견했지만 여백이 부족하여 적을 수 없다’는 말로 숙제를 남겼다. 아무도 이 문제를 풀지 못하다가 350년이 지난 1994년 영국의 수학자 와일즈가 이 증명에 성공하지만.
허정 교수는 정년 퇴임 이후 이 증명의 정석을 새롭게 찾는데 밤낮으로 혼신의 힘을 바쳤다. 원래 꽂히면 곁눈질이 없는 체질이니 그 습의 연장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 드디어 해결되었다’
유레카의 마침표 찍는 마음으로 안마당에 나왔다. 그리고 베란다 위의 전구 다마 하나를 갈기 위해 의자에 올라섰단다. 원래 그랬다. TV에서 찌찌 소리가 나면 당장 분해했고 승용차가 고장 나면 몽키 스파나 들고 차 밑에 기어드는 체질이다.
마침내 알전구에 불이 켜지며 안도하는 순간.
관절이 삐걱 하면서 '억' 소리를 낸 것이다. 의자가 기우뚱 부서지며 거꾸로 떨어지면서 대리석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 전에 계단의 턱에 머리가 걸리며 목의 뼈 3번과 4번이 부러진 것이다. 순식간에 목 아래 전체가 마비되었고.
그의 아내 박순천 선생이 현관문 여는 소리를 들었으나 '여보' 소리가 나오지 않아 '케, 케' 신음으로 신호만 보냈다.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죽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이랄까, 밖으로 눈맑은 아내가 '이상하다' 갸웃거리며 돌아왔으니 기사회생의 끈을 잡은 것이다.
한 시간 후 그렇게 한 시간 후 앰뷸런스 두 대와 헬리콥터까지 출동되었단다. 사경을 헤매는 그를 보며 구조대원은 연신.
“잠들면 죽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숨쉬기 타이밍을 놓치지 않게.
'생년월일을 대보시오. 사는 집 주소 기억하나요?'
환자를 다그치면서 잠드는 걸 방해했다니 감사한 일이다. 허정 교수도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눈을 뜨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혈을 기울였으니.
그의 입원 100일차,
원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양평까지 찾아갔다. 그가 각고의 노력 끝에 회복된 공간은 목 위의 부분이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1층 파리바게이트에서 벌벌 떨며 대기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병철이 형!”
부르는 소리에 몸을 바싹 일으켰다. 허정 교수다. 휠체어에 위지한 채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했지만 살이 붙은 온화한 얼굴 표정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오히려 나를 보고.
“얼굴이 깨끗해 지셨네요. 수술했나?”
농담까지 퉁퉁 던지는 것이다.
입원 100일 만에 혼신의 재활 훈련으로 오른팔을 겨우 15센티쯤 올리게 되었는데 의사들이 기적이라고 혀를 내두른단다. 아무튼 나보다 그가 더 조잘조잘 수다를 떨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그를 만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83년에 그를 만났으니 40년 세월이 알싸하다. 대전의 <창의서점>에서 우연히 지역 문화를 찾아 『삶의 문학』을 뒤적이다가 “이거닷!” 감성이 꽂혀 쌘뽈여고 교사인 나를 찾아 논산까지 왔었다. 지역에서 출발하는 게 진짜 문학이라는 결의를 밝히면서 관촉사 소나무 그늘 아래로 술청을 잡았다.
부여 사는 이재무 시인과 동석하여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부르며 자운영 핀 논두렁을 두근두근 걸었으니 괜찮은 청춘이었다.
그는 서울공대 전자과 박사과정 재학 중 ‘에너지 연구소’에 다니는 중이었다. 문단에 몇 차례 왕래를 했으나 글판에 들어오지는 못했고 내 친구가 되었다가 아주 잠깐 끊어졌다.
85년에 나는 <민중교육 필화사건>으로 해직교사가 되었고 대전의 대입학원과 검정고시학원 강사로 전전하다가 동아일보 비정규직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그냥 무작위로 떠나 서울 복판에서 동가숙서가식할 결심으로 대전역 매표소에 서성이는데, 누가
“병철이형.”
그도 서울로 떠나기 위해 표를 끊다가 우연히 조우했으니, 만나야 할 운명이었을까. 하여.
그의 뒤를 따라 봉천동 자취방에서 18개월 정도 거居했었다. 자취라고는 하지만 그의 월급으로 나머지 식객은 꽁으로 먹는 무전취식이었다. 그 권력의 힘으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규칙’을 만들었고 또 그대로 실천했다. 새벽 6시만 되면 동거인들을 두들겨 깨웠고 빗자루 하나씩 배급시키며 골목 청소를 시켰다.
"깨끗이 안 치우면 밥 안 줘."
겁도 주면서.
그 대신 혼자 밥상을 차렸다. 냄비에 기름을 살짝 붓고 감자나 무를 넣어 데치면 금세 시원한 감자국이나 무국이 되었다. 가끔은 치킨도 시켜먹으면서 그 포만감으로 바닥에 웅크린 채 붓글씨를 쓰기도 했다. '열애 중이거나 짝사랑하는 여자들'의 이름이 벽에 너덜너덜 붙기도 하면서 5공화국 막바지 시국을 보내는 중이었다. .
세월이 흘러, 그의 헌신 덕분에 무료 자취생들은 교수나 기자가 되었고 수배자로 잠수 타던 벗은 판사가 되었고 나는 몇 년 뒤에 다시 선생이 되었지만 .
87년 가을 최교진 형이 서대문 교도서에서 석방되던 날, 그의 승용차로 대전 카돌릭농민회관까지 픽업을 시켜주었으니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그의 서비스는 엄칭한 헌신이었다. 솔직히 둘은 예전에 대충 스쳐갔던 사이 정도였으니 나로서도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그 교도소 앞에는 5공화국 해직교사 20여 명이 나와 있다가 우르르 식당안으로 들어갔으므로 나로서는 '허정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 아무튼 잘 다녀오시라며 등을 떠밀었으므로 그를 남겨놓고 해직교사들과 저녁과 쏘주도 한 잔 마시고 나왔더니.
"호떡 하나 드시우."
포장집 문을 열고 비시시 웃어서 나를 안심시켰다. 그랬다. 그는 우리를 대넌 카농 정문 앞에 내려놓고 군말없이 떠났을 뿐이다.
뭐든지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그게 일반인들과의 간극이다. 대전고를 턱걸이로 합격했으니 고입 초창기에는 교정에서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1등부터 100등까지 방을 붙여 청년 학도들을긴장시키던 그 학교.
그는 입학 1년 내내 이름자를 못 올리다가 2학년 때부터 명단에 오르면서 죽순 크듯 쑤쑥 승승장구하다가 전교 1등으로 올랐다. 벗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는 책상에 앉으면 몇 시간이고 오줌이 마려울 때까지 석고처럼 움직이지 않았다는데.
3학년 때는 22만 명이 보는 전국 단위 모의고사에서 1등을 하면서 요주 인물이 되었다. 한때 예비고사 수석으로 알고 인터뷰 연습도 했으나 그 앞에 두어 명이 더 있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대학교수 시절 그는 아침 8시부터 0교시 무료 강좌를 하는데 전자공학과 학부생의 80프로 이상이 참여한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허정 교수>를 치면 동영상 수백 개가 좌르르 뜬다. 교수 평점은 96점 이상이 되니 경쟁 자체가 어렵다.
몸의 통증이 너무 심하면 일부 마약 치료도 사용한다. 그랬더니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 수학 공식의 해결 시간이 더 단축되었다. 1부터 100까지 제곱 숫자를 헤아리는 시간이 십분의 일로 단축되었다.
몸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것처럼 답답한데 이공계 문제 풀이가 더 쉬워졌다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 불의의 사달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벌벌 떨며 움츠러들었다.
'만날 자신이 없다. 어떻게 얼굴을 보나?'
그러면서도 내 몸은 시내버스와 영동선 기차 그리고 택시에 실려 칼바람 뚫고 그의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웬걸,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그가 연신 히죽히죽 웃는 표정이었으니 어이없는 반전이다.
나도 덩달아 그를 만났다는 안도감에 젖어.
“건강을 회복해서 100세까지 연구에 몰입하시오.”
철 없이 던진 말에 그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반드시 회복합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연구로 몸을 바치겠습니다. 요즘은 황재학 형이 부르던 노래 그러니까 신경림 선생님의 「새재」를 읊조리며 결의를 다집니다. 찔레꽃이 피기 전에 돌아가겠습니다. 푸하하.”
나도 기가 살아 5년 내내 돌아다니는 작가촌 이야기를 떠벌였다. 마라도와 진도 해남과 담양, 정선과 횡성, 서울의 연희동이 눈앞을 가로막았다가 사라졌다. 다시 최교진, 이은봉, 김진경 그리고 그의 벗 김이구, 김성균, 유광해, 김학용 등 흘러간 선후배들의 안부를 묻고 답하다가 헤어졌다.
추웠다. 양평역 가는 택시를 잡지 못해 영하 13도의 거리를 40분 가량 걸었더니 더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포장집 천막 안에서 그가 건네주던 호떡 열기를 떠올리며 몸을 녹였다.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는 그의 등허리에 '바보'라고 써붙여 버스를 타게 한 기억이 떠올라 칼바람 받으며 키득키득 웃기도 했다.
절망이 씻기면서 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으니 다행한 일일까. 벗의 쾌유를 빌어보는 2월의 밤이 씽씽 깊어가면서 문득 봄이 우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식빵을 찾기 위해 냉장고 문을 털던 새벽이었다.
오수진 성대 전대협 감성동 강봉구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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