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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을 보다
-초한지-
요새 기분 좋은 시간이 있다.
중국 고전 초한지, 삼국지, 사마의, 수호지 영상을 보는 재미다. 다행히도 지인으로부터 제공받거나 인터넷 쇼핑으로 구입한 고전 영상 시리즈를 준비해 두었는데, 최근 코로나로 외출이 줄어 영상 보는 재미에 빠진 것이다. 96부작, 80부작 등 많은 분량이지만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영상을 접하게 된다.
내가 시청한 고전의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나씩 갈무리해 두고자 한다.
1. 초한지
勇將 항우項羽와 德將 유방劉邦
유방은 스스로 자신의 승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나는 행정에서는 소하(蕭何)에 못 미치고, 지략에서는 장량(張良)에 못 미치고, 군사지휘에서는 한신(韓信)에 못 미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두를 부릴 수 있었다. 반면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도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승리한 것이다.”
한신이 항우에게서 빠져나와 유방에게 기용되었을 때, 그는 “한왕(유방)의 능력은 대체로 항우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항우는 필부의 용기와 아녀자의 인정을 가진 사람이니, 우두머리가 되어 큰일을 할 재목이 아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유방의 타고난 능력과 재능은 항우에 비해 떨어졌지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능력으로 결국 승리한다.
당시의 군대는 대부분 병농일치제에 따른 군대였다. 즉 밭을 가는 평범한 농부들을 강제징집 하거나, ‘군대에 들어오면 먹을 것을 준다.’고 하여 기근에 시달리는 농민, 유랑민 등을 끌어들여 병력을 확보한다. 그리고 국고나 지방 유지의 ‘기부금’, 지휘관의 사재로 마련한 간단한 병기를 지급하고, 기초 훈련만 시킨 다음 전장에 내보낸다. 이처럼 대체로 아마추어의 군대이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의식도 부족한 군대였기에, 전문 전사 집단에 비해 병력이 많아도 전투력은 높지 않았으며, 전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군율을 따르게 하고, 책략을 쓰거나 부대 배치를 교묘하게 해서 전력 이상의 효과를 내는 장수가 유방이다.
유방의 군대는 오합지졸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였다. 이런 군대도 사기가 높을 수 있는데, 어쨌든 자기 발로 찾아 든 군대이며, 계속해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면 동기부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욕은 공포감에 미치지 못하며, 한 번 패배하거나 불리해지면 항우의 정예병만큼 죽기로 싸울 턱이 없다.
유방의 주위에는 그를 대신해 목숨을 잃은 기신처럼 충성스러운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은 ‘의협’의 정신에 따라 유방을 도운 사람들이었고 눈앞의 이익에 홀려 한나라의 깃발 아래 모여든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항우의 군대는 조금 달랐다.
그는 꾸준한 훈련과 단합 정신 고취를 통해 소수정예 병력을 갖추고, 그 병력의 월등히 높은 전투력을 무기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했다. 초-한 전쟁이나 그에 앞선 진제국과의 항쟁에서 그가 다른 장수의 군대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보다 독자적으로 적진을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선호한 것을 볼 때, 이런 정예 병력은 군사훈련 못지않게 ‘우리는 하나’라는 단결 의식과 불굴의 투지를 계속해서 주입시키고, 항우는 늘 일선에서 앞장서 돌격하며 부하들의 투지를 불태웠고, 최고사령관의 몸으로 직접 벽돌을 나르거나, 다친 병사를 간호하며 눈물을 흘리는 등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면서 병사들의 신뢰와 충성을 다지려 했다.
항우의 막료들을 보면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항우의 친인척, 즉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병사가 굳이 많을 필요는 없다. 정말 내 수족처럼 믿고 부릴 수 있는 병사만 주위에 남겨야 한다.”
이런 의식은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 말고는 믿지 않으며 포상에도 인색했던 나머지 한때 그를 도왔던 영포(英布)나 팽월(彭越)등이 유방 편으로 돌아섬으로써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항우와 유방의 군대가 정면대결을 하면 지는 쪽은 거의 유방이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항우가 누렸던 그런 전술적 우위를 전략적 불리함이 압도하면서, 초-한 전쟁에서 유방이 승리한 것이다.
초한지 줄거리
'초한지'는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대결하며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해 가는 과정을 그린 대하소설이다. '초한지'는 진나라의 시황제의 출생부터 소설을 시작하고 있다.
항우(項羽, BC233~BC202)는 진(秦)나라 말기 하상(下相: 지금의 강소성 숙천宿遷 서남) 출신으로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이다. 조부 항연(項燕)은 전국 말기 초(楚)나라의 명장으로 진나라 장수 왕전에게 살해되었다. 숙부 항량(項梁)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살인을 범하여 항우와 함께 오중(吳中: 지금의 강소성 소주蘇州)에 피신해 있었다. 항량은 그곳에서 숨어 지내면서 큰 부역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마다 항상 그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암암리에 빈객과 젊은이들을 모아서 조직적으로 훈련시켰다.
항우는 키가 8척이 넘고 세발 달린 큰 솥(鼎)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다. 향량은 또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지만 그는 대략적으로 대의를 파악한 후에는 더 이상 깊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재주와 기개가 탁월하여 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할 때 그 모습을 길가에서 지켜보고는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 취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진2세 원년(BC 209) 7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에서 진나라에 항거하는 농민봉기를 일으켜 장초(張楚) 정권을 세웠다. 6국의 귀족들은 그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같은 해 9월에 항량과 항우도 회계군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오중(吳中)의 병사들을 모아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었다.
항량은 스스로 회계군수에 올라 항우를 부장으로 삼고 정예병 8천명을 거느렸다. 진승이 희생된 후 그의 부하 장수 소평(召平)은 진승의 명의를 사칭하여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 초나라의 상경上卿으로 상국相國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급히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항량은 8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려갔다.
진2세 2년 3월, 항량이 군대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넜을 때 동양(東陽: 지금의 강소성 우태현 동남)의 영사(令史: 현령 휘하의 관리) 진영이 이미 동양을 점령한 후 의병 2만 명을 거느리고 항량의 휘하로 들어왔다. 또 회수(淮水)를 건넜을 때는 영포(英布)와 포장군(蒲將軍)도 군대를 이끌고 항량의 휘하에 들어왔다. 이로써 항량의 병력은 일시에 6~7만명으로 늘어나서 당시 반진(反秦) 세력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항량은 진승이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설현(薛縣: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서 봉기군 장수들을 소집하여 대사를 논의하였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양치기를 하던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아내어 초회왕으로 추대하고,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하였다.
그후 항량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동아(東阿: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서남)와 정도(定陶: 지금의 산동성 정도현 서북) 등지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항우와 유방(劉邦)도 성양(城陽: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 동남)을 점령하고 옹구(雍丘: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까지 진격하여 진나라의 삼천태수(三川太守)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항량은 동아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두 차례나 진나라 군대를 무찌른 데다 항우 등이 또 이유의 목을 베자 더욱 적을 과소평가하고 오만하게 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항량은 전사하였다.
항량이 전사하자 항우와 유방은 팽성(彭城: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장한은 다시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조(趙)를 공격하고, 진나라 장수 왕리(王離)·섭간(涉間)과 함께 거록(巨鹿: 지금의 하남성 평향현平鄕縣 서남)을 포위하였다. 초회왕은 송의(宋義)를 상장군, 항우를 부장에 임명하고 조를 지원토록 하였다.
그러나 송의는 안양(安陽: 지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동남)에 이르러 46일간을 머무르면서도 진격은 하지 않고 형세를 관망만 하고 있었다. 이에 항우는 상장군 송의가 은밀히 제나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여 버렸다. 회왕은 즉시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전군을 통솔하여 조를 지원하게 했다.
항우는 당양군(當陽君)과 포장군(蒲將軍) 등의 장병 2만명을 파견하여 신속하게 장하를 건너 거록의 포위망을 뚫게 하였다. 그리고는 직접 전군을 이끌고 장하를 건너가 배수진을 치고 계속 진격하였다. 아홉 번의 격전 끝에 초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진나라 장수 왕리는 사로잡히고 섭간은 자살하였다. 당시 초나라 군대가 거록을 지원 공격할 때에 함께 달려온 다른 제후들의 군대가 10여 진영이나 있었으나, 그들은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모두 성벽위에서 관전만 하고 있었다.
결국 초나라 군대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다른 제후들의 장수는 모두 항우 앞에 무릎을 꿇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각 제후들의 군대는 모두 항우의 지휘에 따르게 되었다. 항우는 여세를 몰아 계속하여 진나라 군대를 대파한 다음 진나라 통치권 내부의 갈등관계를 이용하여 장한의 투항을 받아내었다. 그는 진나라 병사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신안성(新安城) 남쪽에서 진나라의 병사 20만명을 모두 생매장시켜 버렸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 이미 유방이 먼저 함양(咸陽)을 점거하고 있었다. 항우는 초회왕과 "먼저 관중을 차지한 자가 왕이 된다"는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유방이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했다. 이때 유방의 신하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였다.
화가 난 항우는 자신이 보유한 40만 대군의 위력을 믿고 즉시 유방을 없애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미리 간파한 유방은 불리한 전세를 뻔히 알면서 무모하게 항우와 대적하기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항우에게 화의를 청하기로 하였다. 유방은 홍문(鴻門)에 주둔하고 있던 항우를 찾아가서 사죄하였다. 그러나 항우 측에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유방을 죽이려는 계획을 미리 세워둔 상태였다. 유명한 "홍문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살기가 가득한 연회석상에서 유방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간신히 넘겼으며, 항우는 결국 유방을 없앨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며칠 후 항우는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공략하여 진나라의 왕자 영을 죽이고 진나라 궁궐을 불태운 다음 무수한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약탈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한(漢) 원년(BC 206) 항우는 회왕을 의제(義帝: 명목상의 황제라는 뜻)로 삼고 침현(지금의 호남성 침현)에 도읍을 정하도록 한 다음, 다시 제후들을 분봉하고 자신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올랐다. 그리고는 양(梁)과 초(楚) 땅의 9개 군(郡)에 웅거하여 도읍을 팽성(彭城)에 정하고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했다. 얼마 후 전영(田榮)·진여(陳余)·팽월(彭越) 등이 잇달아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에 대항하였다. 유방도 삼진(三秦)을 평정한 후 서초(西楚)를 공격함으로써 4년여에 걸친 초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한의 전쟁 초기에 유방은 항우가 제(齊) 땅에 머물러 있는 틈을 타서 한(漢) 2년 4월에 팽성을 공격하였다. 항우는 즉시 군대를 돌려 팽성을 지원하여 유방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유방은 형양(滎陽)으로 퇴각하였다. 그 후 초한은 각각 형양과 성고를 경계로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였다.
항우는 비록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고한 후방을 건설하지 못하여, 줄곧 전후방에서 작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다소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항우는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다소 공평성을 상실하였는데, 이때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유방에게 동조함으로써 항우는 정치적 고립에 빠졌다. 이외에도 항우는 비록 전쟁에서는 용맹하였지만 인재등용에서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원래 항우의 휘하에 있었던 한신(韓信)·진평(陳平) 등이 모두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에게 투항하여 유방의 핵심 참모가 되었으며, 심지어 그는 자신의 핵심 참모였던 범증(范增)을 믿지 못하여 많은 실책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항우가 전선에서 거둔 성과를 상실한 반면, 유방은 오히려 전선에서의 패배를 정치적 승리로 전환시켰다.
한(漢) 5년 12월, 초나라 군대가 해하(垓下: 지금의 안휘성 영벽靈璧 동남)에서 방벽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군사는 적고 군량은 다 떨어진 데다 한나라와 제후들의 군대에 겹겹으로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밤중에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크게 놀란 항우는 "한군이 이미 초나라 땅을 모두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저리도 많은가?"라고 탄식하였다. 그는 애첩 우희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면서 비분강개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부하 장졸 8백여명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질주하였으나 음릉(陰陵: 지금의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서북)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렸다. 여기서 항우는 한 농부에게 길을 물었으나 그 농부가 일부러 항우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 줌으로써 항우는 다시 유방군의 추격을 당하게 되었다. 항우는 황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탈출하여 동성(東城: 지금의 안휘성 정원현 동남)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항우의 군사라고는 단지 기마병 28명뿐이었으나, 그들을 추격한 한나라 장수 관영(灌?)의 군사는 기마병 5천명이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항우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항우는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여 마침내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달려가 오강(烏江: 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 경내)에 이르렀다. 그러나 항우는 오강을 빨리 건너라는 사공의 권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인용)
(202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