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변곡점(왕자와 거지)
‘인생은 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가 정상인가 싶어 올라와보면, 또 다른 산봉우리가 있어 그럴 것이다. 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그 길은 계속 오르막이거나 내리막이지도, 또 곧게 뻗은 직선도 아니었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나비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언덕은 청소년기에 있었다. 모든 것을 부모님께 의존하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려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나도 혹독하게 치렀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등 극심한 혼란기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남아야 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다르게 살기를 원하셨다.
“물에서는 물고기 보다 수영을 못하고,
육지에서는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특별한 기술 없이 살았다.”
라고 스스로를 평가한 아버지는, 본인이 색맹이라 포기한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려하셨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가 젖소 8마리를 키우는 것을 보고 자라서였는지, 목장주가 되겠다는 목표만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는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소를 키우겠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께서는 당황을 하셨을 것이다. 1차 산업인 농업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설득과 강한 협박으로 진로를 바꾸라고 호소했다. 그런데도 계속 고집을 피우는 세상물정 모르는 아들이 아버지 보기에 한심했을 것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나는 고된 축산인의 길을 가려면 육체적인 단련과 함께 정신력 강화를 위해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제사를 지내는 중심에 있어야 할 장손이었다. 외골수인 아들을 잘 아시는 아버지는 한 층 걱정이 많아지면서 부자(父子) 사이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고집스런 아들과 손자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저러다 둘 중 하나라도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라는 말씀을 할머니는 며느리인 어머니에게 하였다.
나와 똑 같은 과정을 거치며 떠나는 아들을 보며, 떠나는 자도 힘들지만 떠나보내는 사람은 더 힘들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인생의 두 번째 봉우리는 삼십대에 찾아 왔다. 내가 선택한 전공을 살려 축협 소속의 한우개량 사업소에서 근무하며 부상을 당했다. 오토바이를 타고도 3일은 돌아다녀야할 정도로 목장의 규모가 상당했는데, 무릎 후방 십자 인대수술 여파로 진로를 바꿔야하는 기로에 놓이면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멈추어 서게 되니, 그제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내가 수행한 연구과제는 ‘한우 고급육 생산’이었다. 건강을 위해 동물성 포화지방산 섭취를 줄이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였다 그런데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만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살코기 속에 지방질을 높이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쇠고기 수입으로 엄청난 이윤을 얻는 축협이 농민들에게 책임 회피용으로 하는 연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공한 반추 영양을 제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알기 시작 했다.
세 번째 전환점은 40대에 찾아 왔다. 영어 학원을 시작하자마자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부르짖는 바람에 시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미국에서 전공 석사학위를 받느라 영어에 친숙하고,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의 덕분에 사업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니 유교적인 전통과 새로 갖게 된 기독교 교리의 울타리에 철저히 가두어진 나를 발견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원하던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또한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돌입하면서 좋은 아버지와 남편이 되겠다는 우상도 깨졌다. 새로운 환상이 필요한 나는 마라톤과 검도, 심리학책을 뒤적이면서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이라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2003년 늦둥이가 태어났다.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은 아내가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을 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모든 사회 관계망을 축소하고 가정으로 돌아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까지 아내와 아이 곁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내가 그림을 공부 하고 싶어 해, 좋아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왔다. 그러면서 나도 동굴 속에서 고독하게 나를 대면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2012년 7월 사업을 정리했다. 이제부터는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투자하면서 즐겁게 지내자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외국어인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면서 신기해하고, 독서회에 참가해 책도 많이 읽고, 글쓰기 공부도 하면서 매우 만족도가 높은 생활을 한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인문학, 철학, 정치학 등의 강의를 들으니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지면서, 또 나를 과부하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묵직한 깨달음이 왔다. 2014년 2월부터는 되도록 나를 내려놓고 편안해지려 한다.
앞으로 나에게 몇 번의 변환점이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 ‘번데기에서 화려한 나비가 되느냐, 못 되느냐!’와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도전에 충실하고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한다. 모닥불이 활 활 다 타고 나면 오롯이 재만 남듯이, 죽음 앞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남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