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분투였다. 아닌가. 기억 나는게 뭐지? 몹시 분주했던 것도 같은데,,, 꿈은 늘 그랬다. 엇그제 돼지꿈은 잔영이 남아 있는데,,, 간밤엔 뭔지 모르게 악착을 떨기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해 내려하니까 아무것도 생각나는데 없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모습의 투영이었을까. 내 속의 나는 늘 극악스럽기까지 했던 것 같다. 현실속의 내가 유약했던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아침에도 물한바가지를 들고 나가 화분에 뿌렸다. 볼품없이 빈약한 봉숭화 두구루에 붉은 꽃이 올망졸망하게 피고있다. 물만 가지고는 부족한가 보다. 걸음기가 필요한 것같아 다이소에 가서 뭐든 사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게 언젠데 아직도 실행을 못하고 있다. 천원, 혹은 이천원이면 될탠데, 그돈이 아까워선가. 꽃을보면서 위로를 받았으면 그값을 지불하는게 당연한데, 그것마저 생략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름답게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은 그만끔의 노고와 투자가 들어가야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부려워만 할일은 아닌것이다. 특히 나같은 사람은 말이다. 들판의 야생화들은 누가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있는듯 싶다. 땅이 척박해도 별 상관없어 보이지 않던가. 주인이 하나님이셔서 그런가보다. 하나님 품안에 있으면 다 잘되리라 믿지않던가. 기독교인들의 천편일륜적인 사고방식이다. 감당할만끔의 시험만 주신단다. 얼마나 긍정적인가. 하긴 그래서 나역시 그 안에서 숨을 쉬고 있는거겠지만.
아침은 상쾌한 기분으로 열었다. 많이 덥겠지? 추운것도 싫고 더운것도 견디기 어렵다. 작은 선풍기 하나로 막을수 있는거라면 더운게 그나마 나은것인가. 가스요금 폭탄의 후우증은 참으로 오래간다. 내 수준에는 3만원대도 많다. 그런데 9만원이 넘었으니 거이 공포수준이었고 보일라 온도를 내리고 또 내릴수 밖에 없었다. 올 겨울은 어떨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러다가 이 여름이 다 가기전에 부르시면 그 걱정은 쓸모없는 것이 되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내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한번에 끊을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는게 어렵다. 그런데 죽는것은 더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러기에 모두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꾸역꾸역 살고 있는게 아니겠는가. 죽는게 쉬운일이라면 아마 살아있는 사람이 얼마 안되지 않을까. 용기없는 사람들에게 극단적이 선택은 불가능하다. 그냥 저냥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오즉했으면! 그래 오즉했으면, 죽엄이 삶을 이겼을까. 그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으니까 할수없이 선택을 한것이겠지. 어쩌면 그 용기마저 부려운게 나 아닌가 싶다. 나는 참 흐리멍텅하다. 어쩌면 구르는 재주도 은혜인 것 처럼 이것도 은혜일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똑부러지는 성격이라면 이렇게는 못살지 않았을까. 이렇게는 안살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사는게 아니었다. 그런데, 변명을 하자면 이렇게 밖에 살수가 없었다. 깜량이 안되는 것을 어쩐단 말인가. 요세는, 내가 남편이 아닌, 내가 바라는대로 좀더 훌륭하거나 잘난 남자를 남편으로 만났다면 정말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나"이지 않다면 가능할수도 있을태지만 현재의 "나"를 가지고는 어려웠을거라는 고백을 하지않을수가 없다. 사실 나는 내 인생의 수업료가 혹독할만끔 비쌌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다 살고보니 그런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만일 내 원대로 깜량이 안되는 삶을 살았다면 그역시 불행이었을게다. 남을 부려워할것도 없다. 그거야말로 무익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힐끔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될까. 귀가 가렵다. 발가락이 찌른다. 살이 찐 것인지, 혹은 부은것인지, 탱탱하다. '발가락이 열새는 들어가겠다. 평생 발새물린 일은 없겠어.' 아주 옛날에 내가 들었던 말이다. 거랬던 발가락이 통통하다. 온 몸이 무거운게 부운게 맞는지 살이 찐게 맞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이맘땐 흐물거렸던 팔뚝도 탱탱해지고 눈껍풀도 쫙 펴저있다. 두발로 걸어서 교회나가고 숨울쉬고 사는대 더 바랄게 있을까. 만족하며 감사하자. 그러면 그분께서 웃어주실태니까. 아니, 그분은 그럴 시간이 있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