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판문점 도끼 만행사건1976년 8월18일www.youtube.com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동영상‘도끼 만행’ 판문점…평화 상징 되나? / KBS뉴스(News)2주 뒤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판문점은 공동경비구역이라는 특성 상 남북 간 무력 충돌이 빈번한 곳입니다. 특히 1976년 8월 18일, 11명의 사상자를 낸 북한의 '도끼만행'은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뻔한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참사를 직접 겪은 경비병은 이 판문점을 어떻게 기억하고 ...www.youtube.com
△4.27 남.북한 정상회담 열리기 2주전 KBS뉴스.
당시 북한에 대한 공포를 당시 제가
4살이었는데도(만 나이로는 3살이죠)
아직도 기억나는 첫장면이었죠.
제가 1975년부터 기억을 하고 있죠.
따라서 승훈피디가 박정희 죽던
1979년 10.26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거
틀린거나 과장은 아니죠.
(미스 프레지던트 편에서. .)
4살이니 유아시절인데도
아직도 신문에도 실렸던 저 장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우르르르 트럭에서 유엔군 둘러싸고 있던.
도끼는 몰랐어도 "만행"이란 단어는
유아기였어도 기억할 정도로 . .
당시 아버지께서 군인이셔서
집에 안들어오시는 날도 많았지만
더더욱 데프콘 2였으니.
(아버지 당시 장교 자력표를 예전에
국방부에 신청해서 카피본을 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당시 육군본부
연락장교셨더군요.
미8군 감찰파견
당시 육군본부는 현재처럼 계룡대가
아닌 지금 용산 전쟁기념관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1공수특전여단 3대대 소속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유사시
투입될 특전사 대기조로
있었구요.
이 살벌한 시기에 승훈피디가 태어났죠.
당시 전쟁이 났었다면 으~~~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아주 살벌한 시기에 승훈 피디가 탄생한것이죠.
승훈피디 생일 축하합니다.
1976년 8월23일 동아일보 1면.
미 김일성 회답메시지를 일축.
백악관. 국무성 책임인정않아
인정할수 없다. .
그 옆면에는 21일에 미국은 미루나무 절단
작업에 건십헬기 26대. 제트전투기.
괌에서 B52 중폭격기 3대가 상공을
선회하고 있는 가운데 3백명의 한미
양국 기동타격대가 절단작업하고
있었다는 당시 기사입니다.
당시 경향신문 23일자에는
도끼에 살해당한 두 미군장교의
유해가 캘리포니아 트레비스 기지에
도착하는 모습이 실립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주한미군 2명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하고 살해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에선 이 사건을
‘Korean axe murder incident’라 한다.
사건 이전에 JSA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따라서 양측 초소가
서로 중첩되게 설치됐다.
북한은 유엔군과 조율도
않고 남쪽 지역에 5개의
초소를 만들었다.
유엔군 초소는
북한군의 초소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제3초소는
JSA남쪽 모퉁이에
자리 잡았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 오는 북한 측 출입
통로의 초입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 유엔 측은
3초소를 설치하고,
그 북쪽에 3초소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5초소를
추가로 설치했다.
그런데 제3초소와 제5초소
사이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나
양 초소의 시야를 가리게 되었다.
1976년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6명과 유엔사 경비병
4명이 나무를 베기 위하여
현장에 갔을 때,
북한 경비병이
나무를 그대로 두고
가라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때는 철수했다.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경비병력 10명,
노무자 5명으로 구성된
유엔사 작업반이
나무 주변에 도착해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몇 분 후, 북한군 장교 2명과
병사 9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그 가운데 북한군 장교가
작업을 중지하라며 위협했다.
그러나 유엔사 작업반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했다.
11시경 10여 명의
북한군 경비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고,
북한 병력은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미군 책임자
보니파스(Arthur G. Bonifas)
대위는 노무자들에게
작업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북한군 인솔 중위
박철은 “죽여”라고
소리치면서 보니파스
대위를 때리자,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보니파스 대위를
쓰러뜨렸다.
그 중 몇 명이 주위에
있던 도끼로 보니파스의
머리를 가격했다.
북한군은 또 함께 있던
베렛(Mark T. Barrett)
중위도 공격했다.
4분간의 난투극으로
미군 장교 두명은
모두 심각한 두부 손상을
입었다.
(당시 증언한 한국군 JSA경비병들
이야기로는 단순 두부 손상 정도가
아닌 죽은 미군장교들이
도끼로 얼굴이 양쪽으로 쪼개졌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합니다)
2명의 미군 장교는 후송 중에
사망했고,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미군 사병 4명 등
9명이 부상당했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유엔사 제3초소가 부서졌고,
현장에 있던 유엔사 트럭
3대도 파손되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백악관에선
특별 대책반이 소집되었고,
미국 국무부는
“이 사건에 대한 어떠한 사태도
그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주한미군 사령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고
JSA 북한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을 제거하기 위한
폴 버니언 작전
(Operation Paul Bunyan)
에 돌입했다.
버니언은 미국의 전설적
나뭇꾼의 이름이다.
미국은 데프콘 3를 발령했고,
폴 버니언 작전시 데프콘 2를
발령했다.
데프콘 2는 즉각적인
공격준비테세를 말한다.
미국은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를
한반도에 긴급 파견하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카데나 미공군기지에서
F-4 24대를 한반도 상공에 띄웠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와
중무장한 순양함 5척을
한국 해역 인근에 배치했다.
박정희 정부는 특전사
제1 공수특전여단 소속
특전사 대원들을
JSA에 투입해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했다.
(☞이때 1차 투입조가 전멸하면
투입될 대기조에 문재인 상병
현 대통령이 있었죠.)
북한도 19일 오후 5시를 기해
김일성의 명의로
전투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북한은 겉과 달리
실제로는 미군과 한국군의
강력한 대응에 바짝 기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명의로 '유감성명'을 밝혔다.
북한은 그후 1년반 동안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JSA도 분단되었다.
JSA엔 경계선이 그어져
남측지역과 북측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넘은 판문점 JSA 경계선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첫댓글 저는 저때 일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릴때 가족이 교외로 외출해서 아버지가 장거리 운전을 하시면
어머니께서 조수석에서 자주 신동아의 칼럼이나 기획 기사들을 아버지께 읽어주시곤 했는데
그때 저도 판문점 사건이나 박정희 암살사건의 전모 ,실미도 북파 공작원 사건등의 이야기를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전두환 때라서 광주의 사건은 몰랐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던 6,70년대 한국 현대사를 그때 다 배웠었죠
80년대 신동아는 지금 신동아와 달라서
현대비사를 많이 다루었죠.
전두환 정권은 비껴갔지만
전두환이 박정희 까는거는
모른척해서인지(자기가 모시던
분이라 했지만 한편 5공화국
정당성 주장을 위해 박정희
유신을 상대적으로 깠죠.
그래서 1987년경쯤 되면
코리아게이트같은 이야기가
신동아에 실립니다.)
긴장 많은 시기에 태어나서 화가 많으신 건가요??^^
그럴지도. .ㅎㅎㅎㅎ
아무튼 저 시기는 살벌한 시기였죠.
승훈피디님 전쟁모드가 이유가 있었네요
으아....
그런듯 합니다. 전투적 기운을 그때 물려받지 않았을까 싶은. .
저 당시 전쟁 뷴위기로 간것이
인도차이나 3국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공산화로
미국은 전쟁에 진 분위기에
자존심이 상당히 상해있었는데
북한이 미군장교 2명을 살해하였고
전쟁 분위기를 부채질해서 격노한
미국이 베트남전 패배의 앙갚음을
한반도에서 풀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악 ㅋㅋ 본투비워리어 ㅋㅋㅋㅋ
@개구리 전쟁의 기운을 받은 승훈피디님.ㅋㅋㅋㅋㅋ
그러게요...피디님의 전쟁모드의 이유...
항상 많은 정보를 얻고 갑니다 풍문님!!!^^*
저때는 제가 어렸어도 기억이 나더라구요. 며칠 아버지께서 안들어오셨죠.비상대기로. .
@풍문으로 들었어 아무래도 강력한 인상이 남아 기억하시는가 보군요...진짜 공포에 떨었을거 같은....ㅠㅠ
@몽이 저때와 박정희가 죽었던 10.26은 기억에 확실히 남죠.지금도 생생합니다.
@풍문으로 들었어 둘다 나라에 긴장감이 흐르던 시기였겠군요...
생생하실정도니...ㄷㄷㄷ;;
@몽이 1979년 10월26일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당시 생긴지 얼마 안된 롯데 백화점과 미도파.신세계 쇼핑을 갔었죠.
장난감등을 사고 신나게 버스타고
당시는 미아동에 살때였는데
그당시 집으로 돌아오기전 옛날
국제극장등 있는 곳 버스정류장에서
어둑어둑하던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릴때 나중에 커서 생각해보니
그 시간대에 궁정동에서는 총성이
울리고 있었던거죠.
다음날 토요일 학교 뒤 오패산 등산학습후
집에 돌아오니 박정희 사망뉴스가
TV에 나오고 있더군요.
@몽이 국제극장이 지금으로 치면 광화문 사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궁정동에서 박정희.차지철이 죽던
장소와 그리 멀지는 않은곳이었죠.
@몽이 그래서 저는 10.26 당시 비상계엄령을
겪은 어린세대이죠.
마지막 계엄을 겪은
(앞으로도 그러기를. 더 이상 계엄이
없기를)
초1~3학년 올라갈때가 계엄령 시기였으니.
@몽이 도끼만행사건이 또 ㄷ ㄷ ㄷ;인것은
저 1차 투입조가 전멸되거나 북한군이
본격 응전했으면 2차 투입조에 문재인
상병을 비롯한 2차조등이 들어가
전사할수 있었죠.
당시 북한군이 대응하면 개성을
포격하기로 했었으니까요.
확전되었다면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은 없었습니다. ㄷ ㄷ ㄷ
@풍문으로 들었어 생각보다 사태가 훨씬 더 심각했었군요...
지금의 저로써는 상상도 못해본 상황이었네요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