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햄릿을 읽던 도중 드디어, 명대사가 나왔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자기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표현할지 망설이면서, 고뇌에 빠지는 대표적인 명대사입니다.
민음사판 최종철 역입니다. 여기에 따른 각주에 따르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역자가 <사느냐 죽느냐>로 옮겼다. (최재서의 <살아 부지할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와 이덕수의 <과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강우영의 <삶이냐, 죽음이냐>는 예외이다.) 그런데 원문의 <To be, or not to be>는 <사느냐 죽느냐>를 포함하는 존재와 비존재를 대립시키고 있기 때문에, 또 이 독백이 살고 죽는 문제를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명시하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쉽고 모호하며 지극히 함축적인 일반론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사 선택으로 옮김은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원문의 뜻에 가장 적합한, 한자가 아닌 순수 우리말은 <있다>와 <없다>의 적당한 변형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말의 <있음>과 <없음>에 아직 역사적, 그리고 존재론적 무게가 충분히 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의 힘은 적절한 표현의 쓰임에서 나오므로 햄릿의 <있음이냐>를 영어의 <to be> 부정사의 명사적 용법에 해당하는 구절로, <없음이냐>를 <not to be>에 해당하는 구절로 옮겨 보았다. 우리말의 <있음>과 <없음>이 아직 완전한 명사로 굳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경우에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한자 개념을 쓸겨에는 <존재하느냐 마느냐> 식이 될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는 한데, 역시 사느냐, 죽느냐가 제일 멋있는것 같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는 역시 고자되기가 최고입니다.
요즘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하기 보다는 고자되기를 선택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의를 들어냅니다.
디시가 낳은 대화백 굽시니스트의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에 따르면, 어떤 택일의 명제가 주어졌을 때 주체적인 개인의 의지를 결연하게 강조하는 실존적 자아의 존재 증명을 함축하고 있는 답변이라고 합니다. 최초로 사마천이 인증했다고 합니다.

햄릿을 읽으니 요릭을 하고 싶네요.
펜타킬 요릭 스킨으로 펜타킬 하고 싶어요.!!
근데, 사실 나 도타 좋아해!
도타후 아크바르!
삭제된 댓글 입니다.
캬!
저도 이 문구에 대한 논쟁을 일찍이 알고 있었는데, 제 생각에 굳이 원어에 가깝게 바꾸자면 '있을 것이냐, 있지 않을 것이냐.'가 제일 낫다고 생각합니다. 불어(Etre ou ne pas etre)나 영어(To be or not to be)를 억지로 읽어가다 보면, 한국어가 참 명사친화적인 언어는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는 그나마 '것'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판단하곤 합니다. 중세 한국어에서도 이 '것'은 꽤 적극 사용됩니다.
실은 그런데도 저또한 '사느냐, 죽느냐.'라는 의역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역은 햄릿의 이 유명한 고민이 단지 사변적인 회피가 아니라, 생에 겹쳐있는 실존적 의문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철학은 할 수 없는 것이고, 문학만의 특권인데, 그 중에서도 배우가 직접 연기하는 연극의 큰 장점이지요.// '레비나스'는 모든 철학적 질문은 햄릿에서 이미 제시되었다 라는 말까지도 했는데, 아마 햄릿에서 실재 존재의 어떠한 격동을 목격했기 때문이겠지요-프랑스 철학자가 영미문학을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닙니다. 물론 저에게는 슬쩍 엿볼 깜냥조차 없고요.
삶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런데 "펜타킬 요릭 스킨"이 무엇입니까?
추가 설명 글 썼습니다.
사마천의 고자되기 선택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씨스타의 있다 없으니까 라는 노래를 참 좋아하는데요. 잘 빠진 아이돌의 육감적인 안무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게 다인가?) 바로 '있다' 와 '없다'라는 표현을 아주 잘 사용한 가사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존재'와 '부재'라는 단어를 과하게 사용하는 문장을 싫어합니다. 충분히 있다 없다로 써도 되는데 괜히 무거운 느낌의 단어를 억지로 끌어온다는 기분이어서요. 그런데 씨스타의 저 노래를 들으면서 있다 없다 두 표현만으로 그렇게 절절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 매우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존재 부재를 오버스럽게 쓰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넌 씨스타 노래도 존재한다 부재하니까로 부를 놈이다'고 생각하곤 했죠.
ㅋㅋㅋ
아이돌 노래 들으면서 이런 심오한 생각을 하시다니 대단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저 <사느냐 죽느냐>가 저런 식으로 논의가 되어야할 만큼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 안해. 결국 저 독백도 죽느냐 사느냐하는 고민도 선왕 햄릿의 영혼을 만나 존재의 영원성을 목격하고 나서의 이야기니까. 저기서 햄릿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존재와 비존재를 대립시키고 있지만 저 세계 안에서 죽음(=없음)은 비존재가 아니지.
햄릿은 참 고민이 많은 작품입니다.
햄릿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문학 교양수업 듣던 중에 햄릿이란 인물이 일종의 결정장애, 우유부단한 존재(오른쪽이님 죄송합니다)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그리고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불필요한 고민보다는 과감한 실천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들었으면 행하기로 했습니다. 차였을 때의 두려움보다 일단 저질르고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아아,
우유부단하면 힘들죠.
나한테 왜 죄송해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