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교통사고 당한 친구 문병 가 그 부인더러,
“그나마 거시기가 멀쩡해 천만다행입니다~^^”
너스레를 떤 죄밖에 없어. 그랬더니 부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맞받아
“사고 전에도 그다지 멀쩡하지는 않았지요.”
입을 비죽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치겠지. 그 친구, 누운 채 날 노려보며 닭목 비트는 시늉을 하더군. 가끔 시동이 꺼진다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 친구 퇴원한 뒤 내가 안 보이거든 목이 비틀려 입원한 줄 알면 돼.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문단 선배가 책을 낸다기에,
“인쇄비나마 건지면 좀 좋아….”
하고 염장을 지른 죄밖에 없어. 자기 돈으로 책을 찍어 시인은 시인끼리 돌려보고, 수필가는 수필가끼리 돌려보는 현실이 한심해 무심코 한 말이지만 아차 싶네. 나중에 내가 책을 낸다고 하면 그 선배,
“오냐, 인쇄비나마 건져라!”
하겠지? 내가 한 말, 주워 담고 싶지만 이젠 틀렸어.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재작년 가을, 벌초하고 내려오며 아버지가,
“내년 가을에도 이 길을 걸어서 올라올 수 있을랑가….”
혼잣말을 하시기에,
“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벌초 정도는 저희들이 있잖아요. 이젠 맡기세요.”
하고 촐랑거린 죄밖에 없어. 이듬해 봄날 그 오솔길을 꽃상여 타고 올라가실 줄 이미 예감하셨나 봐. 훗날 내가 그렇게 혼잣말하면 아들 녀석도 나처럼 촐랑거리겠지? 엄청 섭섭할 거야. 후회스럽지만 영영 주워 담긴 틀려버렸어.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퇴직을 앞둔 우리 상사가 어린 딸을 생잡이로 결혼시키려 한다기에 지나가는 소리로,
“퇴직하기 전에 모두 성가 시켜버리면 경제적으로는 홀가분하기야 하겠지만 고 어린 것을….”
하고 중얼거린 죄밖에 없어. 분위기가 썰렁해지더군. 나중 내가 청첩장을 보내면 아마 그럴 거야.
“그래, 네놈도 홀가분해지겠다 이거냐?”
그 양반에겐 아예 청첩장을 보내지 말까 봐.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저번 직장 등반 때 직원 하나가 언덕 하나 겨우 올라와선 숨이 턱에 닿아 몸이 천근만근이라고 헬헬거리길래,
“몸이 만근이면 배는 오천 근이겠구나. 그러니까 진작부터 뱃살 좀 빼랬잖아. 다음부턴 따라오지 마!”
하고 면박을 준 죄밖에 없어. 그랬더니 그깟 일로 삐져가지곤 그만 산을 내려가 버리잖아? 우리 끼리니 얘기지만 그게 어디 사람 배야? 그러고도 몸피를 줄일 꿈조차 안 꿔. 하는 짓이 곰이야.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맞은편 여직원이 와인 잔 위에다 양파를 하나 올려놓고는 아침저녁 물을 갈아주며 공을 들이니까 세상에! 거기서 꽃이 피데? 그래 별생각 없이,
“양파에도 꽃이 피는군!”
한마디 한 죄밖에 없어. 그랬더니 아주 딱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멀거니 바라보는 거야. 잎은 돌고래 주둥이 같고 꽃은 오종종하게 생겼어도 향기 하나만큼은 사무실에 가득 차고도 넘치더군. 그 양파가 알고 보니 히아신스 뿌리래. 키득키득. 그 여직원 예쁘게 생겼냐고? 글쎄…그건 묻지 마. 정확하게 공개했다간 난 맞아죽어. 꼴에 한성질 하거든.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저녁 식탁에서 아들놈 보고,
“너 나중에 결혼할 때 제발 음식 솜씨 좋은 여자에게 장가 좀 가라. 세상에 왔더라고 늘그막에나마 반찬 같은 반찬 좀 얻어먹어보자.“
하고 부탁한 죄밖에 없어. 그랬더니 그나마 두어 개 있던 반찬 그릇이 도로 냉장고로 들어가 버리더군. 와장창 소리를 내지르면서.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출근하다 보니 앞집 대문간에 내놓은 TV를 집어갈까 말까 살피고 있는 고물장수가 있기에, 우리 집에도 고물 라디오가 있으니 가져가려거든 가져가라고 한 죄밖에 없어. 곧이곧대로 들은 그 고물장수가 우리 집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고물 라디오 내놓으라고 했다지 않아? 우리 집에 라디오가 어디 있어. 난리가 난 거지. 휴전하던 해 제작돼 7.4공동 성명 발표 이듬해 우리 집으로 팔려왔으니 오래되긴 되었잖아? 이젠 본인도 별명이 고물 라디오라는 걸 아나 봐. 한 번은 술김에 그 라디오 제조공장더러 라디오 A/S 하라고 떼를 썼지. 그 양반도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하더니 눈치를 채고는 이미 A/S 기간이 끝났으니 손수 수리해 쓰던지, 폐기처분하던지 마음대로 하래. 그런데 이 고물 라디오는 평소엔 잡음이 심하다가도 손님이 오거나 전화벨이 울리면 돌연 소리가 맑아지거든. 스피커가 하나뿐인데도 대내용, 대외용 스테레오 작용을 겸하는 모양이야.
그러는 내 스피커는 성능이 좋으냐고? 남 애써 방송했는데 여태껏 뭘 들은 거야? 가끔 공업용 재봉틀로 박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니까!
- 안병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