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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 소개
봄꿈을 꾸며
우리들의 우산
당신의 난로
그대에게 띄운다
바람부는 날
이 봄의 축제
가을문안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가을산새
가을 길
가을에는 떠나리라
눈
황톳길
텃새
섬 하나
물, 우리의 사랑법
우편 배달부
새벽 뜰에서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나의 마을
5월의 사랑
나의 아내 뉴질랜드
반 품
어머니의 맷돌
고별
가을 속삭임
비밀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까닭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도시의 새
나는 이런 시가 좋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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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 소개
1941 부산 출생
국학대 국문과 중퇴
현대시 , 신년대 동인
1963 '자유문학'에 시 <저녁>으로 신인상을 받고 당선
1965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내란>이 당선
1983 제2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5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시집
인간의 악기 / 서구출판사 1966
신(神)의 열쇠 / 문원사 1971
왜 아니 오시나요 / 문학예술사 1979
천노(賤奴) 일어서다 / 서문당 1982
항해일지 / 문학세계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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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꿈을 꾸며 / 김종해
만약에 말이지요,저의 임종 때,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라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
바로 언덕 너머 꽃 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네,이월이요.한밤 두밤 손꼽아 기다리던
꽃 피는 봄이 코 앞에 와 있기 때문이지요.
살구꽃,산수유,복사꽃잎 눈부시게 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 언덕 너머 있기 때문이지요.
한평생 살아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 너머 있어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행복했었노라고요.
계간 / 시와시학, 200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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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우산 / 김종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빗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리들 우산 안에 들어와 있다
잠시 접혀 있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우산을 펴면
우산 안에서 우리는 서로 젖지 않기
외로움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서로 젖지 않기
물결 위로 혹은 꿈 위로 얕게 튀어오르는
빗방울 같은 우리 시대의 사랑법 같은
우산을 받쳐 들고
비오는 날 우산 안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비는 내려서 우리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로 흘러가지만
정작 젖는 것은 우리들의 여린 마음이다
우산 하나로 이 빗속에서
무엇을 가리랴
젖지 않는 꿈, 젖지 않는 희망을
누가 간직하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물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산만큼 작아져서 정답다
아직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 있는 한
한번도 꺼내 쓰지 않은
하늘 같은 우산 하나
누구에게나 있다
풀 / 문학세계사, 200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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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난로
-드디어 나는 눈이 멀었다(나의 말)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난로를 보아요
연기마저 보이지 않는 불꽃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는 화염을
나는 당신에게서 보아요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늘 화상을 입어요
나는 보아요
영원의 한 순간을
지상의 사랑이 떠올라 별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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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띄운다 / 김종해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수화물이
위태위태하게 적재되어 있고
야반에 고속으로 질주하는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서른다섯 송이의 장미다발과
안전장치가 풀어진 뇌관,
그리고 기타 등등의 물건 꼬리표에는
수신인의 주소,
내 불륜의 사랑이
모나미 사인펜으로 적혀 있다
이 밤 안으로 나의 덤프트럭을
불이 환한 그대 집까지
당도케 해야 한다
쌍라이트 환하게 켜고
고속으로 달리는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수화물이 있고
크라프트지 꼬리표가 달린
내가 있다.
별똥별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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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은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이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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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의 축제 / 김종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일어서라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
嚴冬에 엎드려 숨죽이던 것들아
척박한 황지에 뿌리내린 쑥맥들아
누가 오늘의 이 축제를 숨어서 구경하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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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문안 / 김종해
나는 당신의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
어둠 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
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
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
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
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
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
풀잎의 비애을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
종소리여 풀꽃이여...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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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 김종해
사라져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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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새 / 김종해
새끼 네 마리 데리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가을 산새
가을이 되니까
저녁 햇살이 밥으로 보이니까
우리집 찔레나무 덤불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서오릉 길 너머
봉산에서 내려온 가을산새가
뭐라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어린 날 귓속에 쟁쟁 울리는
엄마새 소리
종해야, 죽 먹고 자!
죽 먹고 자!
굶고 자는 아기새 위로
엄마새가 맨 앞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문학수첩 /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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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길 / 김종해
한로 지난 바람이 홀로 희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가을
서오릉 언덕 너머
희고 슬픈 것이 길 위에 가득하다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
모자를 털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제 그림자를 지우며
혼자 가는 가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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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떠나리라 / 김종해
바람부는 날 떠나리라
흰 갓모자를 쓰고 바삐 가는 가을
궐闕 안에서 나뭇잎은 눈처럼 흩날리고
누군가 폐문에 전생애를 못질하고 있다
짐朕의 뜻에 따라
가야금 줄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은 차고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
짐朕이 이곳에 머뭇거리는 것은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워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가는 길을 탓하지 않으며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일생을 퍼담는다
슬픔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가려
이 가을에는 떠나리라
풀 / 문학세계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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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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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톳길
황간에서 상주, 상주에서 두원 가는 길은
발바닥이 아프다
나는 여섯 살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다
가도가도 황톳길*
나는 주저앉아 있고
뒤따르던 제비꽃, 애기똥풀꽃이
황토분 바르고
엄마 등에 업혀서 쉬고 있다
소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농부가
엄마의 미색에 반해서
여섯 살 나를 번쩍 들어 소 등에 태웠다
무섭다고 악을 쓰며 나는 울었는데
발바닥이 아파도
배가 고파도
엄마와 단둘이 걷는 황톳길이
나는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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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새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새는 언제나 나뭇가지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하늘 바깥에서 노숙하는 텃새
저물녘 별들은 등불을 내거는데
세상을 등짐지고 앉아 깃털을 터는
텃새 한마리
눈 날리는 내 꿈길 위로
새 한 마리
기우뚱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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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하나
어머니가 이고 오신 섬 하나
슬픔 때문에
안개가 잦은 내 뱃길 위에
어머니가 부려놓은 섬 하나
오늘은 벼랑 끝에
노란 원추리꽃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집 눈썹 밑에 매달려 있다
서투른 물질 속에 날은 저무는데
어머니가 빌려주신 남빛 바다
이젠 저 섬으로 내가 가야 할 때다
풀 / 문학세계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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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우리의 사랑법
이 여름날
내가 물이 되어 흐르고 있을 때
그녀는 대지가 되어 와 눕는다
그녀를 향해 끝없이 하강하고
그녀의 모든 굴곡을 더듬어
익숙하게 흐를 때
솟구쳐오르는 분수의 말이거나
절정의 높이에서 하얗게 투신하는
폭포의 말이거나
나는 나의 화법으로
그녀 위에 되풀이 쏟아짐으로써
나의 여름은 완성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하는
우리들의 사랑법
우리 살아가는 일 저와 같아서
이 땅 있음에
사랑은 영원하여라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 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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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 배달부
아직 바람은 차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 그루 나목으로 서 있을 뿐,
저희 잎사귀와 푸르름을 달기 전의
신새벽 같은 그리움 속으로
우편 배달부이신 우리 아버지
당신은 집집마다
한 장 한 장 엽서를 보내 주시나니
아직도 봄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그리움을 가진 분들께
우편 배달부이신 당신은
손수 한 장의 눈발로
지상에 강림하시나니
그 엽서 받아보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흘의 봄밤을
저희 땅에 예비하고
비로소 등불을 켜달고
먼길 채비를 하는 눈물겨운 풀잎들
아직 바람은 차고
이 2월에 무슨 일이 있든 말든
새로 혼령을 받아 거듭거듭 일어서는
저 하찮은 풀잎이 하는일 하나만 보아도
우리 아버지 뜻을 알겠네.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 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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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뜰에서
밤 사이 꽃들이 궁거워
잠이 깨자마자 내려선 뜨락,
아직은 좀 싸늘한 맑은 바람 속에
언제나 그렇듯 낯익으면서도 낯선 손님처럼
새벽이 나보다 먼저 내 뜰에 와서 서성거린다.
선잠을 깬 백목련(白木蓮) 꽃송이들이
부시시 눈을 뜨며 하품을 한다.
목단(牧丹) 꽃망울들은
그 현란한 너털웃음을 단단히 숨긴 채,
아직도 한참은 더 자야 할 모양이다.
기지개를 펴는 라일락 가지 끝마다
숨가쁘게 향그러운 입김을 내뿜는
쌀알만한 흰 꽃알갱이들.
모두 다 입맞추고 볼 비비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귀여운 것들.
이렇게 봄철 새벽 뜰에는
또 한 무리의 애타는 식구들이
바깥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을.
황사현상, / 민음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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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까
나의 동무들은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아 있다
외로워지니까 추억이 그 자리를 넓힌다
내 안에서 인기척을 내는 것은
무인도뿐이다
저 혼자 바위가 되거나
바람이 되는 것이다
하루치의 미세량!
무인도에선
그리운 사람의 이름만
파도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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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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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을
12월 초순에도 빨간 겨울망개가 열리는 눈에 묻힌 나의 마을에는
난롯가에 앉아 두 볼이 붉은 아낙들이 커다란 귀바늘을 쥐고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눈에 덮인 이 마을의 창틀마다
황홀한 화제와 불빛이 새어나고
한겨울밤 아낙들이 하는 그 고요의 뜨개질에
천사의 제일 아름다운 詩와
꿈의 세포가 짜여진다
사나이들은 읽던 책의 마지막 章을 덮고
색색의 수실로 뜬
아낙들의 꽃병에 꽂힌 겨울 흑장미의 보이지 않는 동요와 신비스런 소리를 듣는다
눈이 한밤내 내리는 날 밤은
영혼을 재는 저울을 들고
하늘에서 몰래몰래 강림한 겨울神들이
아낙들이 떠놓은 자수 속에 들어가
사슴이 되기도 하고 학이 되기도 하고
겨울 매화의 봉오리를 다소곳 열기도 한다
무인도를 위하여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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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사랑
그대는 내 남쪽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섬으로 떠서
그대는 노오란 유채꽃으로 웃고 있누나
맑은 바람 있는 대로 풀어놓고
내 남쪽바다의 물결을 다스리누나
다도해의 봄밤은 깊어가는데
잠 못 드는 젊은 짐승
내 베갯머리에
물결로 와 찰싹이누나
초파일 꽃등행렬 위로
물인 듯 바람인 듯
그대는 내 남쪽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그대, 5월의 사랑아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 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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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 뉴질랜드
뉴질랜드가 나의 아내는 아니지만
아내가 가진 사막,
습기없는 사막 가운데서 자라는 풀,
터석을 보았다
아내의 사막에 바람은 불고
마른 터석은 굴러다닌다
봄이 오는 뉴질랜드가
나의 아내는 아니지만
만년설을 이고 귀국하는 아내
뉴질랜드의 터석은 굴러서
내 이순의 사막에 와서
딱 멈추었다
풀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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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품
그대에게서
반품이 되어 돌아온 내 시詩를
오늘은 작두날로 썰어
파지로 버린다
전에는 국판 크기였는데
오늘은 탈색된 B6판 크기의
쓸모없는 세상의 한쪽에 비켜서서
작두날마저 먹지 못하는
파지로 버린다
몇 대의 트럭에 실려
파지공장으로 떠나는
저 낯익은 얼굴!
그 트럭 위에
오늘은 내가 반품으로 앉아 있다
풀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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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맷돌
맷돌을 돌린다
숟가락으로 흘려넣는 물녹두
우리 전가족이 무게를 얹고 힘주어 돌린다
어머니의 녹두, 형의 녹두, 누나의 녹두, 동생의 녹두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녹두물이
빈대떡이 되기까지
우리는 맷돌을 돌린다
충무동 시장에서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의 남폿불이 졸기 전까지
우리는 켜켜이 내리는 흰 녹두물을
양푼으로 받아내야 한다
우리들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맷돌일 뿐
어머니는 밤낮으로 울타리로 서서
우리들의 슬픔을 막고
북풍을 막는다
녹두껍질을 보면서 비로소 깨친다
어머니의 맷돌에서
지금도 켜켜이 흐르고 있는 것
물녹두 같은 것
아아,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무인도를 위하여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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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
지상의 시간이 끝난 사람이
잠자러 가는 시각,
인간의 이름은 모두 따뜻하다
이 별을 떠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
풀 / 문학세계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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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속삭임 / 김종해
- 인간의 아들아, 神의 어머니가 와서 너희 날의 아픔을 꿰
매려는 이 시각에 너희들은 모두 숨어 있구나. 어서 나오
너라, 시들지 않는 풀잎을 주리니
이제 날은 저물고
우리 깊은 마음에 구르는 한 장의 잎사귀에서도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어서 흔들어 깨워라
우리 깊은 마음에 날려와 쌓이는 가랑잎을 타고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이 가을에 우리가 까마득히 잠들고
우리 님이 떠나가면
또 다른 여인이 우리를 다시 낳아주지 않으리라
오래오래 닦아둔 은빛의 등촉대에
까물거리는 우리의 영혼이 서로 부둥켜안고
서걱이는 갈대밭의 갈대꽃에게나 지껄이듯
이 가을에 떠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원을 말해주어라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무인도를 위하여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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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다섯 시간 동안 나의 영혼은 정전되었다
다섯 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의사들은 내가 가진 불가사의의 풀잎들을 뜯어맞추었다
세포의 하나하나
내가 가진 우수의 실뿌리를 잘디잘게 풀어헤쳤다
미세한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미세한 모든 것이 의사들에게 낱낱이 포착되었지만
그러나 단 하나
내 가슴 깊이깊이 감추어둔 비밀만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수술이 끝난 뒤 일주일 동안
의사들은 내 몸에서 끓어오르는 高熱을 잡지 못하였다
수술 뒤 일주일 동안 내 가슴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열풍에
의사들은 지치고 두 손을 들었다
아아, 시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스스로 열풍을 거두어들였다
내 가슴 깊이깊이 감추어둔 단 하나의 비밀,
義와 사랑으로 수놓여진 그 주머니 속의 열기를
부활하는 나라의 새 아침에
무릎 꿇고 조용히 당신께 바치리라
무인도를 위하여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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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까닭
나는 내 차의 결함이 어떻다는 것을 모른다. 치질수
술을 받지 않고, 이빨을 갈아끼우는 단순한 내 몸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나는 내 차의 결
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90년식 콩코드의 노회한
숨소리가 조금씩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헐떡이고 있다, 밀리고 있다, 새고 있다라는 자
각증상이 내가 밟은 타이어 자국마다 묻어났다. 순정
부품으로 갈아끼우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주
눈발처럼 차창에 달라붙는 저 쓸쓸함과 허전함과 무
슨 순정부품으로 갈아끼울 것인가.
갈현동 언덕 아래서 멈칫,
나는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다.
풀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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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춥고 어두운 날의 은혜가 있으므로
새날은 더욱 눈부시다
서설이 깔린 길은 더욱 눈부시다
그대 식탁 위의 은식기마다 반짝이는 것은
햇빛 같은 사랑
가득 담겨 있을수록
내일은 푸르고 더욱 아름답다
새날을 받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
그대에게 지금 필요한것은
약간의 어둠이다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내일 아침 햇살을 낳기 위해
오늘 밤을 진통하는 여인처럼
그대의 식탁 위엔
아무도 손대지 않은
한 세기가 차려진다
춥고 어두운 날의 은혜가 있으므로
오늘 아침
세상은 더욱 눈부시다
풀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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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새
서울에서 가장 먼저 겨울이 오는 곳을
나는 모른다
겨울이 오든 말든
사람들은 종묘 앞 공원에 서성거리고
저마다 몰래 감춰둔 날개를 꺼내
하늘을 날기 시작한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보고 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들이 이 도시에서 막 떠오르는 찰나
사과탄 연기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포도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낙엽이지만
포도에 떨어진 그들의 옆구리에는
먼 겨울길을 가는 붙박이 철새의 날개가
비죽이 나와 있었다
나는 알지, 이 도시의 지붕
천년의 겨울이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을 가로막고 있어도
저 뜨거운 날개가 있는 한
날아오르고 다시 날아오르고 할 것임을
나는 잘 알지
무인도를 위하여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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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시가 좋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아침에 짤막한 시 한 줄을 읽었는데, 하루종일 방
안에 그 향기가 남아 있는 시.
사람의 온기가 담겨 있는 따뜻한 시.
영혼의 갈증을 축여주는 생수 같은 시.
눈물이나 이슬이 묻어 있는 듯한, 물기 있는 서정시
를 나는 좋아한다.
때로는 핍박받는 자의 숨소리, 때로는 칼날 같은 목
소리,
노동의 새벽이 들어 있는 시를 나는 좋아한다.
고통스러운 삶의 한철을 지내는 동안 떫은 불 다 빠
지고
시인의 마음 안에서 열매처럼 익은 시.
너무 압축되고 함축되다가 옆구리가 터진 시.
그래서 엉뚱하고 다양한 의미로 보이기까지 하는
선시禪詩 같은 시.
뿌리와 줄기도 각기 다르고, 빛깔과 향기도 다르지
만,
최상의 성취를 꽃으로 빚어내는 하느님의 시.
삶의 일상에서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세상사의 중심을 시로써만 짚어내는 시인의 시.
시로써 사람을 느끼며,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
을 자랑하고 싶은 시.
울림이 있는 시, 향기 있는 시.
나는 이런 시가 정말 좋다.
풀 / 문학세계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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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풀 / 문학세계사. 200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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