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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죄- 부작위의 죄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31-33; 41–46절)
1. 율법 중에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그와 같은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마 22:37-40)을 배우고, 마태복음 25장에서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인자가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 왼편에 두신 자들은 살인이나 간음 등의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영벌에 들어갈 것입니다. 즉 마땅히 해야 할 이웃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25:14-30의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받은 달란트를 감추어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고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기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폭행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에 이런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4문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지키거나 그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라고 하면 '하지 말라'는 것을 함으로써 저지르게 되는 죄(작위의 죄)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에는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저지르게 되는 죄(부작위의 죄)도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다른 신을 두는 것이 전자의 한 예이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후자의 한 예입니다. 어떤 분은 구약 율법 613 계명을 살펴 보면 '하지 말라'는 계명이 365개, '하라'는 계명이 248개라고 합니다. '하라'는 계명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는 그런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계명을 어긴 것을 잘 모르고 지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4문은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지키거나’를 먼저 말합니다. 즉 ‘하라’는 계명을 하지 않거나 부족하게 지키는 죄를 먼저 말합니다. 마태복음 22:37-40에서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버금가는 가장 큰 계명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것을 범한 죄가 살인죄나 간음죄보다 더 크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까? 이웃을 사랑하려면 적극적으로 ‘먹을 것을 주고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야’ 합니다.
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십계명을 가르칠 때에 “제 * 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와 “제 * 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그에 답하면서 이 계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 5계명이 명하는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 그리고 동료와 같은, 각각의 여러 지위와 인륜 관계에서 각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고 각 사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제 5계명이 금하는 것은 각각의 여러 지위와 인륜 관계에서 각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고, 각 사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기를 소홀히 하거나 거스리는 것입니다.” “제 6계명이 명하는 것은 모든 정당한 노력을 기울여 자기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제 6계명이 금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이나 이웃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거나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입니다.” 김홍전 목사님은 『십계명강해』에서 십계명의 본의를 깊이 있게 설명하실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선생님들의 십계명 강해를 읽어보아도 항상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본으로 설명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작위의 죄보다 부작위의 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4.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모나 자녀,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고, 만약 그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는 그에 상당한 벌을 받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엘리는 자기 자식들이 탈선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지만 말 몇 마디로 책망할 뿐입니다(삼상 2:22-23). 이런 엘리의 아들들은 계속 주어지는 심판의 경고조차 무시하다가(삼상 3:13),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삼상 4:17-21).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고 아말렉왕 아각을 죽이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진멸도 안하고 아각도 살려줬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는 선고를 듣습니다(삼상 15:22-23). 세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 10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18)와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한복음 16:9)라는 말씀도 부작위의 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런 죄를 지은 것을 책망하고 심판을 선언합니다.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 ……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효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대로 그 수치되는 물건의 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단을 쌓았도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11:7-14)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롬 1:21) 살아갑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는 말씀이 사실입니다.
5. 창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이 명령을 잘 이루기 위하여 돕는 배필로 하와를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가시기 전에 역시 적극적인 명령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들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 두 명령은 신자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계속 힘써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형식의 명령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라’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명령인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문도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로 끝나고 있으니 참되고 유일한 위로를 바르게 깨달은 자가 적극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는 성경에서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반법에서도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법령, 계약, 조리 또는 선행행위에 의하여 일정한 행위를 할 것이 기대되는 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이러한 부작위에 의하여도 범죄가 성립할 수 있는데 이를 부작위범(不作爲犯)이라 합니다. 부작위범의 성립요건에 관하여 판례는 “형법이 금지하고 있는 법익침해의 결과 발생을 방지할 법적인 작위의무를 지고 있는 자가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결과 발생을 쉽게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발생을 용인하고 이를 방관한 채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에, 그 부작위가 작위에 의한 법익침해와 동등한 형법적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그 범죄의 실행행위로 평가될 만한 것이라면, 작위에 의한 실행행위와 동일하게 부작위범으로 처벌할 수 있고, 여기서 작위의무는 법령, 법률행위, 선행행위로 인한 경우는 물론, 기타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사회상규 혹은 조리상 작위의무가 기대되는 경우에도 인정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대법원 2006. 4. 28. 선고 2003도4128 판결). 그렇다면 우리 신자들은 더욱 정신을 차리고 ‘일정한 행위를 할 것이 기대되는’ 신앙적, 시민적 의무를 기억하고, 혹시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의무 수행을 성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된 자는 자녀를 기르되 자기 생각이나 경험으로가 아니라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가르친 것을 살피고 배우면서 길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자녀를 너무 자유 방임주의로 기르는 사회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된 부모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을 힘쓰며, 남을 섬기고 베푸는 일에 앞장서는 자녀로 기르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 결과로 신자의 자녀들이 교회에는 다닐지라도 생활에서는 무례하고 무법하며,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교훈입니까? 그 가르침으로 기른 자녀들은 진실로 예의가 바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행실을 보임으로 그 ‘경건한 삶으로써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86문답)’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려서 성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전략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대외정책에서 겪은 어려움의 대부분은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1989~93 재임) 행정부 때 잉태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91년 말 소련 해체 이후 새로운 도전들이 고스란히 닥쳐오도록 그대로 방치했고, 부시 외교팀은 또 유고슬라비아 위기가 진전되는데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아 91년 6월부터 10년 가까이 내전이 진행되도록 만들었으며, 89년 2월 소련군이 거의 10년간의 점령을 끝내고 철수한 아프가니스탄도 미국 관심사에서 제외돼 2001년 9·11 테러의 씨앗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왕조가 500년을 이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강직한 신하가 있어 나라가 혼란스럽고, 임금의 정치가 도에 어긋날 때 감히 임금의 얼굴을 붉게 만들고, 목숨 걸고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는 신하들과 강직한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침묵하거나 못 본 체하는 부작위를 반역이나 불충으로 보았으며, 간을 한 다음에 닥칠 해악은 돌아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칼빈 선생님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고, 저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기독교강요』를 기록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부모님들과 정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잘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침묵하고 방관할 때에 자녀들과 교인들이 어떻게 잘못되거나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지를 무겁게 생각하고, 수고와 희생이 따르더라도 자기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다함으로 ‘부작위의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라’는 명령을 완수함으로 창조시의 문화 명령과 승천시의 지상명령을 이루는 일에 한 걸음을 내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오늘도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이나 아내로서, 시민으로서, 교인으로서 주님과 사도들을 통하여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기에’ 힘쓸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런 적극적인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기를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