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삶 속에서 감당해 온 세월, 충만한 시적 사유
-허승호 시집 《구름 한 권》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지독하다는 말이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 불볕이니 삼복 더위니 하는 말은 이미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초봄 지나면서 시작해 반 해를 혹독하게 지구를 달궜다. 어떠한 말로도 이해될 수 없는 여름을 겨우 넘기면서 다들 한 마디씩 하는 말이다. 그런 징후는 수년 전부터 예측된 것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경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한계치를 거뜬히 갱신한 지구의 사건들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정치판을 달군 뻔뻔한 일들이 어느새 사회 일반의 통념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닮았다. 인간을 둘러싼 땅덩어리도 지구 환경으로 볼 때는 최악의 반복이었다. 그 땅덩어리에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할 인간이 탐욕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벌인 결과라고 보면 된다. 그것의 부작용은 사람이 유일하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지구에 미칠 것은 뻔하다. 사람만이 아니라 궁극으로 하나뿐인 지구 보존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생존을 종말케 할 수 있는 대재앙의 전조임이 분명하다. 윤리와 도덕의식에서 더 많이 뻔뻔해지고 둔감해져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진화를 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위한 시인들을 생각해 본다. 최소한 잊힌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노심초사한 마음이 시 안에 있기 때문이다.
허승호 시인의 최근 출간한 시집 《구름 한 권》은 이상 기후에 시달린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있어 기여를 할 것이다. 그래도 사람 사는 데 있어 진정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말을 한다. 여는 시로 올라온 ‘연꽃’을 통해 시적 관조를 통해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 보자.
마음도 뿌리 내리지 못한 날
굽을 세운 꽃대가 생을 오독 중이다
사랑은 낮은 곳이어야 한다는
불이不異의 말
바람 따라 연못 한쪽 귀를 잡는
팔월의 나여
낮은 곳에서
하늘을 얻는 물의 연못
흰
꽃들의
말씀이
절을 짓는 여름날이면
야윈 물에 발을 담가
흐린 생도
꽃잎 한 장으로 가부좌를 틀 수 있을까
-<연꽃> 전문
생명체가 주고받는 신호를 생에 대한 가치로 이해할 때, 진실한 것이 사랑이라며 고통마저 긍정해야 한다는 말속 이치가 곧 ‘불이不異’란 것을 깨달아 간다. 사랑이란 말의 궁극 속에 은밀하게 침투시켜 놓은 인간의 이중성을 어찌하면 긍정할 수 있을까? 누구나 언젠가는 맞서야 하는 가늠 깊은 속내는 오직 당신만이 알아챌 수 있는 진실인 것 같아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면의 또 다른 자아에 휘둘려 아무것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가는 사랑이란 말의 마법은 끝이 없는 법이다. 과속한 욕망도 느릿한 관망도 탐욕일 뿐이다. 연못의 수면을 뚫고 올라온 연꽃이 소망한 지점은 ‘하늘’이었고 그 하늘이 바라본 ‘연못’은 서로가 그토록 다가가고 싶었던 대상이기에 같다. 하나가 되는 듯 마음을 모으는 중이지만, 그 찰나가 곧 긴 고통 끝에 당도할 수 있는 화엄의 세계일지 모른다.
늦가을 바람이 고추 지지대를 뽑는다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날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고
대나무 쪼개 심어 놓았던 봄날
뿌리 없는 발목들이 있었기에
고추는 어린 날부터 생을 불태울 수 있었다
뿌리 없는 것들이 뿌리를 지탱하는 역설
뿌리 없는 생도 그랬다
물러서는 것은 죽는 일이라
발목이 꺽이는 날에도 붙잡고 일으켜 세우다 보니
뾰족한 발이 사라져 버렸다
뼈마디 성한 것 없는 고추 지지대
뿌리까지 썩어 버린 발목을 내려다본다
누군가를 위해
발목까지 묻어 두고 살았던 적 있었느냐고
고추 지지대가 목덜미 곧추세우고 노려본다
-<고추 지지대> 전문
풍경에서 인지한 감각을 통해 삶의 직관으로 번져온 시의 정황이 삶의 자세와 같아서 좋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것을 <고추 지지대>에서 말해준다. 사람 사는 일에는 한치라도 삿된 마음이 깃들면 그릇되기 쉽다. 지극한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이 서로가 상생하는 길이다. 사물에 생명이 없는 듯해도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날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고/ 대나무 쪼개 심어 놓았던 봄날” 간절한 마음이 통하면 다 이룰 수 있다. 사실 대나무는 잘린 순간 이미 생장력을 잃었다. 이제부터 시간에 풍화되어 부스러지고 말 무기물에 불과한 대나무 조각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것의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토대는 흙이다. 흙은 지구의 표면에 형성된 무기물의 집합체이니 형상 그 자체로 성질을 같이 한다. 살아 생장하는 고추 포기와 대나무 지지대는 한 공간에서 두어 계절을 함께 할 것이다. 둘 다 인위적으로 옮겨져 흙에 뿌리내린 듯한 동병상련의 처지가 같다. 따라서 시간의 끝은 고추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다. 화자는 타자화된 사물성(대나무 지지대)을 통해 “누군가를 위해/ 목까지 묻어 두고 살았던 적 있었느냐고/ 고추 지지대가 목덜미 곧추세우고” 아낌없이 제 한 몸을 버려가며 상생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달리하면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생의 순간순간이 얼마큼 위중한 것인가를 일깨운다.
<이름을 쓰시다>에서 아버지 덕에 어머니가 어렵사리 글을 깨우친 과정을 추억하고 있다. “나 죽고 나면 세상에 없는 사람 이름 쓰지 말고/ 어머니 이름 써야 한다며/ 방바닥에서 구박당해 가면서 배운 이름// 구십 줄에/ 호미로 곱게 그리시는/ 이름 석 자” 삼우제 지나 찾아간 텃밭에서 고들빼기 상자에 적힌 어머니의 함자를 보며 만감에 빠져든다. 그 아버지는 세월에 무너져 “산을 베고 누우셨다// 지게를 버리고 하늘을 가지셨다/ 생사의 거리가 숨결처럼 가까웠다”(<아버지의 방>), “등뼈가 굵어지기도 전 선물을 받았다/ 길을 지고 뒷산을 부려 놓아도 쉴 수 없었다/ 무릎은 시큰거렸고 허리는 끊어졌다”(<지게>)는 아버지의 고단했던 생전이 눈에 성글었다. 한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아버지의 삶만큼 고단했을 어머니다. “생강에 칼끝을 갖다 대다가/ 흙 속에서 품고 살았을 생각을 얹어 본다// 저 맨 발로/ 흙을 파고, 돈을 얻어 새끼들을 건사했다”라며 한시도 쉼 없었던 노동의 삶을 생각한다. 밭고랑을 무시로 드나들면서도 세상에 대한 원망 한번 할 줄 몰랐을 “어머니의 발가락을 수없이 만지는/ 밤이다”(<생강 다듬던 날>)
노란 꽃창포로 문패를 단
여인숙은 밤보다 낮 손님이 많았다
정오를 걷던 구름이
하루치의 품삯으로 바람을 건네주고 사라지면
오목눈이 물속에도 고요가 산다
후후 불면, 우우 몰려가 버릴 아가미 떼들
발목을 부려 놓고 왔던 흔적들이
등을 내주고 앉아 길을 만지는 시간
낮은 곳이어야 높은 곳을 품는다라는
삽화 한 장이 계곡물을 퍼 나르고 있다
간다
흘러간다
달빛이 물속을 다녀갔던 것처럼
발길은 멈춤과 되돌아보기 위해
흘러왔다
잠들지 못한 젊은 날의 밤들이
그늘 몇 잎의 파랑 같은 생의 계단에서
산밑 골짜기 고요가 주인이었던
물의 여인숙
-<미평 수원지> 전문
거울 같은 고요가 풍경을 덮쳐왔다. 은밀한 충동을 다 들켜버린 수면이 파란의 시간을 털어놓고 있다. 앙다문 입에서 터져 나온 고백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이 까발려진다. 파동으로 진정된 고요가 다시 동심원을 그리며 비밀스럽게 문을 열었고, 이어 물속에 잠긴 내막이 표면으로 들춰진다. 무표정한 수면 아래 수없이 왔다 간 군상의 염려들이 물속 깊이를 재며 호흡을 가쁘게 내쉬고 있다. 사람 사는 것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바깥에서 입은 상처들을 쓰다듬어 다독이는 반복이란 것이란 걸 알게 된다. “후후 불면, 우우 몰려가 버릴 아가미 떼들/ 발목을 부려 놓고 왔던 흔적들이/ 등을 내주고 앉아 길을 만지는 시간”으로 다들 지나온 시간의 아픔들을 내민 등처럼 허허롭게 쓰다듬는 일이다. 여인숙을 찾아간 사람들도 풍경 속에 깃든 그 안에서 주어진 시간만큼만 몸을 푸는 것으로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설 채비를 해야 한다. “간다/ 흘러간다/ 달빛이 물속을 다녀갔던 것처럼/ 발길은 멈춤과 되돌아보기 위해/ 흘러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저 고요한 등덜미를 내밀고 있지만,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파랑’은 고요를 오래 놔두질 않는다. 쉽게 끝나지 않는 삶이란 화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복되며 지독하게 감당하길 고통스럽게 강요한다.
언제라도 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 안에 어둠을 걷어내지 않고는 해를 볼 수 없다
해수관음은 해를 보기 위해 천 년을 기다리고
해탈문 거북들은 해를 기다리기 위해 바위를 뚫고 나왔다
산다는 것은 바윗덩어리 하나 내려놓는 일이다
산들도 품 안에 있는 바위를 파도에 던져 주고 있지 않은가
파도는 낮은 곳에서 밤마다 철썩거려
푸른빛으로 해를 가장 빨리 만날 수 있었다
네 안에 길을 만들어 놓고 어둠을 뚫고 나아가라
생의 가파른 벼랑을 길들이고 노를 저어야
삶도 꽃처럼 피어난다
바다가 아무리 푸르러도 흔들리지 않으면 고여 썩으리라
향일암에서는 바위들도 독경 소리에 고개 숙이고
맨발로 물을 적신다
누구라도 해를 보고 싶거든
내 안에 있는 깊은 바다를 건너야 한다
-<향일암>전문
하찮은 것을 이루는 데에도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물며 대오각성에 도달할 성취를 소원한다면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으로 심신을 수양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깊은 의미는 일상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몸가짐이란 것을 화자는 일러주고 있다. 무릇 팔자처럼 드리운 액운을 걷어내거나 극도의 소원에 도달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찾아가는 향일암이다. 이미 그곳에 당도하기 전 몸가짐부터 정갈해야 함은 당연지사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향일암을 찾아갈 일이 아니다. 최소한 자신의 마음속에 깃든 탐욕만은 걷어내야 한다. 그런 뒤에도 쉽지 않은 일출 풍경은 아무나에게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가다 막히면 살아온 지난 시간을 끝없이 반성하며 통절한 참회에 이르러서야 겨우 맞을 수 있는 “누구라도 해를 보고 싶거든/ 내 안에 있는 깊은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격언 같은 화자의 경구를 가슴에 새길 일이다.
겨울을 돌아 나온 초록의 혀들이 자궁을 연다
연두는 봄의 첫 손주
바람 앞에서 까르르 웃는
출생의 비밀을 하나씩 안고
허공에 쫑알거리는
저 생의 깊은 물속
한 잎 귀퉁이가 생의 무게를 저울질한다
겨울은
눈물의 마지막 말이나 혀끝에 올려
명치끝으로 내려앉혔거나
첫사랑으로 돌아누웠던 시간
빗방울처럼 봄을 안고 산길 오르는 연두
비와 바람 속에서도 치어 떼처럼 헤엄칠 것이다
지난 일은
가슴에 묻어야 한다는 차고도 슬픈 말을
뿌리마다 비문처럼 글자를 새기면서
-<연두軟豆> 전문
연두색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인간의 본성처럼 가장 근원적인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형상을 보여주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모든 초록의 시작은 연두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을 하나씩 안고/ 허공에 쫑알거리는/ 저 생의 깊은 물속” 탄생의 비밀을 안다는 것과 생명체의 개체성을 강화해 가는 과정이 마치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되기까지 성장해 가는 모습에서 흡사 닮은 꼴이다. 시가 생명을 얻어 문자화하기까지 긴 고통의 번민이 개입된다면 연두가 초록의 세계에 도달하기까지의 고통도 만만찮은 것이다.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을 계절의 이행에서 오는 파란을 수없이 건너야 한다. 때로는 좌절뿐만이 아니라 고통스런 순간을 매번 극복해야 한다. 죽어서 다시 환생하듯 살아나는 식물태가 성장이라고 할 때 우화로 변이 된 나비가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세상살이가 하루하루 따지고 보면 기억에서 사라진 전생의 자신이란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난 일은/ 가슴에 묻어야 한다는 차고도 슬픈 말을/ 뿌리마다 비문처럼 글자를 새기면서” 끈질긴 생명성으로 데자뷔 된다. 화자의 마음처럼 연두는 언제나 우리의 가슴에서 순정 같은 본래성을 부추길 것이다.
그런 마음들로 살아온 삶의 시간은 언제나 고만고만한 고통이었다.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집 떠난 지폐들이 돌아와 하룻밤 통장에서 몸을 누입니다/ 누구의 호주머니에서 살다 왔는지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월급날>) 화폐 수단이 강화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언제나 돈에 얽혀 살아간다. 월급쟁이나 농부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삶이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맨발로 물을 밀면서 뜬모를 한다/ 발길 잃고 헤매는 포기를 찾아/ 살 집 마련해 주고/ 모자란 곳은 외롭지 않게 덧대어/ 물속 깊숙이 삶터에 뿌리를 넣어주면서”(<뜬모 생각>)에서 뜬모 한 포기에도 신경을 쓰는 것은 생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는 딸린 식솔을 생각할 때 오직 그 길밖에 없음을 안다. “이모는/ 목장갑 한 켤레를 유언처럼 남기고 떠났다”, 거기에 한시도 편할 날 없이 “발가락마다 지친 달을 달고 살았던 이모에게/ 십자가는 빨갛게 불을 켜고 있는 종착역”(<오래된 혀>)을 안겨주고 말았다. 열심히 살려했지만, 가망 없는 삶에 대한 전망은 극단적인 죽음을 불러오고 말았다. 국가 안전망에서 보호받지 못한 고단한 삶과 계층의 실상을 말해준다. “스물넷/ 베트남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쯔엉/ 십자가도 고개 숙일 수 없는 나이/ 신부와 아들을 위해 발을 디뎠던 곳/ 처마까지 물이 들어찼던 지하 단칸방은/ 한 모금의 빛이 아니라 외줄타기였다”(<한 끼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우리만의 나라가 아니다. 산업 현장에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가 부쩍 눈에 많이 띈다. 우리에게 필요한 노동자라면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슬픔이나 고통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심정의 토로다.
과거 한 때 나라가 백성을 무참하게 죽이려 했고 그들은 항거 한번 못한 채 죽어 나갔다. 화자는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유난히 검붉은 동백의 나라 여수였다. 동백꽃 피고 지는 일이 사람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놈의 지독한 나라가 문제였다. 그 역사를 익히 아는 화자는 ‘여수 동백’에 내재한 슬픔보다 순정으로 감돌아오는 시적 상상력을 반전으로 보여준다. 낭만을 홑꽃 태에 용케도 품어 좋은, “요 앙큼한 가시내/ 남들 꽃 피울 때/ 남쪽 모퉁이로 내려가더니// 눈발이 몰아쳐도/ 덧니 내놓고/ 살살 웃음기까지 흘리기 시작하더니// 맨발로 벼랑 끝에서/ 시린 이 꽉 깨물고 얌치를 부리더니/ 동지섣달 내내/ 젖몸살 부풀어 몽실몽실하더니// 요, 가시내 바람났네”(<동백꽃>)라고 일러주는 화자도 신이 났다. 꽃의 화신인 여수 ‘동백’이 더는 슬픔과 비통함을 상징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반전의 심중이 깊다. 그러기 위해 여수 낭만 밤바다를 보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여순 10·19’의 진실을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
형제에게 총구를 겨눌 수 없다는 선창에
머리 짧은 학생
흰 고무신을 신을 아재
군용 팬티를 입은 인민들이
제주로 떠날 수 없다고 후창을 했던 시월
종산 초등학교 플라타너스마저 이태 잎을 지우고 흩날렸다
풋고추 하나 준 일 없어도
부역자였고
빨치산에 살 한 톨 준 일 없어도
따지지도 묻지도 않으면서
수장시켰던 보도연맹
-<애기섬의 우화> 부분
‘여순 10·19’는 여수의 아픔이자 대한민국의 굴절된 권력으로부터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현재도 그 아픔을 감당하며 살아온 유족들이 있다. ‘여순 10·19’에 대한 실상은 중학교 교과 과정으로 배운 ‘여순 반란’이 전부였다. 허구를 진실이라며 학생들에게 교육한 위장된 역사를 깨닫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 고통은 손가락총으로 죽어간 사람들과 유가족에게 천형처럼 굴레를 씌워 ‘빨갱이’라는 극혐으로 대물림되어 반세기가 훌쩍 넘어서도 해소될 기미는 요원하다. ‘애기섬’ 학살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부역자로 손가락질을 당한 사람들’과 ‘보도연맹원’으로 백여 명이 갈매기호에 실려갔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의 참상을 기억한 바다는 여전하지만, 죽은 사람이나, 참혹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말문을 열지 않았다. 오직 유가족만이 가슴에다 그날의 참상을 기록해 뒀을 뿐이다. “머리 짧은 학생/ 흰 고무신을 신을 아재/ 군용 팬티를 입은 인민들” 중 부역자가 있었다 쳐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잘못된 국가 권력의 남용이었다.
‘여순 10·19’ 당시 여수는 처처가 학살터였다. 사람들 눈에서 벗어난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들은 사람들을 데려다 만행을 저질렀다. “백이십여 명의 사체가 장작더미에 올려졌다는 형제묘/ 삼 일 밤낮 기름으로 태워져 매운 재로만 남은 가슴들이/ 은빛으로 철썩이며/ 사월이면 아직도 검은 모래로 눈을 뜬다”(<모래도 눈 뜨는, 만성리>)는 그곳에 마래터널이 있다. 푸른 바다가 수없이 밀려와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며 ‘여수 만성리’의 검은 모래 해변은 밤마다 그들을 호명하여 통곡한다. 나라가 백성을 살리지 못한 세월에는 우매한 통치자가 있었다. 그 고통은 백성이 감당해야 했다.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저 고집불통인 “조선의 바다에는 왜놈들이 광해狂海처럼 출렁거리고 있다 석인의 머리가 허물처럼 부조浮彫될 때, 부르튼 손에 피가 배였지만 헝겊을 올리는 일도 사치다 모함받고 조정으로부터 돌아온 날부터 사람에게 속지 말라고 진남관 기와가 넌지시 절하는 밤 선조宣祖는 선조船造조차도 몰라 거북선이 발목을 내놓기도 전에 출전하라는 전갈을 보내기도 하였다”(<석인石人 일기>)는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를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눈속임을 위해 ‘진남관’에 우직한 백성을 닮은 7개의 석상으로 간절한 파수를 세운 것이다.
현시대를 살고 있는 파수꾼은 누구여야 하는가를 화자는 시를 통해 일러주었다. “사다리에 별빛을 걸어 두고 구름이 사는 집에 들렀어 구름은 밤의 연못 푸른 별도 물의 유목에서 파도처럼 떠돌지 잠을 베갯잇에 몰아넣고, 몽롱을 던지면 물음표가 달을 물었어”라며,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뜬구름 같은 이상향이나 낭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름으로 사랑을 짓고, 이별은 강물이 되어 바다를 키웠지 밤은 생을 위한 지상의 뒷면 가난한 밤의 정거장에서 시의 씨앗을 붙잡고 싸웠던 구름 한 권의 생을 만들고 있었어”(<구름 한 권>)라고 치열해져야 할 이유와 삶의 방식을 강조한다. 시인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만물에 깃들어 있는 존엄적인 본성을 깨우치려 한다. 삶은 시간의 현재성으로 나타나지만, 시는 영속성을 띠고 있다. 각각의 삶이 시대를 아우르고 훗날 역사의 시간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