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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을 향한 망설임과 궁벽함
염 창 권
새로운 목소리를 찾아
11월 중순, 밤기차를 타고 중국의 도시와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태양이 불을 꺼버린 후 어둠의 치마폭 위로 별들이 떠다녔다.
지상에서는 사람 사는 곳마다 불빛이 새어나오며 주변의 어둑한 공기를 핥아대고 있었다.
들판에 점점이 떠 있는 불빛에서부터 숲 틈서리에 끼워져 있다가 언뜻 사라져버리는 것도 있었다.
대다수의 희미한 불빛들, 그리고 긴 테이프를 오려 붙인 것 같은 불빛이 들판에서 간간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불빛에 의탁하여 내가 읽었던 시조들이 어느 지점에 떠 있을까를 곰곰 생각하여 보았다.
불빛은 각기 고유한 자리에서 떠올랐을 때 제 몫을 다할 수 있다.
신인이라면 너무 밝고 큰 조명 아래 오랫동안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
좀 낯설고 미약하더라도 자기의 영역부터 찾아내고 지켜낼 줄 알아야 한다.
필자가 이번에 월평을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선고의 기준으로 삼은 게 있는데,
그것은 우선 등단의 연차가 낮거나 비교적 덜 알려진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인 중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될 가능성 있는 시인을 집중적으로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현대시조 100년의 역사를 넘기면서 역량 있는 시조시인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시조미학을 성취한 우수 작품들이 누적되어 왔다. 현재의 평단에서는 이미 시적 성취를 증명받은 원로 및 중견 시인들의 작품 위주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들 작품이 암묵적인 시조 비평의 기준으로 거론되면서 시조단의 억압 기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많은 수의 신인들이 기존 시인의 경향에 무의식적으로 추종하는 인상까지 보여 왔다.
뷔퐁은 “문체(style)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했고, 마크 쇼러도 “문체는 주제다.”라고 하였다. 문체(文體, style) 혹은 문채(文彩, figure)는 단어, 비유, 구문, 사고, 어조 등을 통해 드러나는 담론의 특성이자 표현의 자질이다.
정형률 안에서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조의 경우는 이러한 문체적 특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따라야 한다.
몇몇 성공한 시인의 스타일이 새로 시작하는 시인의 스타일로 고정되는 것은 시조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명문 프로구단이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은 신인 발굴에 달려 있다. 유망한 신인은 누구와 닮은 선수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선수이다.
우리 시조시단을 위해서 신인을 애써 발굴하고 또 이들이 발전하도록 격려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실존을 향한 망설임
밤기차는 지상의 좌표 위에 놓인 선로를 바늘처럼 꿰어나가면서 시간의 미미한 행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란 존재는 위도와 경도의 어느 지점에 자리해 있는가? 나의 운동과 지향은 이 장소와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실존의 자각을 위한 첫걸음이다.
이로써 “어디인가 여·기·는”이란 질문이 유효하다. 김보람의 〈태피스트리〉는 ‘나’와 ‘그’ 간의 이항대립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나는 뜨거웠고
그는 차가웠다
나는 위쪽으로 그는 아래쪽으로
뒤엉킨 혼돈 속으로 행렬은 시작되었다
나와 그가 함께 살던 옛집들의 주소로
몸속의 길 터지고 맨몸으로 홀로 선다
배 밑을 간지럽히는 파도 한 길씩 솟고
나는 웃고 그는 운다
나는 먹고 그는 싼다
나는 여기 있고 또 거기 있을 수 있지만
또 한 번 두리번거린다, 어디인가 여·기·는
-김보람 〈태피스트리〉(《나래시조》 가을호)
이 시조가 가진 단점 중의 하나인 각주는 다음과 같다.
“태피스트리는 실로 짜인 회화를 일컫는 말로 씨실(Weft)과 날실(Warp)로 이루어진
색실로 한 올 한 올 직조한 것으로 감각과 기술이 어우러진 섬유 예술작품이다.”
포스트모던 작가이자 사상가인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수많은 각주가 달려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삼장(三章)’이라는 형식적 특성이 강조되는 ‘시조’ 장르의 작시 면에서는, 각주를 시의 외연에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자유시와 시조의 차별성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조의 정형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삼장’ 내에서 의미적 완결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이 시조에 붙여진 각주는 없어도 될 사족에 해당한다.
‘태피스트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 시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인데,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태피스트리’는 하나의 단어이기 때문에 독자의 교양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예를 들자면, 임채성의 《세렝게티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시조집이 있다. ‘세렝게티’가 지명인 줄 안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그전에는 이 시조를 읽을 시간도 없었다. 이 시조를 꼼꼼히 읽으면 당연히 지명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은 독자의 몫이다. 무능한 독자에게 ‘태피스트리’의 뜻을 자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다시 언급하거니와 ‘삼장’은 시조의 내재적 형식률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안에서 다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조의 정형률이 완결될 수 없다.
〈태피스트리〉의 리듬감은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풀려 있으나, ‘나’와 ‘그’ 간의 대응을 병렬시킴으로써 반복률의 효과를 거둔다. 이 시조의 의미 전개는 첫째 수에서 ‘나’와 ‘그’ 간의 대립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여 둘째 수의 심화 단계를 거쳐 다시 셋째 수의 대립과 자기점검으로 완결된다.
대립적인 ‘나’와 ‘그’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상호 대응하는 두 개체가 “뒤엉킨 혼돈 속”에서 “행렬”을 수행함으로써 회화적 무늬를 직조하는 등의 창조적인 생산을 이룬다. 대립을 통한 통합의 과정이 사랑과 생성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발랄한 사유가 이 시조를 의미론적으로 한 차원 끌어 올린다. 첫째 수의 ‘뜨거움’과 ‘차가움’의 대립도 사실은 양성적 합일을 위한 준비 과정에 해당한다.
둘째 수에서는 이와 같은 대립이 충족을 위한 고유한 역할임을 나타내면서 합일점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실존의 좌표가 바로 “옛집들의 주소”이자 “몸속의 길”이다. 물질적 장소가 주체의 몸 안에 흘러들어오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존은 늘 한계 상황에 처하게 마련이다. “맨몸으로 홀로 선다/ 배 밑을 간지럽히는 파도 한 길씩 솟고”에서 보듯 화자의 갈망은 아직 충족되지 않는 상태이다.
마무리에서는 현존의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완결되는데, ‘나’와 ‘그’ 간의 대립과 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적 장치로 드러난다. “나는 여기 있고 또 거기 있을 수 있”으므로, 열/냉, 상향/하향, 웃고 우는 것, 먹고 싸는 것 간의 대립이 하나의 좌표 설정을 위한 도구적 장치일 뿐이라는 다소 위악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태피스트리’처럼 도구적으로 역할 부여된 현대인의 삶이나 사랑에 대하여 화자는, “또 한 번 두리번거린다, 어디인가 여·기·는”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젊은 시인이기 때문에 이처럼 실존에 대한 망설임과 회의는 당연히 다가올 수 있는 것이며, 정말 내가 위치한 곳이 어디인가 두리번거리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정혜숙의 〈분분히, 아무렇지도 않게〉는 현존의 지형도를 간파한 연후에나 가능할, 소멸에 대한 인식을 깊게 보여준다. 그의 시 〈붉은 사기(史記)를 듣다〉에도 눈길이 오래 머물렀지만, 각주가 두 개나 붙어 있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고산자”에도 각주를 붙였어야 마땅하다. 시인 자신도 갑자기 깨달은 것이어서 각주를 붙여야만 논의를 완성할 수 있었다면 독자로서도 별로 달가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청령포”와 “관음송”에 붙은 두 개의 각주를 삭제하면 오히려 여백이 가져오는 깊이나 원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길의 상징성을 감안한다면, 인간이 길 위에 서 있을 때 실존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길’은 정신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 즉 형이상학적인 세계와 형이하학적인 세계를 다 포함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길은 일차적으로 물리적 길인 도로를 의미한다. 이곳을 통하여 사람들은 왕래하고, 생활을 이루어간다. 반면, 유가(儒家)에서는 인륜을 실현하는 원리가 바로 도(道) 즉 법도가 되며, 도가(道家)에서는 세계의 모든 현상은 우주적 길[道]의 부분으로 파악하며, 우주적 법칙(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도를 실행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도는 물리적 공간으로서 길인 동시에 정신세계의 본질로서 진리이다. 즉 길을 통하여 가시적인 것, 불가시적인 것을 나타낸다.
길 위에 오래 서 있다가 그대로 굳어서 길의 형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 〈분분히, 아무렇지도 않게〉에서 길에 대한 비유적 등가물로 등장하는 대상이 “고산자(古山子)”와 “태산목”이다.
조선 사람 고산자처럼 길 위에 오래 서 있었다
꽃의 늦은 기별을 문지방에 넣기까지는……
태산목 가지 끝에서
마지막처럼 꽃, 핀다
고작 사나흘 지상에 머무는 어휘를
모른 척 못들은 척
사람들이 지나가고
분분히, 아무렇지도 않게
꽃들이 또 다녀간다
—정혜숙 〈분분히, 아무렇지도 않게〉(《시조시학》 가을호)
관계 속에서 사람들 간의 길이 만들어진다. “아무렇지도 않게”라고 말할 때는 이 관계성의 초월을 뜻한다. 인연을 만드는 것은 이 관계에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생애를 걸어 조선 땅의 지형도를 자신의 몸속에 새겨 넣은 ‘고산자’나, 길가에 서서 수백 년의 세월을 나이테에 새겨 넣은 ‘태산목’의 모습이나 간에, 이 인연이 만드는 허망함과 고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천지사방을 떠돌았을 고산자에 대한 기억이나 태산목이 피우는 “마지막 꽃”이나 간에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고작 “사나흘” 간의 일에 불과하다. 작중 화자는 ‘고산자’의 추구에 대비되는 길 위의 상념 중에 “꽃의 늦은 기별을 문지방에 넣”으며 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꽃의 기별을 늦게야 문지방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느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모르는 고산자처럼 길의 향방은 망설임 속에서 아득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태산목에 매달린 꽃들은 “고작 사나흘 지상에 머무는 어휘”이지만 “모른 척 못들은 척/ 사람들이 지나가”버린다. 이로써 문지방을 나선 화자의 안색이 궁금해진다. 꽃은 다름 아닌 주체의 심리적 표상이기 때문이다.
첫째 수에서 “꽃의 늦은 기별”을 “문지방”에 밀어 넣는 행위를 통하여, 주체의 몸은 “태산목”처럼 꽃 피우려는 생성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둘째 수에서 꽃이 “어휘”로 환치되면서, 꽃이 다름 아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계는 단절되고 그 어휘를 눈여겨보아 주거나 귀담아들어 주는 이도 없다. 이와 같은 단독자로서의 꽃핌은 실존의 당연한 현상이다. 외로움이나 고독감은 세월을 두고 이전되는 생의 날빛이라 할 것이다. 둘째 수 종장에 제시된 초월적 비전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수많은 생이, 사랑이, 그리고 우리가 쓰는 시조가 다녀가신다. “분분히, 아무렇지도 않게/ 꽃들이 또 다녀”가듯이, 인연이나 이별은 기약도 없이 피었다가 진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실존의 궁벽함
진정한 실존은 한계 상황을 통해서만 자각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한계 상황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통해 참 실존을 추구할 수 있다.
박성민의 〈목도장 파는 골목〉은 길 위의 생이 만드는 몸의 굴곡을 보여준다. 박성민 시인은 대상을 이미지화하고 여기서 의미를 발굴하는 데 능숙하다. 이는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움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발굴단 같은 그의 안목이 자기 나름의 문체를 만들어가는 특성이라 좋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도장 파는 골목〉에서 ‘이름’과 ‘길’은 상호 대응관계를 형성한다. 노인이 나뭇결을 칼로 밀어 이름을 돋우어 낼 때, 나머지 여백은 음각되면서 좁은 골목길로 피어난다. 여기서 ‘이름’과 ‘길’은 구별될 수 없는 한몸이기에 음각된 길 위에 피어난 이름은 협소한 골목길이라는 영역 안에 갇히게 된다.
노인의 손끝에서 이름들이 피어난다.
이름 밖 나뭇결이 깎여나는 목도장.
움푹 팬 골목길 안도
제 몸 깎고 피어난다.
캄캄한 음각 안에 웅크려 있는 고독.
나 아닌 것들이 밀 칼에 밀려날 때
촘촘한 먼지 속에서
울고 있는 내 이름.
노인의 이마에서 전깃줄이 흔들리고
골목에 훅, 입김 불자 길들도 흩어진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붉은 해 찍는 저녁.
—박성민 〈목도장 파는 골목〉(《시조세계》 가을호)
흔히 ‘목도장’은 중요한 계약관계에서 사용하기보다는 일회성의 동의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목도장이 찍히는 곳은 골목길이라는 협소한 삶의 현장을 벗어날 수 없다.
이시조는 “깎여나는 목도장”에 피어나는 “이름”의 서사를 통하여 주체를 타자화시킨다. 삶의 형상은 “캄캄한 음각 안에 웅크려 있는 고독”과 같이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시민적 궁벽성이다. 급히 목도장을 파서 날인을 해야 할 때, “촘촘한 먼지 속에서/ 울고 있는 내 이름”처럼 주체가 타자화되면서 골목길 안의 부박한 삶과 현존에 대한 회오를 드러낸다. 이 우울한 응시는 “도장에 인주를 묻혀/ 붉은 해 찍는 저녁.”이라고 했을 때에도 희망의 언사가 억눌려 있다. 쇠락한 도심의 골목에 떠오른 “해”는 거의 일몰의 지점에 있으며 도심의 궁색함을 역광으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골목에 모여 사는 음각된 얼굴들, 그들이 목도장을 모아서 붉은 인주를 묻혀 찍고 나면 은행 자본이 밀려들면서 좁은 골목길도 “훅,” 하는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릴 것이다.
김현의 〈어떤 행렬〉은 삶의 현장성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투쟁도 끝나버린 재개발 철거 지역”의 문제를 보편적 감수성으로 심화시키는 것이 이 시조의 힘이다.
투쟁도 끝나버린 재개발 철거 지역
누군가 창을 보며 먼지를 닦던 생각들
이제는 열어 볼 풍경도 닫아야 할 방도 없다
집 나간 이들 돌아올 일 없는 골목길
비닐장판 깔고 앉아 나누는 소주 몇 잔
불콰한 저녁 노을이 눈물 자국으로 번진다
산 사람 어디 가도 산다고 떠나는 행렬
쪽간판 하나 달고 서 있는 보안등이
자기도 못 돌아온다고 보내는 길 밝힌다
—김현 〈어떤 행렬〉(《서정과현실》 하반기호)
보편적 감수성은 타인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능력이다. 손익계산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무제약적 실천이 참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고 야스퍼스는 말한다. “누군가 창을 보며 먼지를 닦던 생각들”은 살아왔던 날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력이다. 먼지 낀 창을 닦던 허술한 방이었지만, 그 방에서조차 안주하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 비록 “산 사람 어디 가도 산다고 떠나는 행렬”이지만, 둘째 수의 “비닐장판 깔고 앉아 나누는 소주 몇 잔”에서 보듯 현존의 피폐함은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이어서 이웃 간의 연대가 해체되면서 그 상실감이 “눈물 자국으로 번”지는데, 이때의 행렬은 쫓겨나가는 무리의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 셋째 수에 이르러 삶의 현장을 비추어왔던 보안등이 “자기도 못 돌아온다고 보내는 길 밝힌다”고 했을 때, 어둑한 풍경 속의 행렬이 실루엣처럼 떠오른다. 장소적 친화성이 무산되면서 상실감이 극대화되는 장면이다.
모두 세 수로 이루어진 〈어떤 행렬〉은 “비워진 방”에서 시작하여(낮), 떠나는 사람이 나누는 “소주 몇 잔”과 “눈물 자국”의 심화 단계를 거쳐(저녁), 최후로 남겨진 “보안등”에 초점이 머무는(밤) 서사적 진행을 보인다. 이 시조의 장점은 우선 현장성을 핍진감 있게 살려내는 데 있다. 다만 둘째 수 종장의 “불콰한 저녁 노을이”에서는 시간성을 잘 나타내고 있지만, 철거촌의 풍경을 “불콰한” 술기운에 의탁함으로써 상실감을 정면으로 응시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흠이다.
이상으로 네 편의 시조를 통하여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조의 성과를 되짚어보았다. 시조 본연의 맛과 멋을 살린 작품들은 다른 평자에 의해 논의될 것이므로, 필자는 신인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찾아내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하였다. 가능성 있는 신인의 작품을 빠뜨렸다면 전적으로 필자의 편협한 안목 때문이다.
월평에서는 우수한 작품을 찾아서 소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가진 한계를 찾아내어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등의 불편한 평가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생산성이 있다고 본다. 앞으로 시조단에 질문을 던지는 월평을 진행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질문으로 문인수 시인의 시집에 수록된 다음 시를 해설 없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는 다음 월평의 주제로 삼을 예정이다.
다섯 살, 일곱 살, 잠든 두 아이 들여다본다.
들여다볼수록 당신 참, 새록새록 닮았다.
와르르, 껴안게 되는 이, 감격의 도가니……
—문인수 〈사별〉(《그립다는 말의 긴 팔》 서정시학)
-발췌: 《유심》2013년 1월호
염창권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햇살의 길》 《일상들》 등과 평론집
《집 없는 시대의 길가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