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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국가를 상징하는 존재로 일컬어지던 동양의 군주제 국가에서, ‘종묘’와 ‘사직’은 나라의 존망을 의미하는 장소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군주제였던 조선시대까지 건국 이후 종묘와 사직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으며, 당시의 군주들은 ‘종묘와 사직을 보전’함으로써 권력의 정통성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다. 주지하듯이 ‘종묘(宗廟)’는 한 나라를 세운 군주로부터 역대 왕들의 위패(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다. 왕들이 세상을 떠나면 별도의 장소에 무덤(왕릉)을 만들어 매장하지만, 죽은 이를 상징하는 위패만은 종묘에 함께 모아 함께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지금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시대 왕족이었던 전주 이씨들이 모여 '종묘대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때 연주되는 음악이 바로 종묘제례악이다.
이에 비해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모신 장소로, 건물이 아닌 단을 세워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있던 주체가 군주였기에, 사직에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면 곧 국가가 망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하겠다. 전통시대에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으며, 당시에는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인가 혹은 흉년인가에 따라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있었다. 결국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 해의 농사가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결과가 군주의 통치력과 관련되었다고 믿었던 관념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직단에서 매년 일정한 시기에 제를 올렸지만,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왕이 행차해서 수시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현재 남아있는 종묘와 사직은 조선시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양의 관념에서 종묘는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사직은 자연스럽게 궁궐의 서쪽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묘는 조선시대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경복궁에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직단은 서쪽에 위차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종묘와 사직을 글과 사진으로 설명하면서, 그 의미와 특징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주지하듯이 존선시대에는 '임진왜란(1592)'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당시 군주였던 선조가 한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당시 경복궁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종묘와 사직 역시 이 시기에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는 종묘와 사직단은 그 이후 재건되었으며, 특히 사직단의 영역은 도로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면적보다 많아 축소되었다고 한다.
이제 대대로 세습되는 군주가 존재하지 않고, 농업 역시 다양한 산업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은 조선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는 왕조가 존속되면서 모셔야 하는 군주의 위패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에, 시기에 따라 점차 증축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처음에 정면 7칸의 건물이었던 종요믜 정전이 조선 후기에 19칸까지 늘어나게 되었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과 종묘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산인 응봉에서 이어 내려오던 산의 주맥'이 잘려졌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현재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의 궁궐이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관광지로 답사하는 장소로 여겨지고 있지만, 주변의 종묘와 사직단도 찾아 해당 장소가 지닌 의미와 역할에 대해 이해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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