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5일,
젊은 느티나무(광주시각장애우)회원들과 하하문화센터 회원들과 동행하는 가을철 문학기행을
해남 녹우당과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찾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시야를 흐리게 하였지만, 주최한 측에서 같이 동행하게 하여서
감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계양 교수님이 우리들이 답사할 녹우당과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설명에 준다.
김남주 시인은 '전남 해남 출신이고,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고 설명한다.
어머니(김남주)
그 옛날 제가 외지로 나설 때마다
동구 밖 신작로에 나오셔서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라는 신신당부하시던 어
머니
가다 먼 길 구풋하면 먹어 두라고
수수떡 계란이며 건네주시고
옷고름 콧잔등에 찍어 우시던 어머니
이제는 예순 넘은 나이로
끌려간 자식놈이 그리워
철이 바뀔 때마다 옷가지 챙겨 들고
흰 고개 검은 고개 넘나드시는 어머니
.......
나를 결정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고
날 낳으신 당신이고 당신 같으신 어머니들이고
날 키워 준 이 산하 이 하늘이니까요
해방된 민중이고
통일된 조국의 별이니까요
(하하 '김영란'회원 낭독)
교수님께서 계속 자세히 설명해 준다.
'김남주 시인께서 1945년 전남 해남군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와 해남중을 거쳐 광주일고에
입학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 자퇴하였고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하고,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 배포
하여 징역 8개월 옥고를 치렸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
에서 복역했다.
그가 남긴 470여편의 시가 있다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김남주)
일흔 넘은 나이에 밭에 나가
김을 메고 있는 이 사람을 보아라
아픔처럼 손바닥에는 목이 박혀 있고
세월의 바람에 시달리느라 그랬는지
얼굴에 이랑처럼 골이 깊구나
봄 여름 가을 없이 평생을 한시도
일손을 놓고는 살 수 없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좋아했다
자식 낳고 자식 키우고 이날 이때까지
세상에 근심 걱정 많기도 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사랑했다
나의 피이고 나의 살이고 나의 뼈였던 사람
(하하 '장명숙'의 낭독)
해남의 인물이라면 모두가 예술인 것 같다.
여류시인 고정희(高靜熙), 건강한 시인 김준태, 혁명적인 지사적 오롯함의 김남주, 80년대식 감성주의 황지우,
김지하, 소설가 황석영이 낙향하여 그들의 자랑스런 문학적 생산된 곳이라서 예향이라 부르는 곳,
해남!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국문학사에서 빛나는 한 장을 차지하는 고산(孤山) 윤선도와 조선 후기 선비화가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가 5백년 동안 살고 있었던 녹우당(綠雨堂) 고택에 대해 계속 설명했다.
해남읍에서 대흥사 쪽으로 꺽어지면 넓은 들판을 삼산벌을 부르는데, 옛날 호남의 대부호 해남 정씨의 소유의
땅이라 한다.
해남 정씨의 선대의 예에 따라 자손균분의 상속으로 이 땅은 해남 윤씨에게 시집간 딸에게 되었주게 되었고, 처갓집
덕분에 큰 부자가 된 어초은(漁樵隱,고기잡고 땔나무하는 숨겨진 사람) 윤효정(尹孝貞)은 일찍히 장자상속을 시행
하고 이것을 윤씨집안 만대의 유언으로 남기어 해남자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흥갑부가 된
해남 윤씨집안에는 이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인물을 배출하기 시작하여 어초은 4대손에 이르면 고산 윤선도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고 그의 증손자대에는 공제 윤두서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경주에서는 만석꾼 최부자, 구례 토지면 운조루, 해남의 녹우당 등 3대 부자들이 지금까지 살아 남는 것은 3덕(三德)을
베풀었기 때문이다고 한다. 3덕은 근검과 절약, 나눔을 생활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가집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느 새 해남에 도착됐다. 맑게개인 하늘의 나타났다.
회색의 도시에서 벗어나 가을색에 뛰어난 경치를 만끽하여고 차창밖을 보았지만 재미난 이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려고
한다.
해남을 자주 왔었지만 녹우단과 김남주 시인의 생가에 처음이다.
해남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김남주 시인 생가에 도달했다.
우리를 싣은 버스는 봉학리의 좁은 언덕길과 구불구불 골목길이었지만 가까으로 생가에 까지 도달했다.
생가는 부락 맨 끄트머리에 있었고, 밭을 버스정류소로 만드는 것 같았다.
집주위에는 배추밭이 형성되어 있어 과연 해남배추가 유명한 곳인 것 같았다.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는 포앰콘서트 제19회 김남주문학제>가 저번 토요일에 끝났으나 아직 철거하지 않았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면 초갓집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슬레트(?)지붕으로 교체된 것 같다.
본채와 사랑채가 있다. 본 채의 옆에는 김남주의 흉상이 있고, 철판으로 시인의 시가 게재되어 있었는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민족시인김남주의 생가'의 현판이 있고, 마루에는 '함께가자 우리 이 길로'의 현판이 붙어 있다.
다음은 점심을 먹고 녹우당(綠雨堂)으로 간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고 말을 들었다.
삼산벌을 가로질러 3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왼편으로 '고산 윤선도 고택'이라는 표지판이 나오는데
깊숙이 자리잡은 마을이 바로 연동마을이며, 연동마을 제일 안쪽 울창한 비자나무숲에 덮인 덕음산 바로 아래에
해남 윤씨 종가집이 종가집이 자리잡고 있다. 연동마을에 주차장이 있고, 맞은 편에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녹우당의 배경으로 서 있어 이 집의 연륜을 증언해준다.
녹우당은 자물쇠로 담가둔 채 출입을 못하게 하였지만 유물전시관은 개방해 놓았다.
녹우당(綠雨堂) 편액(扁額)은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옥동(玉洞) 이서(李溆)의 글씨이다.
그는 당대의 명필로 서결(書訣)까지 지었고,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였다고 한다.
그 당호를 녹우당(綠雨堂)이라고 한 것은 '뒷산의 비자나무가 한줄기 바람에 스치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소리처럼 들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고 한다. 과연 소리에 민감한 분들의 생각해서 붙여진 이름이였구나.
유물전시관의 지하 1층 등 2층의 전시관으로 되어 있다.
오우가(五友歌)
내 벗이 몇인가 하니 물과 바위와 소나무와 대나무이다.
동산과 달이 떠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의 빛깔이 깨끗하다고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가 맑다고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자마자 쉽게 지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빛을 띠는가?
아마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깊은 땅속에서 뿌리가 곧은 줄을 그것으로 인해 알겠구나
나무도 안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냐?
저러고도 사시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말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 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을 하지 읺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고산 윤선도)
첫댓글 나는 해남에서 5년 근무하였네요. 내 인생 황금기였지요.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들이 외지인을 거부하지 않고, 개방적이고 합니다. 해남현감따라 온 몸종의 아들을 데리고 현감아들이 해남장을 기웃거리다 그 몸종의 아들이 장사를 배워 두산그룹이 되었다는 자서전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장흥이나, 강진과는 다르고 완도, 진도와도 다릅니다. 참 좋은곳 다녀오셨습니다.
나도 김남주시인집 혼자 방문하였는데 약 15년전 그의 영혼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독재자가 미웠고요. 그랬습니다.
정다운님
해남을많이왕래하였어도녹우당과김남주민족시인생가는처음이었지요
이번기회는못가지만다음기회에갈기회가생기겠지요?
그리고두산그룹회장이이곳출신이라구요?
처음듣는애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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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마을과 땅끝전망대는 가보았지요.송호리해수욕장(우리 막내가 처음 가본 해수욕장.얕으막한 입구에서 찰랑찰랑 기어다녔지요).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득~한 풍경이 추억처럼 아련합니다. 김남주 시인과 해남 지역 문인들에 대해 두루두루 잘 배우고 갑니다.
아마도 두산그룹 회장 할아버지, 박승직씨의 아버지가 해남 사람은 아니고, 그 때 현감은 민비의 집안 사람이 이었고 해남현감을 따라온 박승직씨 아버지가 해남현감의 몸종이었는데 해남현감의 원님 아들과 두산그룹 모태가 되었던 박승직씨가 해남 장터에서 많이 놀았고, 해남은 물산이 풍부하여 장사를 배웠다고 두산그룹 회장 박병두 자서전에 보면 이런 가계도가 나온데, 돌아가신 저의 선친께서 주류합동회사를 한 관계로 서재에 책이 꽂아 있기에 슬쩍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어찌 되었건 해남은 진도, 완도 등 섬지역의 중심에 있고 들판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고 외지인을 거부하지 않는 지역 특징이 있습니다.
진주에서현직근무때진양군이있어습니다
진양군과의령군이진주를감싸고있는데거기에는LG그룹과삼성그룹의총수들의고항이었습니다
그곳에는넓은들판과남강이흐르는곳이어습니다
결국넓은들판과넓은강과관계가있는것같습니다
신선생님, 외람된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나 꼼꼼하고 착실하게 문학기행 강의를 들으셨는지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선생님 덕분에 문학기행을 한번 더 다녀온 듯합니다. 저는 해남이 고향이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고요,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새삼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다운 선생님 댓글을 통해서도요. 감사합니다.
한아님!댓글감사드립니다
저도선조들이해남에서사디다가6대조때부터완도군고금면으로입도하여살다가부모님이광주로이사와서살게되어습니다
선조의산소는지금도완도에있습니다
한아님의외람된칭찬입니다.저는교수님의설명을들으면서글로펴내면좋겠다고생각해서자료를찾아서글로썼습니다.
그런데칭찬을구구절절했습니까
고맙습니다
삶의 소중한 시간이 별 흔적없이 사라졌을텐데 선생님께서 기행 때마다 귀담아 들으시고,눈여겨 보셔서 기억의 창고를 만들어 주시네요. 수건 선물까지~
훈훈한 문학기행 되게 해 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