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화살 피하기
스승이 제자에게 묻는다.
"만약 누군가의 화살에 맞으면 아프겠는가?"
제자가 대답한다.
"아픕니다"
스승이 다시 묻는다.
"만약 똑같은 자리에 두 번째 화살을 맞으면 더 아프겠는가?"
제자가 말한다.
"몹시 아픕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한다.
"살아 있는 한 누구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한 감정적 고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첫 번째 화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고, 두 번째 화살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상실과 실패와 재난은 누구의 삶에나 일어난다. 그러나 고통의 대부분은 실제의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더 심화된다. 인생이 고통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맞는 화살은 스스로 자신에게 쏘는 두 번째 화살이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을 때 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번째 화살을 자신에게 쏘기 시작하며, 이 두 번째 화살이 첫번째 화살의 고통을 몇 배나 증폭시킨다.
한 여성이 20년 전에 이혼을 했다. 그 20년 동안 그녀는 전남편의 부당한 행동에 화가 난 채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자식들과 친구들 앞에서 그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남자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한 달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다. 스스로 쏜 두 번째 화살이 너무 많이 박혀 있어서 사랑의 감정이 싹틀 공간이 없었다. 분노로 인해 그녀의 삶은 얼어붙었으며, 모든 관계가 제한적이 되었다.
백혈병 선고를 받고서야 그녀는 분노를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지 않고 삶을 허비한 것이 너무 후회되었다. [인생 수업]의 저자 에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를 찾아 온 그녀는 평화롭게 살 수는 없었지만 평화롭게 죽고 싶다고 고백했다. 스스로에게 쏜 두 번째 화살이 자신의 삶을 망쳤음을 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이미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는 지름길이다.
불쾌한 사건이 심리적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하다.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다른 차가 방향 지시등도 없이 끼어든다. 우리는 금방 흥분해서 감정적이 된다. 두 번째 화살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맥박 수를 증가시킨다. 주말을 비워 두고 명상 프로그램에 등록했는데 하루 전에야 취소 연락이 온다. 숲 속 명상 센터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던 계획은 한수간에 분노의 감정으로 바뀌어 주최측과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배신이다. 형제와 친구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 경험만으로도 상처가 큰데,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스스로에게 쏘는 감정적 화살이다.
내 친구가 터무니없는 누명을 쓴 적이 있다. 그로선 억울한 일이었지만 인간 심리의 왜곡된 면을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 진실하고 정의롭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자신의 이익과 질투심 때문에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곤 한다. 이 악의적인 비난 때문에 그와 가깝던 이들까지 등을 돌렸다. 조금만 상황을 살펴봐도 헛소문임을 알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때로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진실이 신발끈을 묶고 있을 때 거짓은 지구 반 바퀴를 돈다.
억울함, 배신감, 증오, 복수심이 꿈속에서도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그로 하여금 현재를 생생하게 살지 못하게 막았다. 화분에 뿌리가 꽉 차서 분갈이가 필요한 식물처럼, 마음속 화분에 부정적인 뿌리들이 뒤엉켰다. 우리는 상처 입은 감정들이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것을 너무 오래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그를 더 괴롭히는지. 일어난 사건이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인지. 마침내 그 친구가 그렇게 했듯이 우리는 두 번째 화살들을 단호히 뽑아 버려야 한다.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자신에게 화살을 쏘아 대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은 것이다.
화살에 맞으면 아픔을 느끼되 그 아픔을 과장하지 말라고 붓다는 충고했다. 병이 난 제자를 찾아가서도 아파하되, 그 아픔에 깨어 있으라고 가르쳤다. 상처에 너무 상처 받지 말 것, 실망에 너무 실망하지 말 것, 아픔에 너무 아파하지 말 것 -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잠시 아플 뿐이고, 잠시 화가 날 뿐이고, 잠시 슬플 뿐이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맑고 투명해진다.
우리는 첫 번째 화살에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익숙하지만, 두 번째 화살을 다루는 데는 매우 서툴다. 칼루 린포체는 말한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어는 마을에서 산비탈을 개간해 배나무를 심었다. 배를 많이 수확해 가난에서 벗어나고 자신들도 배를 먹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을 나르며 희망을 쏟아 부었다. 해마다 키가 크는 배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데 몇 해 뒤 그 나무들에 열린 것은 배가 아니라 사과였다. 애초에 묘목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배나무에 오랫동안 많은 기대를 걸었던 마을 사람들은 실망이 너무 커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이 사과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마을에 이미 사과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사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그것도 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그들에게는 사과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배를 팔러 시장에 갈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사과를 배라고 부르는 그들을 놀리고 비웃었다. 그런 식으로 어딜 가나 조롱을 피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기대한 배가 아니라 사과를 매단 그 미친 나무에 대한 배신감과 수모감이 극에 달하자, 마침내 그들은 일제히 산비탈로 몰려가 나무를 모두 뽑아 버렸다. 그래서 몇 년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극도의 좌절과 분노감만 남았다. 마을 사람 전체가 스스로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아 댄 것이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미친 사과나무]의 줄거리이다.
배가 열리기 원하지만 사과가 열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은 마음속에서 상상한 배와 현실의 사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일어난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그 사건들을 우리는 즉각적으로 개인화시키고 감정을 투영한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우리를 더 상처 입히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문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마음에서 온다.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거나 도망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스스로 쏘는 화살은 피할 길이 없다.
정신에 가장 해로운 일이 '되새김'이다. 마음속의 되새김은 독화살과 같다. '문제를 느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문제 때문에 쓰러지지는 말라.'라는 말이 있다.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은 사실 큰일이 아니다. 그 화살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살 때문에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는 것이 더 큰일이다. 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것은 마음의 선택에 달려 있다. 외부의 일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쏠 것인가?'
삶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어리석으면 더 고통스럽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떻게하는가는 그들의 카르마가 되지만, 그것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당신 자신의 카르마가 된다.'는 말은 진리이다.
어떤 사람이 베트남 출신의 영적 스승 틱낫한에게 물었다.
"피안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고통을 경험합니까?"
깨달음에 이른 후에도 고통받는 일이 생기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틱낫한은 말했다.
"물론이다. 고통스러운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기술을 알고 있으면 그 고통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
그 기술은 자신이 지금 자기에게 화살을 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리는 순간 화살 쏘기를 멈추게 된다. 그것이 알아차림의 기적이다.
첫댓글 강화댁, 오랜만이우. 그곳 여름은 어떠하오?
작가회 동인지에 원고도 안 보내며 어찌 지내시는지?
두 번째 화살, 나도 참 많이 쏘는 사람이어서 이 글 읽으니 쪼매 거시기합니다.
화살 하나 장만해서 벽에 걸어두고 봐야 할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