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남의진 기념사업회 자료에서 옮김)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40
정용기(鄭鏞基) 大將 ①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 일명 진택(鎭宅), 정환직 선생의 맏아들이다. 단기4195(서기1862)년 12월13일 경북 영천시 자양면 검단리(현 충효리)에서 출생. 서(書)․화(畵)․음(音)․률(律)에 모두 통달하였고, 농사를 주업으로 공예업을 부업으로 삼았으며 상시로 인근 청년들의 교육에 취미를 두어 거주하였던 곳마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많았다. 금릉군 봉계리, 영양, 죽장현 창리, 영천 검단리 등으로 옮겨 살았으며, 검단리에서 이한구, 정순기와 교류하면서 구국(救國)사업에 사생(死生)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였다. 아버지 정환직 선생이 삼남(三南)을 순찰할 때 배종(陪從)하면서 17수(首)의 시를 지었고, 서울에서 모시고 살 때 30수의 시를 지었다. 또 시국을 개탄하여 각처에서 대중 강연을 하고 서면으로 위정자들을 탄핵하기도 했다. 당시 국가에서 일본의 차관을 갚지 못하여 국토를 할양(割讓)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전 국민이 3개월간 담배를 금하고 담배값을 모아 국채를 변상하자는 국채보상단연회(國債補償斷煙會) 운동이 일어났는데 정용기 장군은 경상도를 담당하여 순회하였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당하여 충정공(忠正公) 민영환이 순절한 후 그의 옷과 칼을 둔 곳에 대나무가 솟아오르자 애사(哀詞) 5편을 지어 전 국민으로 하여금 추도(追悼)를 더욱 돋우었다. 그리고 부친이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자 함에 3일간 석고(席藁: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분을 기다림)하여 허락을 받고 12월 20일 서울을 떠나 영남으로 돌아왔다. 이한구, 정순기, 손영각 등과 거병을 위한 준비를 할 때, 나라와 백성의 사정을 고려하여 우선 민심을 바로잡고자 권세가(權勢歌), 통유문(通諭文), 격려문(激勵文) 등의 선전물을 만들어 반포하였다. 원근(遠近) 각지에서 모집에 응하는 인원이 천여 명에 달하니 책임을 분담하여 임무를 맡기게 된다.
내부찬획: 이한구 ․ 정순기 ․ 손영각 등, 각 지방 연락: 이규필 ․ 백남신 ․ 정완성 ․ 최기보 ․ 최치원 ․ 정진학 ․ 정대하 ․ 이창송 등, 영천 지역: 정연호 ․ 이수인 ․ 이형표 ․ 정치열 ․ 정치석 ․ 정치우 ․ 이중영 ․ 정진영 ․ 이두규 등, 신녕 지역: 권규섭 ․ 성낙희 ․ 성낙호 ․ 황보근 ․ 이하수 ․ 양석용 등, 흥해 지역: 최세한 ․ 정래의 ․ 조성목 ․ 김창수 등, 청하 지역: 이규상 ․ 오수희 ․ 김찬묵 ․ 김상규 등, 기계 지역: 이종곤 ․ 김태환 ․ 김학이 등, 죽장 지역: 안수원 ․ 임병호 ․ 김순도 등, 영덕․영해 지역: 구한서 ․ 김태언 등, 영일․장기 지역: 김인확 ․ 박경화 등, 진보 지역: 우영조 ․ 김일언 등, 청송 지역: 서종락 ․ 남석우 ․ 남석인 ․ 남석헌 ․ 김태언 ․ 조태초 ․ 오상영 ․ 임중호 ․ 심일지 등, 영양․봉화 지역: 이세기 ․ 남석우 등, 예안․안동 지역: 김석정 ․ 이경구 ․ 이상호 등, 비안․의성 지역: 박태종 ․ 배연집 등, 군위․의흥 지역: 박 광 ․ 조경옥 등, 하양․경산 지역: 정춘일 ․ 손선일 ․ 손기찬 등, 대구․현풍 지역: 손양윤 ․ 손양상 ․ 김도언 등, 청도․창녕 지역: 김성극 ․ 박문선 ․ 박용운 등, 울산․언양 지역: 김진현 ․ 최욱조 ․ 박기동 등, 영산․밀양 지역: 박한종 ․ 권대진 등, 지례․고령 지역: 정석기․윤무건 등, 인동․칠곡 지역: 장성우 ․ 손영목 등, 금산․성주 지역: 정환문 ․ 정환집 등, 상주․선산 지역: 양제안 ․ 손익선 등, 경주 지역: 서준성 ․ 이종곤 ․ 홍재병 ․ 이능추 ․ 손수기 ․ 홍구섭 ․ 홍우섭 ․ 서중표 ․ 조상환 등.
이들의 활약으로 거병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하고, 엽총을 가진 포수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강제징발을 하여 본부에 편입시켰다. 병신(丙申:1906)년 3월 5일, 각지의 의병들이 검단에 모여 의진의 이름을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정하고 정용기 장군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山南義陣遺史 제3편 大將 鄭鏞基將軍 略歷 P183~259><山南倡義誌 卷下 P14~18>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41
정용기(鄭鏞基) 大將 ②
정용기 장군은 우선 농번기를 맞은 농민을 위안하고 군가를 지어 사기를 진작시켰다.
1. 백두산 벋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 / 아름다운 금수강산 단군님 터전 대대로 이어받은 이천만 우리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2. 억만년 자리 잡은 대한의 자손 침략의 역사 없는 백의민족들 / 나려 이후 왜구가 침노하더니 임진왜란 가신지 몇 년 되었나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3. 도이의 소추가 또 쳐들어와 아름다운 이 강산을 더럽히었네 / 조상에 이어받은 재주와 용기, 힘을 모아 왜적을 쳐부수어라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 4. 보아라 이 강산에 밤이 새나니 이천만 너도나도 함께 나가세 / 광명한 자유독립 탈취한 다음 태극기 높이 들고 만세 부르자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단기 4239(서기 1906)년 3월5일 행진(行進)을 시작하여 지방 부대들을 모두 강원도 오대산에 집결토록 연락하고 본부는 영천, 청송 등지를 경유하여 각 지방 부대들을 조종하면서 북으로 향하다. 이 때 영해 신태호[신돌석] 의병진에서 종사 신태종을 보내 협공을 요청하므로 이에 응하여 청하읍을 공격하려고 신광을 지나던 중 경주진참령 신태호의 간계에 빠져 중군장 이한구에게 군무(軍務)를 일임하고 경주로 갔다가 붙잡혀 대구옥에 갇히고 만다. 옥중에서 14수의 시를 짓는다. 산남의진은 대장이 없는 상태에서 중군장 이한구의 인솔아래 적과 싸우다 7월 하순에 부득이 진영을 해산하고 후일을 기약하게 된다. 다행히 8월3일 장군이 대구경무청에서 석방되고, 정환직 선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내년 오월에 강릉에서 영남의진이 서울부대와 회합하기를 약정하고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온 장군은 울화병이 발작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다시 의진을 정비하고자 각지에 연락하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경고문(警告文), 청조문(請助文)을 지어 반포하였다. 단기 4240(서기 1907)년 4월에 산남의진 제2차 진영을 세우니, 군수품과 화약이 유입되고 그 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안동지방의 김석정 부대, 동해지구의 임중호 부대, 의성지방의 박태종 부대, 경주지방의 홍구섭 부대, 신녕지방의 권규섭 부대 등이 돌아왔으며, 울산과 남영의 병정(兵丁) 수십명이 입진하였다. 또한 본부의 여러 부서를 정하고 정용기 장군은 다시 대장에 추대되었다. 청하를 습격하여 승리한 후 관동지방으로 진격하려는 작전은 무기가 부족하고 대부분 경상도 병사라 원행길의 준비 부족 등으로 포기하고 죽장 등지로 회군하였다. 이 때 남영병정 우재룡이 입진한다. 8월14일 신성(薪城)전투에서 이치옥이 전사하고, 8월24일 자양(紫陽)전투에서는 왜장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그 날 저녁 정환직 선생이 검단동 집으로 와서 그간의 보고를 듣고 여러 장수들의 노고를 치하한 후 북상(北上)을 독려하였다. 그 다음날 일본군이 검단 장군의 가택에 방화를 하여 전소되고 말았다. 8월29일 죽장 매현리에서 본부 요인 100여명과 도착하여 숙박하였는데 30일 이른 아침에 대장기(大將旗)가 부러지는 소란이 일어났다. 그날 밤 척후로부터 청송에서 입암으로 작병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적을 소탕하기 위해 복병작전을 펴던 중, 9월 1일 새벽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과 같이 전사했다. 소모장 정순기, 우재룡, 후봉장 이세기 등 제군이 집합하여 매현동 손씨문중의 협조를 받아 호소례(縞素禮)로 서원동 뒷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1962년 독립장 추서, 2013년 12월 이 달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가’로 선정, 전쟁기념관 2016년 11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 <山南義陣遺史 제3편 大將 鄭鏞基將軍 略歷 P259~305><山南倡義誌 卷下 P1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