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을 거니는 소풍(逍風), 조그만 간식을 찍어먹는 피크닉(picnic)
“우리 이번 소풍 대전으로 간대!”
“와아아!”
1993년 가을 어느 소도시 고등학교, 소풍 장소가 ‘대전 엑스포’로 정해지며 아이들은 함성을 질렀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는 기기괴괴한 소풍으로 소문났었던 곳입니다. 1학년과 2학년 봄소풍 때는 400명 학년 전원이 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해, 세 시간 가까이 걸어서 지역 저수지로 갔습니다. 심지어 교련복 차림이었습니다. 복장도 내용도 행군이었습니다. 뙤약볕에 벌겋게 익어서 그늘도 없는 바위밭에 도착해서, 김밥 먹고 함께 유행가 부른 30분이 소풍의 전부였습니다. 올 때도 학교 인근까지 걸어서 복귀했습니다.
“너무 불만들 갖지 마. 옛날에는 훈련용 고무총도 메고 갔었다더라.”
우리의 볼멘 표정에 담임 선생님이 위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3학년 봄소풍 때는 교련복 차림으로 지역 명산에 올라갔습니다. 1, 2학년 때는 그냥 행군이었는데, 3학년 때는 ‘산악행군’이었습니다. 일찍 하산해 아이들의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니 장관이었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이라, 기억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는데 짝꿍 오봉이가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인민군이네.”
국민학교 때부터 소풍이라고 갔던 곳은 죄다 박씨묘, 정씨묘 같은 묘지였습니다. 그랬던 소풍 잔혹사에 대전 엑스포라니! 그것도 전세버스를 타고, TV 뉴스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도우미 누나들도 보고, 꿈돌이동산에서 놀이기구도 탈 수 있다니!
엑스포는 기대보다 훨씬 더 멋진 신세계였습니다. 도우미 누나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늘씬하고 세련된 모습이라 가슴이 쿵쾅댔습니다. 국제행사라 여기저기서 금발 외국인들이 보이니 영어로 말도 걸어봤습니다. “나이스 투 미트 유”와 “화인 땡큐 앤드 유”가 다였지만, 왠지 시골 촌놈이 아니라 세계인이 된 듯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도시락 김밥을 먹다가 땅에 떨어뜨려도, 흔들린 사이다캔을 따다가 옷에 흘려도, 그저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 옆자리 ‘뒤집기’가 한 마디 건넵니다. 본명은 일두였는데, 2학년 신체검사 때 팬티를 뒤집어 입고 와서 별명이 뒤집기가 된 유쾌한 벗이었습니다.
“대두야, 우리 대학은 꼭 서울로 가자.”
“갑자기 웬 속옷 뒤집어 입는 소리야?”
“대전직할시만 와도 이렇게 볼 게 많은데, 서울특별시는 얼마나 특별하겠어?”
아주 설레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말에 좀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았습니다. 그렇게 제 학창시절 유일한 ‘멋진 소풍’이 저물어 갔습니다. 일두가 서울 소재 대학교로 진학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11월에 본 2차 수능 결과는 8월에 본 1차 수능점수보다 훨씬 낮아졌습니다. 젠장! 훨씬 젠장!
소풍은 ‘노닐 소(逍)’자와 ‘바람 풍(風)’자로 이뤄진 말입니다. ‘한가로이 거닐며 바람과 분위기를 즐기는 활동’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어떤 AI는 ‘바람처럼 흘러다니는 유람’이라고도 설명하는데, 과도하게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소풍은 조선후기 문헌부터 ‘유유자적한 나들이’나 ‘봄맞이 행락(行樂: 다닐 행, 즐길 락)’이란 뜻으로 쓰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이나 정조 시기의 문집에서도, ‘소풍(逍風)’과 ‘답청(踏靑: 밟을 답, 푸를 청. 봄에 파랗게 난 풀을 밟는 산책)’이 봄 나들이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소풍의 영단어 ‘피크닉(picnic)’은 프랑스어 ‘pique-nique’에서 왔습니다. ‘찍다/집어먹다’를 뜻하는 ‘piquer(영단어: pick)’와 ‘사소한 것/작은 먹을거리’를 가리키는 ‘nique’가 모여, ‘작은 것을 집어먹는 식사’, 즉 ‘손으로 집어먹는 가벼운 식사’를 의미하다가, 영어로 넘어오며 ‘야외에서 가볍게 즐기는 식사’로 정착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소풍’과 동의어처럼 쓰이지만, 피크닉은 식사에, 소풍은 여정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소풍의 단짝 김밥은 문자 그대로 해조류 ‘김’과 식사로 먹는 ‘밥’의 합성어입니다. 일본에도 김밥과 비슷한 ‘노리마키(海苔巻き: 바다 해, 이끼 태, 말 권)’라는 음식이 있는데, 노리(海苔)는 ‘김’을, 마키(巻き)는 ‘감은 것, 말이’를 가리킵니다. 김은 조선 중기 의병장 김여익이 광양에서 최초로 양식해, 그의 성을 따 김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김밥의 파트너 사이다(cider)는 프랑스어 ‘cidre’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독한 술이나 맥주를 ’을 뜻하는 ‘šēkār’가 라틴어 ‘sicera’를 거쳤습니다. 본래 의미는 사과로 만든 발효주, 즉 ‘사과술(apple cider)’입니다. 일본에서 사이다(サイダー/saida)를 탄산음료(ginger ale류)로 의미를 확장했고, 한국이 1900년대 초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외래어 ‘사이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식 사이다는 영어 ‘cider’가 아니라, ‘carbonated lemon soda’에 가깝습니다.
어린이들의 소풍에는 솜사탕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솜사탕의 영단어는 ‘코튼 캔디(cotton candy)’입니다. 네, 솜처럼 부드럽고 몽실몽실하게 만든 사탕입니다. 영국에서는 ‘사탕 실’이란 의미로 ‘캔디 플로스(candyfloss)’라고 부릅니다. 솜사탕은 1897년 미국의 치과의사 윌리엄 모리슨(William Morrison)이 제과업자 존 와튼(John Whatrton)의 도움을 받아 고안한 기계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치과의사가 충치 생기기 좋은 기계와 간식을 만들다니! 천재 사업가군요.(퍼온 글: 낡은 소년)
첫댓글 속옷 뒤집어질 정도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공부시키는 글은 처음 읽었어요.
와~
소풍과 피크닉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줄은..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 그치고 바람이 솔솔~~
추워지기 전에 가까운 곳으로 소풍가서 피크닉이라도 해야겠어요~^^
저는 달성습지로 소풍왔어요.
비가 오네요.
비맞는 억새의 정취에 빠지겠어요.
긴 글이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머나 잘 읽었습니다
처음에 읽을때는
송재옥 선생님 글인줄
알고 상상하며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는데
퍼 온 글이시내요 ㅎ
어쩌든 저쩌든 다양한
소풍날의 소재들에 대한것도
새삼 알게 되었네요
소풍은 늘 가 보고픈
로망이기도 한데
그걸 못가고 있네요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ㅡ....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_*
제가 이렇게
재미있게 쓴다면 ㅎㅎㅎ
선생님.
대구로
소풍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