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소시모리와 서라벌
미시나 쇼에[삼품창영(三品彰英)] 같은 일제의 관학자는 증시무리(曾尸茂梨)의 일본 음 ‘소시모리’ 혹은 ‘소시호리’가 서울의 음과도 통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라의 국호를 나타내는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이 소시모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지요. 참고로 관학자(官學者)는 국가에서 세운 기관에 소속되어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고대 한국어에서 소·쇠는 금(金), 벌은 성(城)·성읍의 의미여서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소시모리라는 지명과 신라를 연관시킨다면 소시모리는 금성, 즉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가리킨다고 하지요. 여기에 대해 이 신화는 신라가 진한시대부터 바다를 건너서 일본에 진출하였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해석하기도 합니다.
한편 ‘소시모리’를 ‘소의 머리’로 해석하여 우두(牛頭)대왕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춘천의 우두산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이렇게 본다면 소시모리와 춘천 우두산은 의외의 연결점이 있는 것이지요. 여하튼 이제 구다라오 진쟈(くだらおうじんじゃ) 즉 백제왕 신사로 되돌려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② 백제왕 신사의 주인은 의자왕의 혈통?
이 백제왕 신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라 시대에 활동하던 백제왕(百済王) 가문의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되지요. 원래는 부여씨였을 터인데 일왕이 새롭게 백제왕이라는 성씨를 준 것으로 보입니다.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백제 왕족인 부여선광이 처음으로 백제왕의 씨족명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를 모셨을 가능성이 크지요.
이 부여선광으로부터 백제왕신사의 가계가 본격화됩니다. 부여선광은 의자왕의 아들이기도 했지요. 그 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왕경복(百済王敬福)이 죽었다. 그 선조는 백제국 의자왕으로부터 나왔다. (중략) 의자왕(義慈王)이 그 아들 풍장왕(豊璋王) 및 선광왕(禪廣王)을 보내어 천황을 모시게 하였다. (중략) 풍장은 우리[일본(日本)] 병사와 함께 대항하였으나 구원군이 불리하게 되자 풍장은 배를 타고 고려(高麗)로 도망하고,(후략).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천평신호(天平神護)] 2년(서기 766년) 6월 28일」 |
여기까지는 한국사를 대충 아는 사람도 어느 정도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부여풍장의 동생으로 보이는 부여선광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표현의 윤색이 있는대로 의자왕은 왕자들인 부여풍장과 부여선광을 파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부여풍장은 백제부흥전쟁이 실패해 고구려로 망명했고 부여선광도 백제를 떠나야만 했지요.
(부여)선광은 이로 말미암아 자기나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후지와라[藤原] 조정(朝廷)[(지통천황(持統天皇)]에서 (부여선광에게) 백제왕이라는 호(號)를 내려주었으며, 죽은 후 정광참(正廣參 혹은 정광삼)에 추증하였다.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천평신호(天平神護)] 2년(서기 766년) 6월 28일」 |
앞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이 부여선광의 후손들이 백제왕 신사의 주역들입니다. 아마도 의자왕의 손자이자 부여선광의 아들인 창성이 백제왕이라는 성씨를 계승했고 그렇게 가계를 이어간 것으로 여겨지고요. 부여선광의 가계는 선광-창성-랑우-경복으로 이어집니다. 경복은 선광의 증손자이자 의자왕의 고손자가 되겠군요.
(부여선광의) 아들 백제왕창성(百濟王昌成)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조정에 귀의하였는데,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중략) (창성의) 아들 랑우(郎虞)는 나라[나량(奈良)] 조정(朝廷)에서 종(從)4위(位)하(下) 섭진량(攝津亮)을 지냈다. 경복(敬福)은 그 (랑우의) 세째 아들이다. 마음대로 행하여 구애됨이 없었고 (후략).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천평신호(天平神護)] 2년(서기 766년) 6월 28일」 |
③ 백제왕경복의 사람됨과 도다이지[동대사(東大寺)]
부여선광의 증손인 경복은 상당히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감신성무황제(感神聖武皇帝)가 특별히 총애하고 대우하여 상으로 내리는 물건이 더욱 후하였다. 이때 어떤 백성들이 와서 가난함을 아뢰면 매번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빌려서까지 바라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외직(外職)을 여러 번 역임하고도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경복은) 성품이 분명하고 분별력이 있어 정사를 맡아볼 만한 도량이 있었다.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천평신호(天平神護)] 2년(서기 766년) 6월 28일」 |
여기까지였다면 인품은 좋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전(前) 왕족의 특히 타국 왕족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복이 존재감을 나타낼 때가 다가왔지요. 그것은 도다이지를 건립하고자하는 쇼무덴노 즉 일왕 성무의 의지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덴표[천평(天平)] 연간(729∼748)에 벼슬이 종5위상 무쓰노카미[륙오(태)수(陸奧守)]에 이르렀다. 이때 쇼무 고테이[성무황제(聖武皇帝)]가 로사나동상(盧舍那銅像)[도다이지 대불]을 만드는 데 주조를 끝낼 즈음에 칠할 금이 부족하였다.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천평신호(天平神護)] 2년(서기 766년) 6월 28일」 |
바로 이때 경복은 도다이지 즉 동대사(東大寺) 건립에 상당한 역할을 하지요.
이에 (경복이) 무쓰국[陸奧國]에서 역마로 달려와, 오다군[小田郡]에서 나온 황금 900냥을 바쳤다. 우리나라(일본)에서 황금은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쇼무 고테이[성무황제(聖武皇帝)]가 매우 가상히 여겨 종3위를 주고 궁내경(宮内卿)으로 옮겼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가와치노카미[河內守]를 더하였다. (중략) 죽었을 때의 나이가 69세였다.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천평신호(天平神護)] 2년(서기 766년) 6월 28일」 |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