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부여선광과 그 가문의 일본 정착
부여선광 가문은 원래 셋쓰노쿠니[섭진국(摂津国)] 백제군(百済郡)에 모여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현재의 오사카시[대판시(大阪市)] 덴노지 구[천왕사 구(天王寺区)]와 이쿠노구[생야 구(生野区)]라는 지역들 일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요. 이 부여선광의 증손인 백제왕경복(성은 백제왕, 이름은 경복)이 도다이지 건립에 힘을 보탠 것입니다.
서기 749년에 경복은 앞의 원전에서 보신대로 궁내경과 가와치국의 책임자인 가와치노카미(河内守)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일족이 현재 구다라오 신사의 소재지인 가와치노쿠니[하내국(河内国)] 가타노군[교야군(交野郡)]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고요. 가와치노쿠니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의 오사카부 가운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본디 카와치 부근은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육지의 고도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퇴적 현상이 일어나며 해안선이 후퇴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이로 인해 오사카 평야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카와치 지역은 중세에 걸처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명실상부한 중세 일본의 수도권이 되었다고 하지요. 참고로 일본의 중세는 1185~1568년 정도입니다.
② 백제왕 가문의 절, 백제사[구다라지] Ⅰ
신사 바로 옆에는 백제왕 가문의 씨사(氏寺)인 구다라지(百済寺) 터가 있습니다. 여기서 또 이상한 단어 나오냐 해서 머리가 지끈거리는 분들도 있으실 듯하네요. 그래도 차분히 쫓아오시다 보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여하튼 바로 앞에 있는 씨사라는 말이 그러하지요. 씨사 혹은 우지데라[うじでら 氏寺]라는 곳은 한자에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절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국가의 절이 아니라 주로 헤이안[평안(平安)] 시대에 권문(權門)들이 자기들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라 합니다. 헤이안 지다이 혹은 평안(平安) 시대(時代)라 불리는 시기는 서기 794년부터 1185년 혹은 1192년까지의 시기이지요. 백제왕경복이 서기 766년 별세한 때로부터도 거의 30여년 뒤에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권문(權門)은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을 말합니다. 고려 말에 권문세족 운운하는데 바로 그때 쓰는 말이 권문이지요. 백제왕 가문도 이런 권문에 속했다는 말입니다. 일본 본토의 가문들도 각자 자기 가문의 절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가령 후지와라 우지[등원씨(藤原氏)]의 고후쿠지[흥복사(興福寺)]나 와케 우지[화기씨(和気氏)]의 진간지[신호사(神護寺)]가 그러합니다.
구다라지[백제사(百濟寺)] 터는 일본에서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서기 1932년, 1965년, 2005년에 발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기 2015년부터는 재정비 공사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발굴 조사 결과 사방 140m 가량의 대지에 남문, 중문, 금당, 강당, 식당, 북문이 일직선상에 늘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금당(金堂)은 절의 본당이지요. 정확하게는 본존상을 모신 법당입니다.
본존상(本尊像)은 법당에 모신 부처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부처의 상입니다. 한편 발굴 조사(發掘調査)는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조사이지요. 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 밝혀내기 위해 하는 조사이기도 합니다. 구다라지 터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지요.
③ 백제왕 가문의 절, 백제사[구다라지] Ⅱ
구다라지(백제사) 터에서 2탑 1금당의 형식은 나라에 있는 야쿠시지[약사사(藥師寺)]와 같다고 합니다. 야쿠시지는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위치한 사찰이지요, 야쿠시지는 일본 법상종(法相宗)의 대본산이라고 합니다. 대본산(大本山)은 총본사 아래에 있거나 독립적으로 같은 종지(宗旨)의 작은 말사를 통할하는 큰 절을 말하지요.
총본사(總本寺)는 각 불교 종단에 속하는 본사의 절들을 총괄하는 최고 종정(宗政) 기관입니다. 종지(宗旨)는 종문(宗門) 즉 종파의 종교상의 가르침인 교의(敎義)의 취지이고요. 불교라는 것이 참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가 잘 안되시면 백제사는 야쿠시지처럼 매우 중요하고 요긴한 기능을 하는 절 정도로 알아두시면 되실 듯하네요.
백제사는 중문에서부터 이어진 회랑이 탑을 둘러싸고 금당까지 닿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닿아 있는 것은 경주시 감은사지와 닮았다고 하지요. 쓰는 저도 경주는 가봤지만, 백제사는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겉핥기 식으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글을 쓰거나 읽다보면 신경질이 나게 되는 전문 용어들이 있지요. 가령 회랑 같은 단어 말입니다.
회랑(回廊)은 정당(正堂)의 좌우에 있는 긴 집채 즉 집의 한 덩이를 말합니다.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면 중심 건축물을 둘러싼 무언가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실 듯요. 어떻든 구다라지(백제사)는 상당한 위세를 가진 사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백제사에서 나온 유물들이지요. 유물들로 대형 전불(塼仏)과 금동제장신구 등이 출토된 것이 그 근거입니다.
전불은 점토판에 불(부처)이나 보살을 부조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전불은 전불(甎佛)이라 불리기도 하지요. 여하튼 구다라지는 신사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족이 쇠퇴하며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속일본기』에는 서기 783년 간무 덴노가 백제사에 행차해 세입을 내리고 백제왕 일족에게 관위를 수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왕 가문은 헤이안 초기까지는 황실의 외척이자 상위 귀족으로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사서에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워질 정도로 쇠퇴했지요. 백제왕 가문의 후손을 자처하는 미츠마츠씨의 가계도에는 백제왕경복의 4대손 풍준(豊俊)이 성을 미츠마츠(三松)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성씨가 부여씨→백제왕씨→삼송씨로 바뀌는 파동의 역사군요.
이후에도 미츠마츠 가문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토지 조사 때에 이 지역의 땅을 몰수당하고 인근의 오가이토(大垣内)로 이주했다하지요. 오가이토에도 작은 구다라오 신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사는 서기 1650년에 미츠마츠씨의 저택 내에 지은 사당이었다고 하지요.
구다라오 신사는 이 시기에 인근 거주민들이 받드는 향토 신사로 변화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상신의 사당으로서의 입지를 잃어버린 신사의 성격이 반영된 모양이고요. 이렇게 구다라오 진쟈 즉 백제왕 신사에 대한 글을 맺겠습니다. 다음글에서는 다른 주제로 찾아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