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최승호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를
무슨 무슨 주의의 엿장수들이 가위질한 지도 오래 되었다.
이제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엔
가지도 없고 잎도 없다.
있는 것은 흠집투성이 몸통뿐
허공은 나의 나라, 거기서는 더 해 입을 것도 의무도 없으니
죽었다 생각하고 사라진 신목(神木)의 향기 맡으며 밤을 보내고
깨어나면 다시 국도변에 서 있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귀 있는 바람은 들었으리라.
원치 않는 깃발과 플래카드들이
내 앙상한 몸통에 매달려 나부끼는 소리,
그 뒤에 내 영혼이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소리를.
봄기운에
대장간의 낫이 시퍼런 생기를 띠고
톱니들이 갈수록 뾰족하게 빛이 나니
살벌한 몸통으로 서서 반역하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여
잎사귀 달린 시를, 과일을 나눠 주는 시를
언젠가 나는 쓸 수도 있으리라 초록과 금빛의 향기를 뿌리는 시를.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어
지저귀지 않아도.
-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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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시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참나무과의 상록교목이다. 줄기가 굵고 곧게 자라며 많은 가지와 무성한 잎이 있어 장대한 수형을 이룬다. 붉가시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목재의 색깔이 붉은 데서 비롯되었으며 목재가 무겁고 잘 쪼개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존성이 좋아 가구재와 산업재로 많이 이용된다. 하지만 시는 나무에 박힌 가시에 주목한다. 이 시는 비뚤어진 정치적 이념과 요설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이를 꿋꿋하게 견뎌내어 순결한 영혼이 담긴 시를 쓰고자 하는 결의를 북가시나무에 비추어 드러낸 작품이다.
북가시나무로 비유되는 시적 화자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자유로운 이상을 갈구하지만 벌목꾼의 난립한 이념과 주의에 의해 영혼의 팔 다리가 다 잘려나가고 내면의 상처와 고통만 남는다. 상처투성이의 고독한 존재로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원치 않는 깃발과 플래카드들'이 내 몸을 결박한다. 그 부정적 공간의 부대낌 가운데서도 자신의 순수한 영혼을 지켜가고자 하는데, 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에’ 새싹을 틔워보지만 서슬 푸른 대장간의 ‘낫’과 ‘톱니’들도 동시에 생기를 띠고 자신을 위협한다.
북가시나무 둘레를 맴도는 소란한 환경은 늘 존재해왔다. 어림 턱도 없는 낡은 이념도 문제거니와 특정 이념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에게서도 내면의 황폐함을 본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맞추지 않으면 가차 없이 가위질을 해댔다. 이에 북가시나무는 알몸으로 항거한다. 초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방어기재로 가시만 남는다. 가시는 온갖 위협으로부터 순수를 지키려는 대결의지의 다름 아니다. 그러나 메마른 가시는 나무 곁으로 다가오는 뭇 생명들을 거부한다. 혼자 남겨진 영혼이 어찌 메마르지 않을 수 있으랴.
시인은 허공만이 ‘나의 나라’라고 말한다. 허공엔 이념이 들어설 틈이 없다. 이 허공에서야말로 비로소 ‘사라진 신목(神木)의 향기’를 맡는다. 신목은 영혼의 나무이다. 그 향기는 바로 ‘잎사귀 달린 시, 과일을 나눠 주는 시, 초록과 금빛의 향기를 뿌리는 시’로 환치된다. 풍요롭고 순수한 영혼의 결실로서의 시를 꽃피우고, 그 꽃으로 밝은 미래와 새로운 시대를 꿈꾼다. 하지만 밖으로 가시를 삐죽 내민 나무에는 어떤 새도 어른거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 한 마리 깃들어 지저귀지 않아도' 나 자신의 변모가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오리라 굳게 믿는 것이다.
권순진
첫댓글 '북가시나무'가 원명은 '붉가시나무'군요.
목재 색이 붉고 단단하다면 가구재로서
정말 일품이겠네요.
내사 넘나 예쁠 나무의 붉은 컬러에 현혹되고,
시인은 '가시'에 주목했군요.
역쉬 시인은 달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