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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3/248일차> 2012년 6월 15일(금) 쿠스코, 맑음, 맞추픽추가 신비로 포장된 비밀을 캐다
잉카 최고의 유적으로 꼽히는 마추픽추.
15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나 400여년간 사라졌다 20세기초에 나타난 유적입니다.
스페인의 침략과 잉카 멸망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죠.
오전 6시10분 숙소인 서던 컴포트(Southern Comfort) 호스텔을 떠나 6시30분에 쿠스코 중심부인 아르마스 광장에서 올랸타이탐보(Ollantaytambo)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올랸타이탐보까지는 약 80km 정도로, 1시간 반 이상 걸린다. 6시40분 관광객을 태운 올랸타이탐보 행 버스가 출발했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 쿠스코가 멋지게 펼쳐졌다. 멀리 설산이 햇살에 반짝이고, 나무와 집, 사람들 모두 생기를 찾고 있다. 버스는 어제 돌아보았던 우루밤바 강(Rio Urubamba) 변의 긴 협곡인 ‘신성한 계곡’을 따라 신나게 달렸다.
오늘은 잉카 문명의 정수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해당하는 마추픽추(Machu Picchu)를 돌아보는 날이다. 마추픽추를 여행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쿠스코에서 버스와 페루 레일(Peru Rail) 기차를 번갈아 타고 마추픽추로 다녀오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고대 잉카인들이 걸어다녔던 잉카 트레일(Inca Trail)을 따라 걸어서 가는 방법이다. 페루 레일을 이용하면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 늦게 돌아올 수 있는 반면, 잉카 트레일은 43km의 험준한 산길을 3~4일 동안 걸어서 가야 한다. 잉카 트레일은 산악지방을 직접 걸으며 잉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최소한 3일 전에 예약을 하고 가이드와 함께 그룹으로 여행해야 한다. 나는 이미 안데스 산악지방을 질리도록 여행했 때문에, 페루 레일을 이용하기로 했다. 페루 레일이 운치 있고, 기차에서 보는 경치도 환상적이라고 해서 기대도 된다.
마추픽추 행 기차는 쿠스코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올랸타이탐보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가야 했다. 쿠스코를 출발한지 거의 2시간 가까이 된 8시30분께 올랸타이탐보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각기 다른 버스를 타고 올랸타이탐보로 이미 왔거나 막 들어오고 있었다. 도착해서는 바로 쨈 바른 빵 2개와 샌드위치 1개를 샀다. 커피도 한 잔 마셨다. 한국의 등산로 입구에서 김밥이나 떡을 팔듯이 올랸타이탐보 기차역 입구에 샌드위치와 빵을 파는 간이매점이 죽 늘어서 있었다. 마추픽추의 물가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여기에서 점심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올랸타이탐보엔 흥겨운 분위기가 넘쳤다.
마추픽추로 가는 '잉카 열차'가 출발하는 올랸타이탐보 역.
페루 레일은 8시53분에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20여분 지난 9시15분에 출발했다. '잉카 열차'라고도 하는 환상적인 기차였다. 우루밤바 강이 만든 깊은 계곡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운행했다. 자연 속으로, 잉카의 역사 속으로 환상여행을 떠나는 열차 같았다. 페루 레일의 천장은 유리로 만들어져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과 협곡의 경치가 한눈에 보였다. 워낙 깊은 협곡이어서 양편의 가파른 산줄기가 유리 천장에 그대로 나타났다. 기차에서는 항공기의 기내식 서비스처럼 스낵과 커피도 제공했다. 티켓을 끊을 때도 여권을 보여달라고 하고, 역 구내로 들어올 때에도 티켓을 보여달라고 하더니, 절차나 서비스가 항공기와 거의 비슷했다.
페루 열차 내부.
투명한 유리로 덮인 천장에 하늘과 절벽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올랸타이탐보를 출발해 계곡으로 조금 들어가자 바로 정글이 나타났다. 이곳은 위도(남위) 13도의 열대지역이다. 하지만 쿠스코가 해발고도 3400m, 올랸타이탐보가 2800m로 각각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경계선에 있어 정글이 형성되기 어려웠던 반면, 마추픽추 역이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는 2000m다. 기차가 우루밤바 계곡을 따라 고도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 정글이 나타난 것이다. 건조하고 척박한 곳에서 갑자기 푸르게 채색된 산이 나타나고 파란 하늘, 흰 구름이 펼쳐지자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탁 트였다.
내 옆자리에는 캐나다 가족여행자가 자리를 잡았다. 데이빗이라는 은퇴한 캐나다인이었다. 대학교에 2년 반 다니고 있는 아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과 6개월 일정으로 여행하고 있는데, 남미에서 5개월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볼리비아에 대한 인식이 다소 다름을 확인했다. 내가 좀 어둡고 희망을 찾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자, 데이빗은 놀라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 중의 하나라며 사람들이 수줍어하지만 매우 친절하고 가격도 무척 저렴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르헨티나도 나는 여행 내내 비가 오거나 흐려서 활기 있는 거리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하자, 자신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4~5일 묵었는데, 하루만 빼고 나머지는 날씨가 맑아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데이빗이 보고 느낀 것도 내가 보고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런데 데이빗과 우리 가족은 비슷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엔 가족 모두 세계 여행에 나섰으나 아내와 큰 아들, 작은 아들이 여행을 시작한지 6개월을 지나면서 차례로 한국으로 떠나고 지금은 나 혼자 남미를 여행하고 있다고 말하자 데이빗은 크게 놀라면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처음에는 가족이 모두 여행하기 시작했으나 아내가 먼저 귀국하고 조금 있으면 딸도 귀국할 예정”이라고 즐겁게 이야기했다. 가족 간의 신뢰와 사랑, 잉카 문화, 안데스의 신비와 장엄함에 대해 공유하면서 페루 레일을 즐겼다.
마추픽추 아래에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역.
올랸타이탐보에서 마추픽추 입구까지 거리는 45km 정도 되지만 기차는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려 9시45분 마추픽추 입구인 ‘온천’이라는 의미의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마추픽추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인기를 끌면서 막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이었다. 곳곳에 식당과 상점, 숙소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도착하니 가이드가 나와 있었다. 그는 우리를 마추픽추의 전문 가이드에게 인도해주는 중간책이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17달러를 내고 전용 셔틀을 타고 마추픽추로 올라갔다.
마추픽추는 우르밤바 강이 휘돌아 나가 3면이 급경사를 이루며 우뚝 솟은 험준한 산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루밤바 강은 해발 2000m이지만, 마추픽추는 2400m로 400m 높이의 절벽을 올라가야 한다. 셔틀버스는 절벽에 나 있는 도로를 360도로 돌면서 구불구불 올라갔다.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정글과 험준한 산악이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코스였다.
마추픽추 산.
저 산 꼭대기에 마추픽추 유적이 있지만,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추픽추는 접근이 아주 어려운 곳이다. 자연적으로 탁월한 방어기지이기도 하다. 서쪽 태평양 쪽에서 접근하려면 400km가 넘는 안데스 고원의 황량한 사막지대를 통과해야 잉카의 심장부 쿠스코에 도착할 수 있고, 거기서 다시 80km 정도 더 들어와야 한다. 반대편으로는 안데스 험산들을 너머 아마존 밀림이 전개되기 때문에 동쪽에서는 사실상 접근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동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도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심산유곡의 산꼭대기에 돌로 만든 고대도시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 그 자체였다.
절벽에 만든 도로를 30분 정도 올라가자 드디어 마추픽추가 나타났다. 입구를 통과해 들어가자 샐로먼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포함해 다른 여행자 그룹을 가이드하기로 돼 있었다. 샐로먼의 안내로 다른 여행자들과 마추픽추 투어를 시작했다. 사진과 글로만 보던 마추픽추를 대하자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유적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 절로 느껴졌다.
셔틀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마추픽추 산을 올라 입구로 들어서자 나타나는 유적...
마추픽추는 15세기에 약 2000여명의 농민과 노동자가 100년에 걸쳐 건설한, 잉카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신전이자, 주거지역이자, 방어기지 등 다목적 용도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잉카의 9대왕으로 1438~1472년에 통치한 파차쿠티(Pachacuti)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차쿠티는 안데스 중서부 지역을 처음으로 통합해 잉카 제국을 건설한 왕이다. 샐로먼 가이드는 “이곳에 600~700명이 거주했으며, 제사장도 거주했다”고 말했다. 마추픽추는 농업지역, 거주지역이 나뉘어져 있는데, 강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별도의 수로를 만들지 않고도 농업이 가능했다고 했다. 일반 주민의 거주지역 이외에 태양의 신에게 제를 지내기 위해 이곳을 찾는 귀족과 왕족들을 위한 방문자 지역도 만들어져 있었다.
마추픽추의 계단식 경작지 모습.
가파른 절벽에 돌을 쌓아 경작지를 만들었습니다.
계단식 경작지의 규모가 어머어마합니다.
워낙 깊은 협곡으로 이뤄진 지역이기 때문에 여기서밖에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경작지 너머 산 등성이로 잉카인들이 다녔던 잉카 트레일이 보입니다.
계단식 경작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라마.
마추픽추는 그 모습만큼이나 신비로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마추픽추는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정복한 이후 400~500년 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 초 홀연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천연두(마마)가 확산돼 지역 주민들이 사망하면서 정복자들도 이 도시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450여년이 흐른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발견,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당시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던 빙엄은 1911년 잉카의 다른 유적을 탐사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잉카가 마지막까지 항거했으나 기록에서 없어진 이른바 잉카의 ‘사라진 도시’를 찾으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일대를 돌아다니던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산꼭대기에 옛 잉카 도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1세인 파블리토 알바레즈(Pablito Alvarez)라는 원주민 케추아(Quechua) 아이의 안내를 받아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열대우림이 무성하게 덮고 있던 산 정상에 감추어져 있던 엄청난 유적을 발견한다. 당시 그곳엔 일부 케추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의 잉카 후예들은 마추픽추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새로운 ‘발견’이라며 세상에 소개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 것이다.
마추픽추 전경.
가운데 광장을 중심으로 주거지역과 신전 등이 펼쳐져 있고,
사진 앞쪽으로 농업지역인 계단식 경작지가 펼쳐집니다.
마추픽추는 스페인이 정복한 이후에 잊혀져 있었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바람에 오히려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쿠스코를 비롯해 곳곳에서 자행된 파괴의 피해를 빗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백년에 걸쳐 허물어지긴 했지만, 신전과 건축물들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수백년간 정글로 뒤덮인 채 자연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빙엄은 1915년까지 수차례 탐사를 하고 ‘잉카의 사라진 도시(The Lost City of Incas)’라는 책을 펴내면서 마추픽추의 신비로운 모습을 세상에 소개했다.
마추픽추는 크게 두 개의 권역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는 주거 및 신전이 있는 도시지역이며 다른 하나는 계단식 경작지로 이뤄진 농경지역이다. 도시지역은 다시 태양의 신전, 콘도르의 신전 등이 있는 신전지역과 일반인과 귀족 등의 주거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농업지역은 정상부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비탈에 일일이 돌을 쌓아 만든 계단식 농경지였다.
모든 건물과 신전, 심지어 경작지까지 모두 바위를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그 바위를 깎아 쌓아올린 것이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어제 돌아보았던 피삭이나 올랸타이탐보 유적이 예고편이었다면, 마추픽추는 바로 그 돌 예술의 결정판이었다. 바위와 바위가 맞닿은 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깎아 맞추었는지 면도칼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다. 대부분의 건축물이 석회나 시멘트 같은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정확하게 깎아 이어 붙였다. 샐로먼 가이드는 “페루는 지진 다발지역으로 모르타르를 사용하는 것보다 이처럼 바위를 정교하게 깎아 맞춘 건축물이 더 안전하다”면서 “이런 건축양식이 잉카 전통 양식이며, 마추픽추가 그 잉카 건축양식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키가 크지 않고 통통한 메스티조인 샐로먼 가이드는 잉카의 건축기법이 아주 뛰어났다며 자못 자랑스러운 듯이 유적들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했다.
'태양의 신전'
입구에서 경작지역을 통과해 도시지역으로 들어서자 먼저 ‘태양의 신전(Temple of the Sun)이 나타났다. 잉카에서 가장 숭배하는 태양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동쪽과 남쪽에 각각 1개씩 2개의 창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특히 기단부에 놓여 있는 거대한 바위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 위에 바위가 딱 들어맞도록 깎아 신전을 세운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웬만큼 돌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었다면 흉내도 내기 힘든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기단부의 큰 바위 모습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 모양에 맞추어 돌을 깎아 건물을 지었습니다.
태양의 신전 아래 쪽엔 발굴 과정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된 ‘귀족의 무덤(Royal Tomb)’이 있었고, 태양의 신전 위쪽으로는 ‘왕궁(Royal Palace)’이 배치돼 있었다. 이어 조금 더 올라가자 사제들이 거주하던 집과 중앙광장인 신성한 광장, 3개의 창문을 가진 건물이 나타났다. 특히 3개의 창문을 가진 신전은 잉카 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3개의 창문을 낸 벽면의 바위가 서로 다른 모양으로 서로 엇갈리게 이어져 있었다. 쌓아올린 돌 가운데 같은 모양을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것은 길쭉한 직육면체, 어떤 것은 디귿자(ㄷ) 모양, 어떤 것은 꺽쇠 모양을, 어떤 것은 요철(凹凸) 모양을 하는 등 커다란 바위들을 자유자재로 깎아 정확하게 맞춰놓았다. 동일한 돌을 쌓아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벽채를 만든 것이었다.
잉카인들의 유골이 발견된 '귀족의 무덤'.
주거지역의 건물 유적들.
3개의 창문을 가진 벽면.
벽면을 이루고 있는 돌이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대한 바위와 작은(?) 바위들을 정교하게 이어붙인 벽면.
마추픽추 정상 부분의 풀밭에도 라마들이 올라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도시 지역엔 이외에 일반주민의 주택과 주민들의 회합장소, 수공업지역, 정원 등이 구역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맨 위에는 ‘인티후아타나 돌(Itihuatana Stone)’이라고 하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신성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태양을 담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바위로, 중앙에 직육면체 형태의 돌출부를 지닌 다면체 바위였다. 매년 춘분과 추분이 되면 태양이 정확히 이 바위의 모습과 일치해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바위다. 하루의 시간을 재는 용도가 아니라 절기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천체 시계 또는 잉카의 캘린더 역할을 한 중요한 바위였다. 잉카가 탁월한 과학 및 천체 관측기술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었다.
마추픽추 맨 꼭대기에 있는 '인티후아타나 돌'
춘분과 추분 때 이 바위 모습과 태양의 위치가 일치해 그림자가 사라져
'태양을 담은 기둥'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면체 바위입니다.
잉카인들이 어떻게 그 육중한 바위를 칼로 도려내듯이 자르고 깎아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바위도 눈길을 끌었다. 큰 바위에 일렬로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을 따라 균열이 나 있는 바위였다. 살로먼 가이드는 원하는 방향에 맞추어 큰 바위에 작은 구멍을 내고 거기에 나무를 박은 다음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도록 함으로써 바위를 잘랐던 것을 보여주는 바위라고 설명했다. 지금처럼 바위를 잘라낼 수 있는 강한 금속과 기계가 없던 시절, 자연의 원리를 이용해 바위를 자르고 맞추었던 잉카인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바위를 원하는 모양으로 그토록 정확하게 자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잉카의 바위 절단 과정을 보여주는 바위.
이런 방식으로 그렇게 정교하게 바위를 깎아 정교하게 맞추었는지는...
정상 부위엔 마추픽추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바위, 마추픽추에서 바라본 앞쪽의 산악지방과 똑같이 생긴 바위 등이 있어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두 개의 우물에 반사된 태양의 위치를 통해 절기 변화를 관측하던 장치도 흥미로웠다. 태양과 가장 가까이 날아갈 수 있어 잉카인들이 신성시했던 ‘콘도르 사원(Temple of the Condor)’도 있었다. 바닥의 바위를 콘도르처럼 깎아놓은 것으로,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살로먼 가이드는 콘도르가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며, 오늘날 SNS를 이용하지만 과거엔 콘도르를 메신저로 사용했다고 얘기해 좌중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수백년 전에 잉카가 메신저의 원조라고 말했다.
마추픽추 산의 모습을 닮은 바위.
마추픽추 앞의 산악지형을 닮은 바위.
두 개의 우물에 비친 태양과 달의 위치를 통해 절기 변화를 관측하던 장치.
콘도르 바위.
태양과 가장 가까이 갈 수 있어 잉카인들이 숭배했던 동물입니다.
살로먼 가이드는 마추픽추의 유적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잉카가 독특한 문화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그것이 다 파괴됐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살로먼은 특히 그러한 정복자들의 파괴적인 행위로 인해 인류 문화의 귀중한 유산이 사라졌고, 남미 원주민의 삶도 피폐해졌다면서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설명에 거북함을 느꼈는지 한 서양 여행자가 “유적에 대해 설명만 하면 되지 거기에 정치적인 해석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말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지만, 살로먼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몰이해로 이문화에 대한 말살과 파괴가 진행된 것이 사실”이라며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살로먼 가이드는 “여기서 불법적으로 반출된 유물이 아직도 반환되지 않고 있다”며 문명파괴와 약탈의 역사가 아직도 끝난 문제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곳을 처음 발굴한 빙엄은 1915년까지 수차례 발굴을 통해 확보한 토기류와 은 장식품, 보석, 유골 등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소속돼 있던 미국 예일대로 반출했다. 페루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을 보존하고 관리, 연구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제국주의자들이 문화재를 반출할 때 항상 들이대는 이유다. 이러한 문화재 반출에 대해 페루 학자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빙엄은 볼리비아를 통해 불법적으로 밀반출했다고 한다.
과거 화려했던 잉카의 영화는 사라지고,
지금은 만고풍상을 견디어낸 돌과 바위만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마추픽추.
아직도 많은 유물이 예일대 피보디(Peabody)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페루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예일대에 마추픽추 유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예일대는 반환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 미루다가 2010년에야 포괄적인 반환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실제 반환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예일대가 반환 조건으로 제시한 쿠스코의 박물관 건설과 이를 보존하고 연구할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살로먼은 이런 스토리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단순한 유적지 해설사가 아니라 강한 역사인식을 지닌 인상적인 가이드였다.
잉카 전성기엔 이곳에 지붕이 올라가고, 문이 달리고,
골목에는 알록달록한 의상을 입고 콘도르 깃털을 단 잉카인들이 벅적거리지 않았을까요?
잉카인들이 오르내렸던 계단엔 이제 관광객들만이...
약 2시간 동안 살로먼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주요 시설을 돌아본 다음, 마추픽추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잉카 트레일과 만나는 이른바 ‘경비병들의 집(House of Guards)’이 있는 곳으로 언덕에 올라서자 마추픽추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살로먼 가이드의 인상적인 설명을 들어서인지 뾰족한 산봉우리에 조성된 마추픽추가 신비감에 쌓여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마추픽추를 바라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우리가 얼마나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됐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아메리카 신대륙을 탐험한 15~16세기를 ‘대항해 시대’, 도전과 모험의 시대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침략과 무자비한 문명 말살의 역사였다.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돌아보면서 균형적인 역사인식이 무엇인지 새삼 절감했다.
경비병의 집으로 올라와 바라본 마추픽추 전경.
마추픽추를 둘러싸고 있는 험준한 산들.
이렇게 깊은 산중에 '공중의 도시'를 만든 것이 경이롭습니다.
둘째는 잉카와 마추픽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그 동안 잉카문명에 대해선 신비로운 문명이라느니, 불가사의한 문명이라고 인식해왔다. 일부에서는 이곳의 신비로운 유적들이 외계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잉카와 마추픽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잉카는 엄연한 역사적 실체였고, 마추픽추는 그 잉카가 축적해온 탁월한 과학기술의 결정체였다. 애당초 스페인이 잉카를 점령했을 때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 문명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황금과 영토 확장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잉카 문명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파괴의 대상이 됐고, 그것이 잉카에 대한 무지와 신비화의 결정적 요소였다. 역사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셋째로 스페인과 유럽 침략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잉카 신비주의화의 이면엔 이들의 탁월한 과학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잉카의 부활을 막기 위한 상징조작이었던 것이다. 잉카 신비주의의 이면엔 ‘잉카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보유할 수 없다’는 문화 열등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열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스페인의 점령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잉카의 부활을 막으려는 의도가 내재돼 있던 것이다. 일제가 한국에 강요했던 식민주의 사관이 잉카에도 적용됐던 셈이다.
잉카인들이 만들고 교통로로 사용했던 '잉카 트레일'.
지금까지의 역사적 발굴에 의하면 잉카에서 수레를 사용한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해 잉카 문명은 역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 들어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살로먼 가이드의 말처럼 다른 문명에 대한 무지로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훼손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어쩌면 지금도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새겨볼 필요도 있다. 특히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이문화에 대한 무시와 암묵적인 말살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지 반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잉카의 성벽을 통해 바라본 앞쪽의 산들.
산 아래에 '잉카 열차'가 승객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추픽추 여행은 기존의 역사 및 문명 또는 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여정이었다. 그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여정이었다. 마추픽추 관람을 마치고 오후 3시16분 내려와 마추픽추 입구의 카페에서 카페를 한 잔 했다. 카페 한 잔이 2.27누에보솔이었으며 세금 등을 합해 2.91누에보솔(약 1455원)을 지불했다. 그런 다음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를 한참 돌아보았다. 엄청난 상가가 조성돼 있었다. 마추픽추가 매년 2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으로, 한창 ‘개발 바람’을 타고 있었다. 마추픽추가 과거 식민주의자들의 점령으로 곤욕을 치르고 이제는 자본주의 홍수로 또 다른 홍역을 치를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마추픽추 아래의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역.
관광객과 여행자들이 늘어나면서 심한 개발몸살을 앓고 있는 곳입니다.
마추픽추 산 아래를 흐르는 우루밤바 강.
오후 5시30분 페루 레일을 타고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를 출발해 포로이로 향했다. 세계 최고의 환상열차가 바로 페루 마추픽추 열차였다. 이상한 점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왜 미국 달러로 계산을 할까. 둘째는 여권을 보여주어야 하고, 서비스는 항공기의 기내서비스 수준이다. 부자들을 위한 고급 운송수단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포로이에 도착하니 택시 운전수가 기다리고 있어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파트리시아가 모든 일정에 맞추어 사람들을 배치해 하나도 헷갈리지 않고, 모든 여정을 안전하고 감동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페루레일 티켓과 여권.
페루 레일을 타고 마추픽추를 떠나 쿠스코로 돌아가면서...
마추픽추 여행으로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세계 희망찾기 대장정이 사실상 끝난 듯한 느낌이다. 오늘 마추픽추에 이어 내일 쿠스코 시내 여행을 마치고 리마로 가면 이제 고산지대 여행은 끝나고 평지를 통해 에콰도르와 콜롬비아를 거쳐 미 대륙 횡단으로 모든 여정이 끝난다.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고 9개월 동안의 황홀한 재충전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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